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01)
401화. 묘지 군주 (1)
아이작은 전열에 늘어선 깃발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았다.
군대 대부분이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실제로 저 깃발을 상징하는 기사단과 부대, 가문이 전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부 다 왔다면 정예란 정예는 전부 이곳에 집결했다는 뜻이므로, 허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등대지기와 불사 황제가 어느 정도까지 선을 두고 협잡했는지는 모른다. 등대지기의 꿍꿍이가 아이작에게 더 시련을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미끼로 던져 놓고 불사 황제의 뒤통수를 치려는 것인지도.
‘신중하군.’
아이작은 묘지 군주가 그답지 않게 신중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묘지 군주, 생전의 이름은 사르카 누아. 통일제국 출신의 마지막 황손.
그는 통일제국 멸망의 원인이 된 백사병과 불사 교단을 증오하는 황가 사람들 손에서 자랐다.
사르카 누아가 3차 여명군의 총지휘관이자 마지막 수복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패기 넘치는 도박 수를 과감하게 두면서 가차 없이 불사 교단의 군세를 잘라냈다.
그렇게 사르카 누아는 성지 루아를 점령하고 가문 어른의 찬사와 기쁨 속에서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잡으리라고 기대받았다.
‘그가 성지 루아에서 불사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잔인하고 비극적인 과정을 거쳐, 결국 사르카 누아는 언데드가 되는 방식으로 불사의 육신을 얻었다. 그리고 불사 황제는 그에게 묘지 군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결국 사르카 누아를 마지막으로 통일제국 황가의 핏줄은 끊어졌다.
그 뒤 그가 가진 증오와 분노의 방향은 빛의 법전으로 돌아섰다. 실제로 빛의 법전은 3차 여명군 이래로 성지 루아를 단 한 번도 빼앗지 못했다.
묘지 군주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빛의 법전 신도들을 죽인 명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과감한 수를 둘 줄 알았는데, 이런 신중한 방식이라니. 뭘 경계하는 거지?’
아이작은 묘지 군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명천사가 시작부터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 전장의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자는 묘지 군주일 수밖에 없었다. 묘지 군주는 느리게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둘러보는 듯하다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묘지 군주는 그를 눈여겨보는 대신, 스쳐 지나가듯 흘려보냈다.
‘뭐?’
그때 묘지 군주가 느리게 칼을 들어 올려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겨냥했다.
[성배기사와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어디에 있지?]정상적인 전장이라면 최고지휘관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리석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상대는 명천사다. 이교도이자 적이기 전에 앞서 인류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자이며,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존경과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 부름 앞에서 병사들 뒤에 숨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아이작의 이름이 불린 순간부터 수많은 시선이 아이작을 향해 있었다.
아이작이 앞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묘지 군주의 시선 또한 그쪽으로 향했다.
[너라고?]“나다, 묘지 군주.”
아이작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힘을 갈랐다 해도 격까지 낮아진 것은 아니다. 명천사 앞에서 이토록 교만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아이작의 남다른 격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묘지 군주는 묘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군.]“뭐가 말이지?”
[네게선 영웅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불패의 성배기사, 소금 사막을 깨뜨리고 창백을 소멸시킨 그 영웅을 만나고 싶다. 위장이라면 재미없으니 앞으로 나와라.]아이작은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경계했다. 힘이 약해진 것을 눈치챈 것인가? 하지만 분신이라 한들 그는 아이작이었으며, 설령 아니라고 해도 외경까지 간 본체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투할린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보았지만, 그는 태연할 뿐이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어. 나는 나니까 시건방지게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마라.”
아이작은 되려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대꾸했다.
“나도 3차 여명군의 대선배 얼굴을 좀 구경해 볼까 했는데 실없는 소리나 하는 걸 보니 수준을 알만하군. 단순히 과거의 불사 교단이 격이 떨어졌던 것뿐 아닌가? 네 교만 때문에 제삿밥도 못 얻어먹게 된 네 부하들이 울고 있다, 사르카 누아.”
이 세계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은 오크들밖에 없으며, 오크들이 그 의례를 ‘제사’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강 의미는 전달된 모양이었다.
묘지 군주의 갑옷에 매달린 두개골 수십 개가 일제히 달각거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자기 부하들을 갑옷에 매달고 다니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다.
그제야 묘지 군주는 웃음소리를 냈다.
[패기 하나는 그 성배기사가 맞군.]그는 느리게 칼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럼 패기만큼 실력도 좋은가 볼까. 1군, 진격하라.]안개 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수백도 넘는 데스나이트가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
“창 들어! 창 들어!”
콰두두두두, 콰쾅!
전장 이곳저곳에서 굉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데스나이트 ‘군대’가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보병진을 난타하는 소리였다. 묘지 군주를 보자마자 즉시 단단한 방어진을 형성한 덕분에 방어는 어렵지 않았지만, 한번 돌격할 때마다 전열이 들썩이는 충격이 전해져왔다.
데스나이트는 그 한 명 한 명이 성기사 출신이다. 그리고 성기사는 ‘최소한’ 상급 검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며, 기적까지 발휘할 수 있다.
성기사단 하나에 속한 성기사가 많아 봐야 수십인데, 저들은 최소 천명 이상의 데스나이트를 부리고 있었다.
“버텨라, 이놈들아! 뚫리면 끝장이다!”
투할린이 포효하며 소리쳤다.
성기사들이 기적과 성가로 맹활약했지만, 데스나이트 군세의 공격은 만만찮았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여명군 쪽에서도 날카로운 칼이 준비되어 있었다.
“엘릴, 엘릴, 엘릴!”
