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02)
402화. 묘지 군주 (2)
“버티라고? 그게 전부인가? 어디서 지원군이라도 떨어진단 말인가?”
투할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작에게 따져 물었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 그것도 아군은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있는 스반바르 군도부터 이곳은 세상의 극과 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먼 거리다.
“지금은 설명할 방법이 없군요. 적들은 시간이 지나면 물러나려 할 겁니다. 우리는 그때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면 됩니다.”
“제대로 설명을…….”
“투할린.”
아이작은 약간 피곤함을 느끼며 말했다.
“근거도 없는 제 말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만약 제가 홀로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투할린은 아이작을 응시했다.
온몸이 피와 땀, 흙으로 범벅이 된 성배기사를.
그동안 투할린은 눈앞의 ‘가짜’를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이작의 태도와 당당함, 마음가짐 중 어느 하나 자신이 아는 성배기사보다 못한 점이 없었다.
또한 지금 이 자리에 ‘진짜’ 성배기사가 없다는 뜻은, 이미 홀로 이 난관을 타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투할린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겠네. 우리 총지휘관을 의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군.”
“아닙니다. 비밀이 많은 지휘관은 신뢰를 사기 어려운 법이죠.”
아이작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지휘관에게까지 숨겨야 하는 비밀이라니.
결국 신뢰는 행동과 결과로 얻는 수밖에 없다.
그 사이, 전투가 다시 격렬해지고 있었다.
월식군이 두 번째 군세를 출진시킨 것이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들고 불꽃을 피워올렸다.
“앞으로 사흘입니다, 투할린. 우리 군이 사흘을 버틸 수 있느냐에 따라 여명군의 승패가 결정될 겁니다.”
***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겹게 이어졌다.
언데드 군대는 먹지도 자지도 않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최전열에서 병사들이 싸우는 동안 일부는 짧게라도 식사와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덕분에 묘지 군주는 수천의 병력만으로도 수만에 가까운 효율로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효율적인 전투방식이었다.
어떻게든 버티고자 하는 아이작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솔직히 안도할 수만은 없었다. 병력의 소모가 심상치 않았다. 기적을 통해 신체를 강제로 회복시키지 않았다면 병사들은 심장이 터지거나 신경 쇠약으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고생이 많소. 성배기사.”
에델레드가 눈 밑이 퀭한 얼굴로 말했다.
엘릴 기사들은 거의 쉬지 않고 적들을 상대했다. 엘릴 신도들은 전장에서 더 활기를 찾는 전쟁광들이지만, 그들의 말까지 그렇지는 않다. 말 상당수가 지쳐 쓰러지거나 죽어 버리자, 엘릴 기병대의 위력도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 와중에 소드마스터들, 에델레드와 리안나, 시드리크는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싸웠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지휘관급 인사들 대부분은 그러했다.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성배기사는 상태가 좀 나아 보이는군. 시드리크 경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인데도 안 자려고 하길래 리안나 경이 그냥 기절시켰소.”
“잘하셨습니다.”
아이작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포식을 통해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적들 앞에서 대놓고 먹어 치울 수는 없으니 식사를 빙자해 죽은 말 따위로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는 정도였다.
다행히 전장의 상황은 첫날에 비해 많이 변한 상태였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진형은 이전에 비해 위치도 약간 고지대로 옮기고, 더 작고 단단하게 응축된 형태였다.
곳곳에 크게 불을 피워 냉기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팬텀스티드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비행하여 날아오는 팬텀스티드가 있다면 불을 더 크게 피웠다. 팬텀스티드는 열기에 과하게 노출되면 힘을 잃고 추락하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방어 수단이었다.
그 사이 투할린과 화로 사제들이 진형을 새롭게 설계하고 해자 비슷한 것을 뚝딱 만들어 냈다.
그토록 아끼려고 했지만 포탄도 몇 차례 쓸 수밖에 없었다. 박격포로 쓰는 대신 땅속에 매설해 두었다가 원하는 때에 지뢰처럼 터뜨리는 방식이었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아이작의 지시에 투할린이 어떻게든 해보고자 아등바등한 흔적이었다.
투할린은 장인으로서 이런 급조 방어물의 존재를 개탄했지만, 병사들은 확실히 전보다 방어하기 편해진 것을 느꼈다.
에델레드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흘’이라는 시한을 정해놓으신 것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기적으로 회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성가를 부르다가 피를 토한 사제도 여럿입니다.”
“예, 들었습니다.”
아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에델레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민해 봤습니다만, 선생님. 이대로 버티기만 하는 것보다는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묘지 군주를 요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명천사들께 도움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은근슬쩍 나온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거절했다. 애초에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았다.
“말씀드렸지만, 에델레드 폐하. 묘지 군주가 가진 전력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명천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저들도 명천사가 나설 것이고, 그와 비견되는 전력들도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하지만 이미 저들은 묘지 군주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사자 기사의 힘을, 투할린도 천둥 장인의 힘을 빌리고 있지요.”
에델레드는 찔끔한 표정을 했다.
아이작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묘지 군주는 창백을 쓰러뜨린 우리 군을 경계하고 있기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명천사를 부르기 시작하면 냉큼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낼 겁니다. 그러면 폐하와 소드마스터들, 그리고 지휘관들은 어떻게 버틴다 하더라도…… 병사들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겠지요.”
아이작은 에델레드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들만으로는 성지 루아를 수복할 수 없습니다. 가장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에델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 묘지 군주가 먼저 전력을 다해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병사들의 피해가 커지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은 지친 얼굴로 씨익 웃었다.
“만약 묘지 군주가 참을성을 잃는다면…… 그때야말로 녀석을 제거할 기회가 될 겁니다.”
