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9)
399화. 등잔 아래 (3)
묘지 군주는 불사 황제의 진지한 말에 공포를 느꼈다.
본 적도 없는 아이작에게 진심으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는 내심 나이 어린 아이작을 무시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사르카 누아를 묘지 군주로 만들어 낸 불사 황제의 감정에, 전언에, 신탁에, 천사로서 교감했다.
신의 말씀이 내려온 이상 묘지 군주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신탁에 순응하는 것.
[언제나 끝에서 기다리시는 분의 명령에 순응합니다.]묘지 군주는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불사 황제가 다시 한번 무겁게 명령했다.
[서쪽에서 오는 성배기사와 여명군 무리를 제압하십시오. 당신을 보좌할 천사들이 함께할 것입니다.]이사크레아 여명군에는 아이작이 아니어도 명천사가 보호하는 영웅들이 최소한 둘은 더 있다. 묘지 군주는 강력하지만, 그들을 견제할 만한 힘도 함께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은 십이월을 부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는 게헨나 감옥 요새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여명군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만약 등대지기가 약속을 깨뜨리는 상황이 온다면 죽은 십이월이 요새를 해방하고 재앙을 풀어놓을 것이다.
다행히, 불사 교단은 수많은 여명군 속에서도 버텨 냈던 저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 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전력을 추려 가십시오. 월식군에 대한 소집과 지휘권을 맡기겠습니다.] [받들겠습니다.]묘지 군주는 월식군에 대한 소집권까지 넘기겠다는 말에 다소 놀랐다.
빛의 법전은 수도 우샤크를 지키는 전력이 월식군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월식군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
여명군이 13번이나 결성되는 동안 월식군 소집은 지난 300년간 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진정한 ‘월식군 소집’은 성지 루아가 넘어가거나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에만 시행되기 때문이다.
그 소집권을 묘지 군주에게 넘기겠다는 말은, 아이작이 그만큼이나 심대한 위협이란 뜻이었다.
묘지 군주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이 거느릴 수 있는 영웅들을 떠올렸다.
[제가 가진 최강의 전력을 추리겠습니다. 폐하.]***
“……뭔가 싱겁게 흘러가는군요. 이게 전부인가?”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미궁 계곡을 빠져나온 날. 야영 준비를 시작한 군 막사 밖에서 에델레드가 동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투할린이 달려와 그의 엉덩이를 쩍 소리 나게 후려갈겼다.
에델레드가 나동그라질 뻔한 사태에 곁에 있던 리안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저 경악했다. 리안나는 몇 번 심호흡하고서야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준엄한 꾸짖음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해합니다만, 투할린 님! 에델레드 폐하는 엘릴의 왕이십니다! 신께 그 정당성과 통치권을 부여받은 일국의 왕에게 제발 예의를 차려 주십시오!”
하지만 투할린은 그저 에델레드를 쏘아볼 뿐이었다. 에델레드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화내거나 아픈 기색을 내진 않았다.
“폭풍 전 고요 같다는 뜻이었소, 벼락 망치. 이제 이 ‘백색 광야’를 지나가면 바로 성지 루아 아니오? 그런데 적들이 우리를 저지하리라 생각했던 미궁 계곡을 전투 한번 없이 통과하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그랬소.”
“들으셨지요? 에델레드 폐하께서는 전쟁이 쉽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경각심을 갖고자 하신 겁니다!”
리안나의 말에 투할린은 코웃음 쳤다.
“흥, 그래. 난 또 전쟁광답게 명예와 용기를 차지할 기회를 찾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지.”
“다른 기사들은 그런 아쉬움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오. 나는 지휘관이니까. 성지 루아를 점령하는 것 하나로 이미 명예와 용기는 충분할 진데, 자잘한 해골 모가지 몇 개를 뭣하러 탐낸단 말이오?”
투할린은 늙은이답게 엘릴 신도에 대한 깊은 고정관념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의 고정관념은 틀리지 않았기에, 에델레드가 한 말 역시 조금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투할린은 에델레드가 지휘관답지 않게 방심하는 듯한 말을 한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말조심하는 게 좋겠군. 너…… 아니, 폐하께서 하는 말에는 그 특유의 불길한 징조 같은 게 있단 말이다.”
“불길한 징조?”
“그래. ‘오늘은 다행히 날씨가 좋군’이라고 하면 비가 오고, ‘오늘은 적들이 조용하군’이라고 하면 적들이 올 징조지. 그러니까 그런 기분을 느껴도 입 밖에 내면 안 돼.”
투할린의 말에 리안나는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고작 그런 미신 때문에?!”
“미신이라니. 삶의 경험이라고.”
투할린은 툴툴거리며 인상을 썼다.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아. 조짐이 안 좋다. 우리는 지금 여명군 본대보다 적진 깊숙이 들어온 단검이야. 그런데 적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다는 건, 제대로 후려갈길 망치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지.”
“음, 주의하겠소.”
“무슨 일들이십니까?”
그때 병영 안쪽에서 아이작이 걸어 나왔다. 에델레드와 리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투할린이 먼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성배기사. 에델레드 폐하께서 지금 상황에 대해 경솔한 발언을 하긴 했는데, 나도 좀 과하게 반응했지. 왕이란 일국의 얼굴인데 내가 너무 무례했군.”
