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05)
405화. 묘지 군주 (5)
묘지 군주는 태생부터 왕이자 전사였다.
몰락한 황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르카 누아는 태어날 때부터 통일제국 시절의 영광과 그 제국을 이끌던 선조들에 대해 귀에 박이도록 들어왔다.
때문에 자신 역시도 당연히 자신 또한 빛의 법전의 영광을 세우는 전쟁을 이끌어, 거기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 자신해 왔다.
그의 시선은 오직 영광만을 향해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위대한 황가에는 사실 끔찍한 유전병이 있어서, 서서히 근육이 굽다가 형편없이 온몸이 쪼그라들어 죽는다는 사실은 별로 영광스럽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아들이 열 살도 되기 전에 유전병의 조짐을 보였다는 사실도.
묘지 군주는 형편없고 조그만 것들이 싫다.
그는 오로지 영광과 대업만을 숭배하고 싶을 뿐이다.
***
[어딜 감히!]이제야 겨우 성배기사라는, 이 시대의 걸출한 영웅과 싸워 보려 했던 묘지 군주는 자신을 몸을 꿰뚫은 작살에 분노했다. 이까짓 작살 따위 백 번을 꿰뚫려도 아무런 의미 없다.
묘지 군주는 분노로 일갈하며 쇠사슬을 쾅 내리쳤다.
그러나 단숨에 부서질 것이라 생각했던 쇠사슬은 크게 출렁일 뿐, 끊어지지 않았다.
묘지 군주는 당황하며 쇠사슬을 역으로 잡아당겨 보았지만, 그의 등까지 뚫고 나간 작살은 단단히 고정되어 빠지지 않았다. 억지를 써서 뽑아내면 몸의 절반쯤은 으스러뜨려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무슨……!]기껏 해봐야 비린내 풍기는 고래잡이용 작살 아닌가. 인간이 이런 강도의 사슬을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문득, 묘지 군주는 쇠사슬에서 신성의 향기를 맡았다.
그 끔찍한 냄새의 정체에 묘지 군주는 전율했다.
“이건 명천사 익사자 왕의 몸을 꿰뚫었던 작살이다, 해골바가지야!”
에이단이 미친 듯이 몸을 떨면서 외쳤다.
“수십 톤짜리 배를 끌고 다니면서도 이 하나 나간 적 없지! 네깟 게 자를 수 있을 것 같으냐!”
자를 수 있다. 정상적인 쇠사슬이라면.
하지만 이건 명천사 익사자 왕을 ‘죽인’, 말 그대로 대천사용 성물이다.
기적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건의 재현이고, 성물에는 바로 그 서사의 편린이 담긴다. 에이단이 가져온 이 고래잡이용 작살은 천사를 상대로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쾅! 묘지 군주가 주춤하는 사이, 또 하나의 작살포가 몸을 꿰뚫었다. 이번에는 왼쪽 옆구리.
묘지 군주는 한시라도 급히 퇴각해야 할 때 이런 버러지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선원이란 광대, 농부, 상인 따위의 잡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아이작이나 명천사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면 이해하지만, 심지어 뭍으로 기어 올라온 선원 따위가?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 주지!]묘지 군주는 크게 일갈하면서 쇠사슬을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고래잡이용 작살은 쇠사슬 달린 발리스타에 가깝고, 선체에 고정하여 쓰는 장비답게 엄청난 무게를 자랑한다. 에이단도 수레에 싣고 겨우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묘지 군주는 거칠게 몸을 뒤트는 것만으로도 수레째로 작살 장비들을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에이단이 경악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묘지 군주는 몸을 꿰뚫은 작살들을 철퇴처럼 마구 휘둘렀다.
쾅, 쿠쿠쿠쿵……! 장렬한 파괴가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엄청난 무게와 힘이 실린 쇠사슬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데스나이트들의 몸통이 으스러져 나가며 사라졌다. 묘지 군주는 언데드 군세 한복판에 있었기에 정작 피해는 월식군이 더 많이 입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기세만으로도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주춤하며 진격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묘지 군주는 바닥에 주저앉은 에이단을 향해 작살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갔다.
