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15)
415화. 성지 루아 (2)
[오랜만에 뵙는군요, 레오노라 베시아 양.]불사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사 황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신에 남루한 거적을 두르고 있었다.
레오노라는 저 복장이 과거 성지 루아가 도시로서 기능하던 시절 이 지역 주민들이 입던 복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왜 아직도 불사 황제가 저 복장을 고집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길을 안내한 마부조차도 온갖 보석과 성물을 두르고 있는데.
[누추한 곳으로 안내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이곳을 뜨기 어렵군요.]비좁은 골목길은 신이자 황제인 자가 거처한다기엔 지나치게 누추한 곳이었지만, 레오노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불사 황제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 계신 곳이 곧 신전이자 궁전이지요.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신이 거하는 곳은 그 자체로 성지가 되고, 신이 손대는 것은 그 자체로 성물이 된다. 심지어 이곳은 성지 중의 성지, 루아다. 이곳 자체가 거대한 신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불사 황제의 후드 아래 시커먼 어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사 황제는 무겁게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지만 겉치레할 시간이 없군요. 알 테오도르 말로는 당신이 상당히 귀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이것이 불사 황제가 난리 속에서도 레오노라의 접견을 허용한 이유였다. 레오노라가 귀중한 선물을 한 것도 있지만, 성지 루아가 공격당하는 와중에 그런 선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레오노라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다.
“예. 성배기사 아이작은 저와 같은 백금 결사의 일원입니다.”
불사 황제는 낮은 탄식을 흘렸다.
죽은 자의 모든 비밀을 엿듣는 그는 당연히 백금 결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언데드 중에서도 백금 결사의 일원이 있었으니까.
[그 역시도 미다스의 손을 찾는 겁니까?]“저희 상단원만큼 절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예. 그렇지요.”
누군가 미다스의 손을 쓰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미다스의 손을 확보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레오노라는 아이작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불사 황제는 아이작과 나눴던 대화를 되새겨 보는 듯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안젤라를 데리고 있었지요. 뭔가 아는 눈치인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미다스의 손이라니, 하필이면 그자의 손에 절대로 들어가선 안 될 물건을 탐내는군요.]레오노라는 왜 아이작 손에 미다스의 손이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상황은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쿵. 갑자기 외부에서 울려 퍼진 소리가 성지 루아의 돔을 뒤흔들며 먼지를 떨어뜨렸다.
레오노라가 천장을 올려다보자 불사 황제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돔이 은은하게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낮은 음이어서 듣기 괴로울 정도였지만, 바깥 상황만큼은 아닌 듯했다. 밖에서 알 수 없는 굉음과 터지는 듯한 소리,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불사 황제는 다시 손을 내렸다.
[실례했습니다. 얼마 전에 성벽에 구멍이 뚫렸는데, 그 후로 벌레가 극성이군요.]“구멍이요?”
레오노라는 놀라 물었다. 그녀는 성지 루아로 들어오는 비밀 통로에 들어서기 전, 주변 상황을 이미 면밀히 관찰해 두었다.
그리고 성지 루아 주변을 무수한 이형의 괴물들이 둘러싸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았다. 외경의 괴물들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고 알았지만, 하필 이 와중에 왜 외경이 침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 백성들이 괴물들에 맞서 성지 루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도, 힘도 부족하군요.]레오노라는 왜 불사 황제가 직접 힘을 써서 괴물들을 다 썰어 버리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불사 황제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의지를 주입하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 스스로가 만능의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 개인의 신념 따위를 다 떠나서, 수십만의 대군과 빛의 법전에 속한 천사들과, 명천사를 썰어 버린 성배기사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힘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괴물들을 물리친 다음에 그 자신이 잘 요리된 성지 루아를 바치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레오노라.]불사 황제는 레오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성배기사를 설득해 원정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레오노라는 신이 하는 부탁을 달콤하게 음미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신이 그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꼴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었다. 레오노라에게는 그 부탁을 들어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흥정은 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실 겁니다. 황제 폐하.”
상인은 안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단 된다고 말한 다음 조건을 타협한다. 불사 황제는 가만히 레오노라를 응시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를 보여 주었다.
“저 역시 백금 결사입니다. 우리 상단은 미다스의 손을 회수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왔지요. 저는 성지 루아에 대한 대가로 가장 귀한 보물, 미다스의 손을 요구합니다.”
[당신에게 넘기는 것이 아이작에게 넘기는 것과 뭐가 다르지요?]“다르지요. 황제 폐하.”
레오노라는 차갑게 웃었다.
“성배기사에게 미다스의 손이 넘어가는 것만큼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저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저는 미다스의 손의 정체가 뭔지 압니다.”
[정체가 뭔지 안다구요?]“소원을 들어주는 성물이라지요. 하지만 절대로 사용자의 의도대로 소원을 들어주지는 않는 저주받은 성물.”
레오노라는 아이작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레오노라는 원래부터 미다스의 손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성물의 능력이 ‘절대로 사용자의 의도에 맞추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었다.
“저는 백금 결사의 일원으로서 손을 회수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걸 사용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럼 왜 회수하려는 겁니까?]“글쎄요. 가장 귀한 보물을 황금 우상 상단이 보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자고로 자산이란 희귀해야 가치가 높아지는 법입니다. 누군가 미다스의 손을 사용해 보물을 흔해 빠지게 만든다면, 우리 자산 가치가 하락할 우려가 있거든요.”