아이작은 금방 무슨 일인지 알아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들이 안 보이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미 제가 별일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미궁 계곡을 통과하는 내내 긴장하시는 것 같더니 이제 조금은 긴장이 풀리신 것 같군요.”
“……말씀하신 대로요. 성배기사.”
에델레드는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아이작은 분명 미궁 계곡에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와 그의 기사들은 바싹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하며 나아갔다. 매복하기에 너무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이작 말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허나 성배기사의 전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 불사 교단의 군세는 이런 협곡보다 평원에서 더 위협적이니까요.”
불사 교단과의 전투는 전선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죽은 동료가 불쑥불쑥 되살아나거나 땅속에 매복하고 있던 병력이 튀어나오면 순식간에 난전이 되어버린다. 그런 전력을 가장 활용하기 쉬운 무대는 비좁은 협곡보단 역시 평원이다.
이전까지는 창백과 요새의 존재 때문에 불사 교단다운 전략을 펼치지 못했지만, 이제 성지 루아를 앞둔 이상 무시무시한 난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물론 아이작도 그에 따른 대비를 해두긴 했지만, 적들도 머리가 있는 만큼 힘든 전투를 각오해야 했다.
“적들은 쳐들어오는 것보다 방비를 갖추고 우리를 맞이하기로 한 것 같으니 푹 쉬십시오.”
“알겠소.”
아이작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섰다. 잠시 후, 막사를 향해 돌아가는 그의 곁으로 투할린이 따라붙었다. 투할린은 미심쩍은 눈으로 아이작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는 언제 돌아오나?”
***
아이작은 난처한 표정으로 투할린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 심지어 헤사벨조차도 아이작과 분열된 아이작을 구분하지 못했다. 물론 헤사벨에게는 특별히 일러둔 상태였다.
둘을 분간해낸 것은 오직 투할린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분간해내는지 모르겠지만, 투할린. 저도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입니다. 경험도, 지식도, 사고방식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능력 면에서 조금 부족할 수는 있다. 나눠 받은 힘의 양이 다르니까. 하지만 그 외 모든 것은 완전히 같다. 심지어 둘은 언제든 의사를 공유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미심쩍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제가 뭐 가짜나 흉내쟁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저는 전적으로 성배기사와 같은 존재이며, 성배기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흠, 그래. 알겠네. 내가 하도 뭐라고 그래서 자네를 두고 간 모양이군.”
사실 공교로운 타이밍에 아이작이 적절한 능력을 얻어서 해낼 수 있었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까지 투할린에게 알려줄 수는 없으니 아이작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자네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아마 혼자서 또 뼈 빠지게 고생하고 있을 성배기사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사실 외지를 떠도는 아이작에게는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이 따르고 있을 테지만 사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여명군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전력만으로는 성지 루아를 수복하기 힘들다.
결국 플랜 B를 택하는 수밖에 없다.
별로 고르고 싶지 않았던 선택지지만, 원래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미궁 계곡에 남아있던 흔적을 보았네. 꼼꼼하게 숨겼지만 새롭게 생긴 파쇄와 붕괴, 그리고 전투 흔적이 보이더군. 아마도 미궁 계곡에 있던 위협을 성배기사가 제거했겠지. 그래서 자네는 안심해도 좋다고 한 거고.”
아이작은 찔끔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미궁 계곡 위에서 죽음의 천사들이 공습을 가하면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대항할 수단이 많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겠네만, 나로서는 외지에 나가서 고생하는 성배기사 쪽을 더 ‘나의 총지휘관’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군. 하는 꼴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런 꼴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으니.”
“저까지 나가서 싸우면 투할린의 속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끙.”
아이작은 일단 상징적 의미를 위해서라도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깃발 역할이지만, 그렇다고 전투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아이작이 가진 또 하나의 가장 큰 힘, 엘릴마저도 인정한 그의 검술은 그대로였다.
또한 원본 아이작은 떠나기 전에 그에게 추가로 힘을 남겨두고 갔다.
“그나저나 자네 이름을 따로 정해 둬야 하지 않겠나? 아무튼 같은 존재라곤 하지만 본대에 남아있는 자네와 외지에 나가 있는 자네를 구분하긴 해야 할 거 아냐.”
아이작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생각하시는 것보다 위험한 일 같습니다. 투할린. 저는 저와 저를 구분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헷갈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러면 내가 그냥 계속 헷갈려야지, 뭐.”
투할린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아이작은 지금쯤 다른 아이작이 어디로 향해 있을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이작에게서 건네받은 힘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작’을 통해 힘과 경험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작이 향한 곳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동시에, 이는 아이작이 투할린의 걱정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영역으로 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게임상으로는 ‘세계의 끝’에 해당하는 곳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외경에 도착했겠군.’
***
외경.
오랫동안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이자 인생 막장에 이른 바르바리조차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극한의 땅에 갑작스레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극도의 혼돈에 휩싸여 단단한 땅과 돌마저 몸을 비트는 땅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외경에 존재하는 괴물들마저 귀 기울일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다.
“배신자가 왔다!”
머리가 이상하게 뒤틀린, 하지만 외경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까마귀 한 마리가 피눈물을 흘리며 외경에 목소리를 퍼뜨렸다.
“배신자가, 배신자가, 배신자가 왔다! 이 땅에! 북쪽에! 북쪽으로 가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