우회한 엘릴의 기사들이 공격하던 데스나이트 군세를 횡으로 쪼갰다. 고립당하기 딱 좋은 짓이지만, 아군의 방어진을 따라 가위질이라도 하는 듯한 섬세한 돌격은, 오직 엘릴의 기병대만이 가능한 묘기였다.
그리고 엘릴 기사들이 데스나이트 군세를 쪼개자마자, 견디고 견디던 보병진의 분노가 폭발했다.
게벨이 쇠 긁는 듯한 노성을 토해냈다.
“긁어내!”
착, 착! 데스나이트의 칼날을 받아내던 방패병이 뒤로 빠진 순간, 긴 낫을 든 병사가 데스나이트의 목에 날을 걸더니, 단숨에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릴 기사들의 돌격으로 쪼개진 데스나이트 부대는 고립된 자들을 돕지 못했다.
쓰러진 데스나이트 위로 무수한 창칼이 쏟아진 뒤, 남은 잔해는 사제들이 불로 태우거나, 화로 장인들이 갑옷째로 녹여 버렸다.
데스나이트 군세가 빈틈을 다시 메웠을 때는 보병진의 방어도 복구된 뒤였다.
게벨의 까탈스러운 훈련을 견딘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병사들은 대단한 검술 실력을 보이진 못하더라도 단단한 단결력과 일사불란한 군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데스나이트 군세 앞에서도 여전한 사기야말로 그들의 진가였다.
하지만 피해가 전무할 수는 없었다.
데스나이트 군세 중에는 그들을 보조하고 지원 공격을 가하는 리치들도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불사 교단의 특기, ‘죽은 동료를 일으켜 세워 적의 사기 꺾기’를 시도했다.
이에 라이칸스로프 전사대의 전사장 라울록이 고개를 치켜들고 코를 킁킁거렸다.
‘기적의 냄새’를 맡은 라울록이 한쪽 방향을 보고 울부짖자, 투할린은 망치를 들어 바로 땅을 내리쳤다.
땅을 타고 퍼진 벼락이 시커먼 그을음을 만들어내더니, 어느 순간 정확히 리치가 있던 자리에서 폭발했다.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는 리치의 잔해를 보며 병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연습하신 보람이 있군요, 투할린!”
“이깟 게 뭐라고 연습까지 필요한가? 허, 참.”
투할린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힘 조절을 위해 상당히 연습했다는 사실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불사 교단의 전술 중 가장 위협적인 것 중 하나는 땅 밑에서 매복해 있다가 튀어나오는 언데드였다.
투할린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땅 밑에 벼락을 흘려보내면서 아군을 감전시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덕분에 묘지 군주가 진작에 파묻어 놓았던 ‘언데드 지뢰’들은 기어 나오는 것을 해치울 필요도 없이 일찌감치 땅속에서 재가 되었다.
하늘에선 넬과 본 드래곤이 사투를 펼치고 있었다.
어린 개체인 넬에 비해 본 드래곤은 신화시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다만 우르반수스에서 드래곤을 사냥해 본 경험이 있는 헤사벨 덕분에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안개 너머 구름 속에서 벼락과 눈보라가 본 적 없는 재앙적 폭풍을 만들어 내는 사이, 아이작 또한 맹활약하고 있었다.
본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데스나이트 하나둘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작은 데스나이트가 아군에 균열을 가하려 하면 벼락처럼 나타나 메우는 유격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단순히 아이작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치솟으니,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방어진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작과 묘지 군주는 서로를 예의주시했다.
***
‘열심히 뛰어다니는구나, 성배기사.’
묘지 군주는 아직까지 상대가 정말 창백을 소멸시킨 그 성배기사가 맞는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놈이었다.
하지만 창백 또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자신이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되풀이할 이유는 없었다.
뭣보다 불사 황제가 직접 경고한 존재다. 만약 아이작이 정체, 혹은 힘을 숨기고 있다면 섣불리 걸어 들어가선 안 된다.
‘그렇다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힘을 빼면 되지. 부하들이 다 죽어 나가도 계속 버티고 있을 수 있는지 볼까?’
월식군의 군세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출전한 병력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늘어선 깃발 중 출전한 깃발들은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선전하고 있지만 묘지 군주에게는 ‘고작 이 정도?’라는 인상뿐이었다.
이 정도라면 나머지 월식군이 나설 필요도 없다.
언데드는 보급도 필요 없고 지치지도 않는다. 전투 지속력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다.
굳이 자신이 나서서 다른 명천사들이 나설 명분을 만들어 주지 않더라도,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은 항상 불사 교단의 편이다. 성배기사,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본인은 직접 안 움직이는군. 이 정도는 수준 파악이다, 이건가?’
아이작 또한 묘지 군주를 머릿속에서 떼지 않고 관찰했다. 그저 묵묵히 안개 속에 앉아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만, 그 존재감은 만만찮았다.
“성배기사, 대응책은 준비되어 있나?”
어느새 다가온 투할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경험이 많은 투할린은 불사 교단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작에겐 계획이 있었다.
“물론입니다.”
“좋아, 뭐지? 박격포인가? 지금 당장 저 해골바가지 머리 위에 포탄을 터뜨릴까? 저놈 대가리가 깨지는 걸 보면 아주 행복할 것 같아.”
물론 아이작도 보고 싶은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화약은 쉽게 수급할 수 없는 물건이다. 성지 루아 공략이나 만약을 위해 가급적 아껴야 했다.
뭣보다 아이작은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포탄도 써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버텨야 합니다.”
“뭐라고?”
“버티면 저들은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니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불사 교단은 지금까지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어 왔을 것이다.
보급도, 체력도, 심지어 병력 보충이나 수명까지도 온전히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하지만 이번 전투를 통해, 불사 교단은 처음으로 시간에 쫓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