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8)
398화. 등잔 아래 (2)
“물러나라고?”
[이대로라면 자네는 불사 교단의 정예와 맞닥뜨릴 거야. 물론 명천사 창백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들의 공세는 차원이 다르겠지. 감당할 수 있는 군세가 아니야.]아이작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시에로가 아이작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조언하고 있었다.
그를 죽도록 패고 귀까지 뜯어낸 다음, 사지로 밀어 넣었던 아이작의 입장에서는 기묘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시에로가 아이작에게 조언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나마 고민한 다음 대답했다.
“아니.”
[아니라니? 물러나지 않겠다는 건가?]“음, 물러나지 않는다.”
[그건 만용일세! 불사 교단은 진심으로…….]“만용이 아니라, 나는 등대지기를 믿는다.”
우스운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이작은 등대지기를 믿고 있었다.
아이작을 구하러 달려와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대지기의 집착을 믿는 것이다.
“등대지기는 반드시 불사 교단을 배신한다.”
빛의 법전의 최고 명천사를 두고 하기에는 모멸적이기까지 한 발언에 시에로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하지만 상대의 선의를 믿을 수 없다면 상대의 목적이라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등대지기는 선의나 인연 때문에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신뢰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따로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보다 오월의 검이 묘지 군주를 패퇴시켰다고 했나?”
[그, 그래. 데라 헤만도 그 와중에 큰 부상을 당했다고 듣긴 했네만…….]아이작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될 자들이 누구일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묘지 군주가 이쪽으로 오겠군.”
묘지 군주는 불사 교단의 명천사 중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여태껏 아이작이 만난 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월의 검과 데라 헤만과의 교전에서 패퇴했다면, 분명 영혼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언데드는 온몸이 바스러져도 순식간에 털고 일어날 수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육신이 멀쩡해도 영혼이 훼손되면 큰 타격을 입는다.
창백이 아이작에게 목이 잘린 뒤 요새로 도망친 것도 영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능력 없는 일반인이 수천수만 명 있어도 천사를 티끌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사 교단으로선 내키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명천사를 소멸시킨 아이작에게 데스나이트들만 보내선 의미가 없다. 반드시 묘지 군주가 올 것이다.
불사 황제가 직접 나선다든가 하는 상황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눈 후 확신했다.
신은 스스로가 만든 규율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존재다. 자기 입으로 아이작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이상, 아이작이 신앙의 근본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불사 황제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나선다면…… 뭐, 방법이 없으니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일단은 묘지 군주부터 생각하자. 묘지 군주는 강력한 명천사지만 상처 입은 상태라면 상대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이작은 때마침 미궁 계곡에 들어서는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선두를 응시했다.
원래 아이작은 이쯤에서 다시 합류할까 했었다. 하지만 베셰크와의 만남, 빛의 법전의 태도 변화, 불사 교단의 움직임 등을 고려하고 생각을 바꿨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가 다루기 좋은 패다 이거지?’
아이작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번거롭게 꼬시려 드는 베셰크나, 이리저리 휘두르려 드는 등대지기나,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걸 보니 꽤 우습게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엔 잘못 건드렸다.
지금까지 아이작은 신들의 의지와 계획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목숨을 연명해 왔다.
점잖은 성배기사처럼 구니까 정말로 하찮은 인간처럼 보인 모양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경악하고 공포에 떨어야 할 촉수 괴물이라는 사실을 정중하게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대열 선두에서 걷고 있는 분열된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육안으론 보이지 않을 거리였지만 서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너는 일단 온전하고 깨끗한 성배기사로 남아 있어라.’
아이작이 정체를 들키기 쉬운 때는 포식하거나 촉수를 꺼내야 하는 경우다. 권속을 부릴 때도 위험한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게벨은 알면서도 침묵하는 눈치였다.
촉수를 보다 적극적으로 쓰기 위해서라도, 들킬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는 쪽이 좋았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은 한동안 그늘 속의 괴물로 남아 있는 쪽이 낫다.
아이작은 시에로를 통해 전해 들은 여명군 수뇌부의 생각을 떠올렸다.
‘내게 시련을 부여한다고?’
웃기는 생각이다. 아이작은 이미 태생부터가 이 세상의 시련으로 태어났다.
시련을 부여하는 자는 신이 아니라 아이작이 될 것이다.
‘우선 이 느슨해진 여명군에 좆같은 시련이란 게 뭔지 보여 줘야겠군.’
***
불사 교단에서 육신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영이 머무는 육신, 언데드, 빈 육신.
영이 머무는 육신은 노예 계급이거나, 배교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 혹은 산 자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새 육신’으로 공급할 수 없다. 새로운 시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데드는 말 그대로 일반시민이다.
불사 교단으로 개종함으로써 불사의 삶을 선택한 자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을 소실하기 전까지 죽지 않으며, 죽더라도 영혼은 불사 교단에 속박되어 이승도 저승도 아닌 땅을 떠돈다.
마지막으로 빈 육신.
이것은 불사 교단의 망자들에게 공급될 수 있는 ‘새 육신’으로 공급될 수 있는 육신이다. 하지만 육신을 잃은 망령은 많고 빈 육신의 공급은 항상 부족하다. 새 육신을 받기 위해 망령들이 줄을 서고 있지만, 받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육신 담당 업무를 처리하는 명천사가 다름 아닌 묘지 군주였다.
대다수 언데드들과 마찬가지로, 명천사인 묘지 군주도 살점이 없다.
대신 그는 수백에 이르는 수많은 전사자들의 백골들로 스스로의 몸을 치장했다.
