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09)
409화. 죽은 자들을 위한 나라 (2)
[눈을 떠라!]빛의 법전 추기경, 로헨 오터는 눈을 떴다.
아니, 강제로 뜨였다는 쪽이 가까웠다. 그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극도로 환하게 밝아진 것이다. 얼마나 밝은 빛이 드리웠는지 한동안 눈이 멀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로헨 오터가 통증으로 바닥을 기면서 신음하자 다시 한번 호통이 들려왔다.
[눈을 떠라, 눈먼 자들아!]이번에는 안구가 강제로 회복되었다. 로헨은 휘청거리며 일어서고서야 이런 꼴을 당한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명군 본대 곳곳에서 휘청거리며 주저앉은 채 눈을 매만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병사들은 소란을 듣고서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사제들은 백이면 백, 전부 다 신열을 느끼고 흐느끼거나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을린 자들과 유리 안구를 가진 자들은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 눈에서 밝은 섬광을 토해 내고 있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지?’
성배기사를 제거하기 위해 불사 교단과의 은밀한 계약을 맺은 뒤, 여명군 본대는 카틀라 능성 뒤쪽까지 물러선 상태였다. 수많은 피와 시체로 겨우 차지했던 카틀라 능선을 순순히 양보하는데 많은 지휘관들이 경악하고 당황했지만, 신의 뜻이라는 일갈로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그 뒤 여명군은 계획에도 없던 재정비와 휴식을 가지며 힘을 비축했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박살 나고 나면, 비축해 둔 힘으로 ‘진정한’ 신의 군대인 그들이 나서서 불사 교단을 단매에 쳐부순다는 것이 로헨 오터의 계획이었다.
[성지를 되찾아와라, 여명군의 전사들이여!]로헨은 그제야 연신 울려 퍼지는 이 목소리가 불타는 처녀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늘이 대낮처럼 환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해가 뜬 것이 아니다.
하늘에 명천사‘들’이 임해 있었다.
전신이 불타오르고 있는 여자가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수목처럼 펼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낡은 검들이 회전하는 거대한 눈동자가 불꽃 날개로 스스로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로헨 오터는 그 마지막 명천사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리고 무릎 꿇고 말았다.
열여섯 장의 날개와 여섯 개의 등대, 모든 것이 균일하고 균형 있게 맞춰진 아름다운 형상.
찰나의 순간 보았던 그것은 리히트하임에서 보았던 영광된 모습, 등대지기였다. 찬란한 광휘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을 몰아내고 세상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리히트하임을 수호하는 ‘맹인 파수꾼’을 제외하면 사실상 알려진 모든 빛의 법전 천사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이 경악스러운 풍경에 사제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한심스러운 모습에 불타는 처녀가 분노에 한 노성을 토해냈다.
[일어나서 성지로 진격하라고, 이 머저리들아!]로헨은 등짝에 뜨거운 통증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실제로 불붙은 채찍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등이 뜨거웠다. 로헨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제의 등이 채찍 자국으로 검게 그을린 것을 보고 자신도 똑같은 꼴일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지, 진격! 계시가 내려왔다! 성지 루아로 진격하라!”
한밤중에 내려온 난데없는 계시에 겁에 질린 사제가 비명처럼 외쳤다. 명령권도 없는 일개 사제의 외침이었지만, 사제들이 당하는 꼴을 본 여명군 병사들도 반복적으로 외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여명군, 여명군 재개다! 천사들께서 지켜보신다!”
“신탁이 내려왔다! 성지 루아로 진격하라!”
여기저기서 발작적으로 병사들과 사제들이 아무거나 주워 입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기를 제대로 들지도 못해서 막대기나 돌부리를 주워 달려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로헨은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에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
“로헨 추기경!”
로헨이 멍하니 천사들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호르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관록 깊은 파수자 회의의 일원인 그의 눈에도 공포와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는가? 명천사들께서 자네에게 귀띔을 주신 게 있으셨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말 모르겠습니다. 왜, 왜 제게…….”
“자네에게 불타는 처녀께서 임하여 속삭이지 않으셨나! 그…… 계획을 진행하라고!”
호르헬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로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 불사 교단이, 성공한 걸까요?”
성배기사를 죽이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여명군을 재개하라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전쟁 계획을 다시 진행하면 된다. 이렇게 채찍 맞은 망아지마냥 달려갈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건 마치 쫓기는 것처럼…….
순간 로헨은 머리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가능성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성배기사가 성공한 겁니다.”
“뭐라고?”
“성배기사가…… 묘지 군주를 격퇴해 버린 겁니다! 성배기사가 성지 루아로 진격 중이라고!”
로헨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에 경어까지 잊어버리고 소리쳤다.
호르헬은 월식군까지 거느린 묘지 군주를 대체 어떻게 그 한 줌의 병력으로 물리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명천사들이 이렇게 나설 이유는 없지 않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들의 대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일단 자네도 무장을 챙겨입게! 명천사들께서 나서신 이상 성지 루아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묘지 군주가 없으니 수도 우샤크 따위는 단숨에 짓밟아 버리겠지. 그러니…….”
“불타는 처녀시여, 오월의 검이여, 등대지기시여, 부디 멈춰주소서!”
그러나 로헨은 호르헬의 말을 듣지 않고 광란에 빠진 듯 달려가며 외쳤다.
오월의 검과 등대지기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오직 불타는 처녀만이 찡그린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불타는 처녀시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부디 저희가 군을 이끌게 해주소서! 저희도 성배기사처럼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부디 당신들께서 손을 더럽히지 마옵시고, 지상의 진창에 손을 담그는 일은 저희가 하게 해주십시오!”