***
다각, 다각, 다각.
이틀째 아침, 모처럼 전장은 고요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쉬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언데드 군대가 공격을 멈췄다는 것은 전혀 길조가 아닌 까닭이다.
이윽고, 아침 안개를 헤집고 수많은 푸른 안광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숨을 죽였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깃발을 든 기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많은 깃발들이, 낡고 헤지지 않은 새롭고 핏빛이 선명한 깃발들도 나타났다. 아이작은 대열의 중심에 선, 아직도 새것 같은 갑옷을 입은 데스나이트들을 발견했다.
병사들은 깃발의 문양들을 하나하나 알아볼 정도의 지식이 없었지만, 성기사들은 달랐다. 로튼해머는 선두에 선 데스나이트들의 깃발을 보고 탄식했다.
“밀리샤르 성기사단…….”
칼센 밀터의 성기사단.
칼센과 더불어 전설에 전설을 쌓았던 그 성기사들이 데스나이트가 되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성기사들 중에서는 그들의 갑옷이나 인상적인 무기 등을 통해 붙은 별명이나 전설을 추측하는 자도 있었다.
‘뼈갑옷’ 로셰, ‘피투성이’ 안톤, ‘입 꿰맨 남자’ 트라엘…… 칼센의 위용에 가려졌을 뿐, 빛의 법전 내 최강의 성기사단이었던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전설들이다.
아이작은 그들을 보면서 마음속 어딘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매만졌다.
‘칼센? 남아 있는 건가?’
칼센의 감정이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포식당한 그의 일부가 반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그에게 짙게 영향을 받았으므로.
하지만 그들의 등장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드디어 묘지 군주가 전력을 다할 생각이군요. 주의하십시오.”
그 말대로, 묘지 군주는 상황 판단을 끝마치고 마지막 전투를 준비중이었다.
안개 속에서 묘지 군주가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뼈들이 달각거리며 망토처럼 끌려 나왔다. 그는 수많은 살점과 뼈, 피가 뒤엉킨 검을 어깨에 걸치고 나지막이 말했다.
[잘 봤다. 너희들의 수준…… 지루해 죽겠군.]묘지 군주는 칼을 한번 허공에 붕 휘두르고는 땅에 내리쳤다.
[전력을 끌어내려면 내가 직접 나서라 이거겠지. 좋다. 가겠다.]후욱. 묘지 군주는 안개 뒤편에 숨기고 있던 불사 황제가 보낸 기천사들─수확자들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신들은 대낫을 길게 드리운 채 텅 빈 눈으로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응시했다.
한때 아이작을 위기로 몰아넣기까지 했던 악명높은 천사의 등장에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숨을 죽였다.
[나는 성배기사를 상대하겠다. 너희는 방해할 만한 놈들을 처리해라.]‘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저주가 아닌, 불사 황제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 낸 천사들이었으므로 ‘세금’을 지불해 역소환시킬 수도 없다.
투할린과 에델레드도 즉시 수확자들의 위협을 알아차렸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대항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쿠르르릉. 투할린의 전신에서 벼락이 튀어 오르면서 폭풍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 장인의 힘이 뜨겁게 용솟음쳤다. 동시에 에델레드의 몸에도 전신을 감싸는 녹색 갑옷이 돋아났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공포에 잠식되어 가던 병사들의 마음을 전의로 채웠다.
아이작의 몸에서도 온화한 열기와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즉시 오월의 검이 그에게 힘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임하는 대신, 아이작을 중심으로 주변에 축복의 열기만을 전하고 있었다.
그 열기를 느낀 병사들은 이틀간의 전투로 한계에 치달았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체력을 되찾는 것을 느꼈다. 여명군 본대에도 드리워졌던 축복이 이제 이곳에 내려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축복이 고맙긴 했지만, 더더욱 등대지기의 의도를 알기 힘들었다.
오월의 검이 단독으로 등대지기의 명령에 맞선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등대지기는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이 상황을 극복하길 바라는 건가, 아니면 이 또한 그의 대계 중 하나일까?
‘뭐가 됐든 지금 당장은 방해만 안 하면 된다.’
아이작은 적인지 아군인지 애매한 존재에 기대는 일은 그만두고 오직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월식군과의 전면전은 그가 우려했던 순간이지만, 동시에 기다려 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명천사들의 축복이 있는 지금, 최대한 월식군에게 타격을 주어야 한다.
묘지 군주는 새롭게 나타난 명천사들의 기운에도 놀라거나 기죽지 않았다. 직접 현신한 것도 아니고, 축복을 더해 주는 정도다. 데라 헤만 같은 변수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월식군은 이사크레아 여명군보다 숫자도, 질도, 기적의 힘도 우세했다.
그들이야말로 불사 교단의 정예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묘지 군주는 불사 황제의 지엄한 명령을 대신해 선포했다.
[가라. 징집해라.]쿵. 월식군의 데스나이트 군대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지축을 뒤흔드는 발소리가 울려 퍼지자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투할린은 아이작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이번에도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
같은 시각, 분열된 아이작으로부터 본진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작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도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이쪽의 아이작 역시 지난 이틀간 끊임없이 먹어 치우고 소비하며 뛰어다녔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때를 맞출 수 있었다.
‘사실 좀 더 채우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아이작은 정면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공격. 먹어 치워라.”
그와 동시에, 아이작이 외경에서 양산해 낸 무수한 괴물들이 허기와 굶주림에 포효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수많은 신앙의 신성한 도시, 성지 루아가 그들 눈앞에 있었다.
성지 루아가 수백 년 만에 맞이하는 대규모 공세였다.
과연 소식을 전해 들을 묘지 군주가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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