[이리 와라, 이 소금 냄새 나는 벌레야. 네놈이 감히 왕의 발걸음을…….]그 순간, 에이단에게서 갑작스레 강렬한 바람이 밀어닥쳐 왔다. 진득한 소금 냄새 풍기는 바닷바람이었다.
[내 일등항해사를 벌레라고 부르는 건 삼가주었으면 하오. 묘지 군주.] [뭐…….]묘지 군주는 주저앉아 있던 에이단의 머리 위로 새하얀 바다뱀의 형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에이단의 머리카락은 소금처럼 하얗게 탈색되고, 두 눈은 짙푸른 파란색으로 빛났다.
[빛의 법전이 유목민들의 미신에 불과할 때, 나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약탈하는 바다의 지배자였소. 인간들은 쉽게 잊는다지만, 천사인 그대마저 그러면 안 되지.]고대 시대에 바다의 공포로 불리던 약탈자, 명천사 아문달라스.
그녀가 에이단의 몸에 임하고 있었다.
‘대체 이 동맹군에는 명천사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있는 거지?’
묘지 군주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이 많은 신앙들이 한군데 뭉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엘릴과 빛의 법전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고, 세상의 용광로는 서로를 경멸하기 바쁜 관계였다. 성지 루아를 향한 대의조차도 그들을 묶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을 뭉치게 만들고, 소금 의회의 천사까지 끌어들였다고?
‘아이작, 너는 대체…….’
***
아이작은 묘지 군주를 이번 기회에 제거하든가 최소한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지금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월식군이 무질서한 패주를 하는 동안 치명타를 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묘지 군주를 해치우지 못하면 말짱 헛것이다.
묘지 군주는 여명군에서 생긴 시체들을 미친 듯이 징집할 것이고, 월식군 전력 따위는 빠르게 복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비켜라!”
까가가가각! 묘지 군주의 긴급한 지시에 의해 아이작의 발목을 잡은 데스나이트들은 다름 아닌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데스나이트들이었다.
칼센 밀터와 함께 단련하고 함께 전설을 쌓아온 베테랑 중 베테랑들.
아이작은 마음이 급했지만 이들이 보통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게임이 진행되었을 경우, 이들은 불사 교단의 최종 보스 격인 칼센 밀터를 호위하는 친위대로 등장한다.
게임에서는 황제 자리에 올라선 칼센의 버프 때문인지 하나하나가 기사단장 급의 괴물이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지간한 성기사들을 상회하는 실력자들이었지만.
끼리리릭, 까득, 쾅! 밀리샤르 성기사단은 아이작의 초인적인 힘이 실린 검을 능숙하게 협동하여 받아냈다.
데스나이트 하나를 베어내려고 하면 옆구리를 공격해 왔고, 돌파하려고 하자마자 밀물처럼 두터운 벽을 형성하는 것을 보고 아이작은 솔직히 감탄했다.
하루 이틀 연습해서 짠 합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년,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가족처럼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싸운 끝에 완성한, 진정한 성기사단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에게는 등을 맡기고 어깨를 나란히 할 동료가 부족했다.
‘어쩔 수 없군.’
아이작은 내면의 사냥꾼을 불러냈다.
고고한 설산 위에서 홀로 목표를 노리는 흰 사냥꾼이 아이작의 숨결과 함께 흘러나왔다.
밀리샤르 성기사단원들은 갑자기 변한 아이작의 기세에 움찔했다. 묘지 군주에게 많은 자아를 억압당하고 있었기에 눈에 띄는 동요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이 칼을 들어 올린 순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설득이나 호소 따위는 소용없겠지.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보다 더 강력한 설득 수단이 있었다.
쉭, 카득, 카드득! 아이작과 밀리샤르 성기사단이 나누던 검투가 갑작스레 하나의 군무(群舞)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대련해온 것처럼, 수백 수천 번 합을 맞춰온 것처럼 하나의 공격이 하나의 방어와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종이 한 장 차이로 칼끝을 벗어나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냈다.
밀리샤르 성기사단은 아이작이 유도하는 대로 홀린 듯이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달걀이 깨지는 것 같은 정신적 파장이 일었다.
[단장?]아이작은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언데드에게도 네필림의 매력이 설득력을 발휘하길 바라며.