호르헬은 당장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파수자 회의는 명천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감히 조언하거나 다그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헨은 이대로 병사들이 수도 우샤크를 들이받으면 얼마나 끔찍한 피해가 생길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깨달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병사들은 그가 지휘하고 통솔할 병력들이다.
이대로 명천사들이 여명군을 지휘하게 된다면, 자신 또한 그 병사들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은 천사들의 선택을 받은 귀한 존재다. 천상의 의지를 지상에 행하게 하는 가장 귀한 도구다. 천상의 의지는 자신을 통해 행사되어야지, 그 의지를 직접 투사하면…… 마치 자신이 ‘평범한 사람’ 같지 않은가?
“부디 재고해 주소서! 제 손으로 직접 성배기사를…….”
그 순간, 로헨은 말 대신 불꽃을 토해 냈다.
로헨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들끓어 오른 불꽃은 그의 피부보다 먼저 심장을, 내장을, 폐를 먼저 구워 버렸다.
이내 혈관을 타고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로헨은 산 채로 불타올랐다.
모든 구멍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로헨의 모습은 괴상한 난로처럼 보였다.
불타는 처녀는 로헨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오월의 검이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추기경이 아이작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 것 같았는데.] [원래 어리석은 자였다. 성배기사에게 권력을 빼앗길까 봐 광분한 거겠지.]오월의 검은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그때 주변을 둘러싼 등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말을 멈췄다.
찰칵, 찰칵, 찰칵. 태엽 장치를 감는 것처럼 일정한 소리가 울려 퍼진 후, 그들은 여명군 전체가 완전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군기도, 투쟁심도, 규율도 찾아보기 힘든 군대였지만 목적성만큼은 확실했다.
갑작스럽게 여명군의 기습을 받은 불사 교단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제 수도 우샤크가 코앞이었다.
그러나 등대지기는 애초에 수도 우샤크 따위는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처음 강림한 때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성지 루아만을 향해 있었다.
오월의 검은 그런 등대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타는 처녀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빛의 법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 등대지기가 모르는 것은 없다.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르건, 등대지기의 허락, 혹은 묵인 속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건 대계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
호르헬은 선 채로 횃불이 되어 버린 로헨 오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불탄 채로 손을 앞으로 쭉 뻗고 있는 모습은 마치 여명군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았다. 기가 막히게도 정확히 성지 루아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수자 회의에서도 유독 영특하고 야심이 많던 자였다.
이렇게 어리석게 죽음을 자초할 인재가 아니었는데, 여명군이라는 가혹한 전쟁은 그의 단단한 영혼마저 마모시킨 것 같았다.
‘자네를 이해하네, 로헨.’
호르헬은 두 번이나 여명군에 참전했다. 하지만 이전의 여명군은 이번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인간의 합리와 이성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습격과 매복, 포위와 섬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명군은 말 그대로 인간을 장작 삼아 굴러가는 불덩이였다.
이런 끔찍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로헨을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그의 야심뿐일 것이다. 천상의 신성한 대계를 자신이 수행 중이라고, 자신이 천상의 의지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고 있노라고.
그 역할을 성배기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순간 자아가 붕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르헬은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당연히 천사들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지 않았겠나.”
성배기사를 방해하는 것은 여명군 자체를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호르헬은 그 위험부담을 알고 있었기에 로헨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로헨은 자신이 명천사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에 취해 실수했지만 호르헬은 천사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보라.
명천사들이 이렇게 나서 총공격을 명한 것을 보면 불사 교단에 큰 균열이 생기긴 한 모양이다.
성배기사가 묘지 군주를 패퇴하고 월식군을 물리쳤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명군 본대에는 지금만 한 기회가 없다.
“아마도 천사들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셨으리라!”
당신께서는 천상의 추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불사 교단을 뒤흔들고 박살 냈다. 천사들의 선구안과 지혜가 경이로울 뿐이었다.
호르헬은 마음 깊이 그들을 찬양하며 로헨의 어리석은 죽음을 외면했다.
그저, 그렇게라도 해야 앞으로 닥칠 무수한 죽음을 무너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루 만에 수도 우샤크를 점령했다고요?”
“점령? 파괴라고 해야겠지.”
시에로의 말에 펠트런은 창백한 표정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채찍을 맞은 듯 달려간 것은 전방만이 아니라 후방의 여명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게헨나 요새를 감시하고 있던 펠트런의 부대마저 달려가야 했다.
덕분에 펠트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 이곳저곳이 그을린 흔적에 재투성이였고, 갑옷도 여기저기서 주워 입은 것인지 짝이 전혀 맞지 않았다. 반면 뒤늦게 도착한 시에로는 상대적으로 깔끔했다.
시에로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서 있는 도시가 바로 불사 교단의 수도, 우샤크였으니까.
그리고 펠트런의 말대로 도시는 폐허에 가까웠다.
전설적인 삼중 성벽과 일흔일곱 개의 첨탑들은 불탄 잔해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본래 수도 우샤크가 건설된 이래 여명군은 성지 루아는커녕 이 천혜의 요새인 수도조차 뚫지 못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전설적인 도시가 하루 만에 점령된 것이다.
등대지기와 명천사들이 등장하여 진격을 명령한 바로 그다음 날에.
“대체 어떻게…….”
“어떻게냐고? 명천사들이 셋이나 나섰는데 세상 그 어떤 도시가 하루 이상 버틸 수 있었겠어?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어. 이래선 여명군은 실패하지 않을 거다. 인간의 광기와 탐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천상의 광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펠트런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성배기사가 가진 능력의 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 그가 월식군을 물리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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