행정절차에 따라 망령들에게 육신을 보급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지만, 때때로 그는 갑옷처럼 두른 빈 육신에 망령들을 빙의시켜 병사로 쓰기도 하고, 포상 삼아 나눠주기도 했다.
묘지 군주는 죽은 자들에게 새 육신을 나눠주는 일을, 불사에 불사를 연장해 나가는 자신의 책무를 사랑했다.
불사 교단에 백골에 대한 미학을 퍼뜨린 것도 묘지 군주였다.
불사 교단 초기, 아직 신도들이 언데드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스스로의 외모를 숨기려들 때, 묘지 군주는 ‘골격’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했다.
‘뼈는 피부색도, 뚱뚱함도, 마른 몸매도 드러내지 않는다. 모두가 추구해야 할 공평타당한 아름다움이다!’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 미를 추구할 방법도 없긴 했다.
묘지 군주는 가장 먼저 자신의 살점을 전부 벗어던졌고, ‘백골’ 상태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불사 교단 신도라는 계급구조까지 만들어 냈다. 썩어 냄새나는 살점을 어떻게 존중한단 말인가?
어차피 언데드는 냄새를 못 맡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화는 귀족과 셀럽들의 유행을 따라간다. 왕이자 명천사인 묘지 군주가 지엄하게 발표한 백골에 대한 예찬은 단숨에 불사 교단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죽겠군.’
그리고 지금, 묘지 군주는 땅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죽어서 묻힌 것은 아니고, 일종의 휴가였다.
그는 언제나 백골에 대한 아름다움을 예찬해 왔지만, 가끔은 언데드 특유의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살점이 주는 온기나 포옹, 포만감 등의 감각이 가끔은 몸서리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땅에 매장해 자신의 뼈 사이사이에 있는 흙과 벌레, 식물의 잔뿌리 등을 살점처럼 여기며 충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휴가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부할 수 없는 의지였기에 묘지 군주는 땅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누추한 방랑자 행색의 한 언데드였다.
묘지 군주는 곧바로 상대를 알아보고 부복했다.
[폐하. 누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수십 미터에 이르는 묘지 군주가 누추한 언데드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은 기묘한 모습이었으나, 모든 생명의 끝에 선 자에게 당연히 보여야 할 예의이기도 했다.
[몸은 어떻습니까?] [큰 상처는 아닙니다.]몸이 절반으로 쪼개지는 상처를 입긴 했지만 정말로 그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에게 패퇴하였다는 자존심의 상처가 더 컸다.
[데라 헤만이라고 했던가요? 놈의 성체가 가진 능력이 놀랍긴 했습니다. 신성을 빨아들이다니요.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빈틈을 보이면 바로 오월의 검이 달려들 태세더군요.]묘지 군주는 이번 패배에 오월의 검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하늘 위에서 살벌하게 빈틈을 노리고 있으니 묘지 군주도 도무지 데라 헤만에게만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사 황제는 이 결과가 단순히 오월의 검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천사들의 일방적인 학살보다 영웅이 천사에 대적하고 극복하는 서사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싸움의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묘지 군주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빛의 법전은 불사 교단보다 우르반수스를 이용하는 것에 더 능숙했다.
불사 황제는 묘지 군주가 여명군의 전선에서 더 이상 활약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서쪽으로 가십시오. 가서 성배기사를 저지하십시오.] [예? 여명군은 어떻게 합니까?] [여명군과 협약을 맺었습니다.]불사 황제는 이미 알 빌라에르의 보고를 들은 상태였다.
여명군이 정말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역시 등대지기를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등대지기의 목적, 또는 집착만은 믿었다.
[등대지기가 성배기사를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습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그를 죽이고 천천히 설득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열쇠를 가진 것은 아이작이니까요.] [받들겠습니다. 폐하.]많은 의문이 뒤따랐지만, 묘지 군주는 고분고분하게 순응했다.
모든 죽은 자들의 지식을 아는 자는 불사 황제다. 그보다 현명한 자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묘지 군주는 아이작의 존재가 다소 거슬렸다.
[폐하, 어째서 그 성배기사를 그토록 신경 쓰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고작 해봐야 일개 인간, 일개 성기사다. 대단한 업적을 세우기는 했으나 신들이 직접 신경 쓰고 천사가 조율할 만한 존재인가는 의심스러웠다.
불사 황제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식을 나눠 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지식을 시민들과 기꺼이 나누는 지배자였다.
[아이작은 세계를 비집고 들어온 혼돈입니다.] [혼돈……?] [역사적으로 그런 자들이 항상 있었지요. 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영역에 등불을 들이대고,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냅니다.]불사 황제는 어둡고, 어딘가 불안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빛은 틈새에서 들어오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는 늘 빛의 법전에서 시작됩니다. 루앗딘이 나타나 빛의 세기를 열었고, 엘릴이 질서를 만드는 법을 깨달았으며, 흰올빼미가 우르반수스를 뒤틀었듯이…… 아이작은 틈새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존재입니다.]불사 황제는 음울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등대지기가 마련한 석판 위에서 얌전히 움직여 주었지만…… 아이작은 이전에 나타났던 변화들과는 다릅니다.] [다르다는 말씀은…… 폐하께서도 예상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뭔가…… 관점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와 대화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이작은 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마치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불사 황제는 불현듯 몸을 떨었다.
묘지 군주는 온도도 느끼지 않는 불사 황제가 몸을 떤 것이 사실인가 싶어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불사 황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한낱 개인의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어디서 무엇을 데려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성배기사의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평범한 촉수 괴물 따위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무언가입니다.]불사 황제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종말과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상상할 수 없는 미래는 그보다 훨씬 두려웠다.
[더 늦기 전에 그 변화를 우리 곁에 두든가…… 막아야 합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