아이작의 얼굴 공격이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검무가 한순간 흐트러졌다.
정밀한 합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아이작은 살짝 뺨을 베이면서 물러났다.
하지만 밀리샤르 성기사단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실수’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수많은 단어를 써서 호소하는 대신, 단 한 번, 밀리샤르 성기사단 검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이작은 선명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밀리샤르 성기사단원들은 묘지 군주의 정신 억압과 아이작이 보여 준 칼센 밀터의 검술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묘지 군주의 정신 억압은 강력하다.
하지만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결속은 그 이상으로 강력했다.
아이작은 밀리샤르 성기사단이 자신의 편이 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칼센 밀터의 검술은 저들을 잠시 현혹했을 뿐이다.
“나는 사냥하러 간다.”
아이작은 칼센 밀터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방해하지 말도록.”
탁. 아이작은 밀리샤르 성기사단 사이를 비집고 묘지 군주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까지도 밀리샤르 성기사단은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만약 묘지 군주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그들에게 더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거나 다른 데스나이트들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묘지 군주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다.
***
묘지 군주는 아문달라스의 등장과 그녀의 권능에 당황했지만, 그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명천사 아문달라스가 천상의 고립을 깨고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이곳은 육지 깊숙한 곳이다. 소금 의회의 천사가 발휘할 수 있는 기적에는 한계가 있었다.
[네가 여기서 뭘 어쩔 건가, 아문달라스.]묘지 군주는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생선처럼 펄떡이는 재주라도 보일 건가? 이 땅에 배를 들고 와서 처박을 건가?] [오, 시건방진 태도 좋소. 그렇게 오만하게 굴수록 코를 바닥에 박을 때 더 멋진 표정을 짓는 법이거든. 아, 그쪽은 코가 없군?]묘지 군주는 가당찮은 외모 지적에 분노하는 대신 쇠사슬을 휘둘렀다.
그때, 묘지 군주의 발 한쪽이 쑥 빠지면서 작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엇나간 쇠사슬은 어이없게도 묘지 군주의 오른쪽 팔과 목을 함께 감아 묶어 버렸다.
묘지 군주가 노성을 토해 내며 발아래를 보았고, 웬 진흙탕이 그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묘지 군주는 자세를 바로잡으려다가 진창이 온 사방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백 년간 메말라 있던 땅이 스펀지마냥 물을 흡수하며 퇴각하는 월식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디서 이 많은 물이 왔는지 생각하던 묘지 군주는 문득 시야가 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알지 못했지만, 안개가 걷힌 지 오래였다.
아니, 정확히는 안개가 땅속에 빨려 들어갔다.
[알아차렸소? 그대가 귀한 물을 끌어 모아준 덕분에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 기적을 발휘할 수 있었소이다.] [웃기지 마라!]묘지 군주는 노호하며 몸에서 맹렬한 냉기를 뿜어냈다. 창백이 아니어도 냉기는 불사 교단의 권능에 속한 기적이다. 묘지 군주는 냉기로 진흙탕을 얼려 버렸지만, 이번 전투에선 그다지 현명한 조치가 아니었다.
진창에 빠진 상태에서도 느리게나마 퇴각하던 데스나이트들이, 얼어붙은 진흙 속에 갇혀 고립되어 버렸다. 아니, 묘지 군주가 하지 않았어도 데스나이트들이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냉기로 금방 벌어질 일이었다.
묘지 군주는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월식군의 퇴각이 가능한지조차 의문이 드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계속 공격했다면…….’
다시 또, 신의 판단에 의심을 품는 쐐기가 박혔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이라도 이사크레아 여명군에 타격을 가해야 했다. 묘지 군주가 에이단을 향해 쇠사슬을 던지려던 순간, 그는 무릎 아래 깊숙한 곳에서 둔탁한 이질감을 느꼈다.
아이작이 시커먼 검기를 피워올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투 내내 나만 쳐다보더니, 이제 와서 한눈파는 거야? 그럼 죽어야지.”
아이작이 루앗딘 열쇠를 비틀어 휘두른 순간, 묘지 군주의 왼쪽 무릎 아래가 통째로 잘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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