예상대로 불사 황제는 레오노라의 답변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황금 우상 상단은 금을 좋아하지만, ‘금을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 정도의 천치는 아니었다.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틀렸다구요?”
[미다스의 손은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흉물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부터 벗어난 물건이지요. 애당초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것인데 영문 모를 이유로 존재할 뿐.]레오노라는 이 말이 거절인지, 허세인지, 아니면 경고인지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의외로 불사 황제는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지가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요.]“무슨…….”
[이 흉물을 보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가져가십시오. 대답 없고 다스리지도 않는 신, 황금 우상이라면 미다스의 손을 맡겨도 안심이겠지요. 어쩌면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레오노라는 가슴이 떨렸다. 이렇게 쉽게 미다스의 손을 내어준다고?
하지만 불사 황제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다만 보상을 드리는 것은 성배기사가 성지 루아에서 물러난 다음입니다. 그때가 된다면 제가 직접 당신에게 미다스의 손을 넘겨드리도록 하지요.]레오노라는 미소 지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
검푸른 한 밤의 사막 위로 한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한 명, 또 한 명의 병사가 줄지어 이어졌다.
이내 수십만에 이르는 대군세가 지평선을 가득 메웠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다.
장군도, 장교도, 기사도, 사제들조차도 자신들이 정확히 몇 명인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작전 계획은 뭐고 어떤 보급로를 따라 원정을 진행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천사라는 압도적인 권위 앞에서는 모든 체계와 계급이 무의미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라는 지엄한 명천사들의 명령을 받아, 장군과 기사들조차도 배가 고프면 모여서 밥을 먹고, 아무 데서나 자며, 오직 성지 루아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평선 위로 거대한 돔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병사들은 환희에 앞서 안도했다.
더 이상 쫓기듯 행군할 필요 없다는 사실에.
[보아라!]그때 갑자기 하늘 위에 밝은 빛줄기가 떠올랐다. 여명군 본대 중앙, 거대한 성상 위에 올라탄 데라 헤만을 중심으로 불꽃이 거대한 수목처럼 뻗어 올라 타오르고 있었다. 데라 헤만에게 임한 불타는 처녀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가지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소리쳤다.
[성지 루아가 눈앞으로 다가왔노라! 영광의 문이 열린다! 천년왕국의 강림이 임박했도다!]모든 체계가 무력화된 뒤, 실질적으로 여명군을 이끄는 것은 명천사 불타는 처녀였다. 등대지기는 수도 우샤크를 함락한 이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월의 검은 위협적인 적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타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데라 헤만은 묘지 군주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불타는 처녀의 도움으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대신 그만큼 짙은 영향력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모여라, 여명군의 전사들이여! 그대들 손으로 천국의 문을 열어라!]“오오오오오!”
쿵쿵쿵쿵쿵…… 이제 거의 만 명을 훌쩍 넘긴 그을린 자들이 흑요석 같은 제 몸을 두들기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번들거리는 질기고 단단한 피부를 갖게 된 그들은 아예 제 몸을 자랑스러워하듯 벌거벗고 다닐 정도였다. 심지어 성기사를 모욕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을린 자들이 전투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본 사람들은 ‘선택받은 징조’인 그들을 선망하고 같은 존재가 되길 염원했다.
여명군 전체가 광신적인 분위기에 찌든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어려웠다.
“다들 미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강해질수록 음영 또한 강해지는 법이다. 광신적인 분위기 속에 상대적으로 제정신을 찾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펠트런을 위시한 제국기사단 측 기사들이었다.
“이따위 것이 무슨 전쟁입니까? 이건 자살 행렬입니다.”
“저는 빛의 법전을 섬깁니다. 하지만 이건…… 이건 빛의 법전께서 신도들을 아끼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것도 시험의 일종일까요?”
펠트런은 기사들의 자조 섞인 한탄을 귀담아들었다.
그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했다. 애당초 빛의 법전 신도조차 아닌 펠트런의 영향력이 강한 제국 기사단이 광신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뒤에서 시에로가 설교하는 척하면서 그들이 정신을 차리게끔 교묘하게 선동하고 있었다.
“차라리 황제 폐하께서 우리 곁에서 이끌어주셨다면…….”
끝내 나와선 안 될 반역적인 발언마저 나왔지만, 그를 지적하거나 제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두려움 섞인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이들 대부분은 발트제메르와 함께 리히트하임으로 쳐들어갔던 기사들이다.
그들은 황제가 파면당하는 순간 겁에 질려서 꼼짝 못 했을 뿐, 딱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가 없는 여명군이 이 지경이 되고, 고귀해야 할 기사들이 일반 잡병처럼 취급당하자 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와 귀족들이 교단과 당당히 힘을 겨루고 마주 보던 그때를.
‘황제가 리히트 조약을 제 손으로 팽개쳤던 건 기억 안 나는 모양이군.’
리히트 조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황제가 여명군을 이끌었다면 어차피 지금과 똑같은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바뀐다면 데라 헤만 대신 황제가 불타오르고 있었겠지.
그들이 알 방법은 없었다.
펠트런은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내색하진 않았다. 이제 곧 전투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단장님, 이대로 이 광신도들 손에 휘둘리실 겁니까?”
펠트런은 기본적으로 생략했던 전략이 어긋나긴 했지만, 때가 나름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지난 며칠 간의 과도한 행군은 여명군 내부에 불만이 팽배하게 했다.
펠트런은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가?”
이견을 표하는 자들은 없었다. 어차피 이 여론 자체가 펠트런이 유도한 결과였지만, 그는 마치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의 뜻을 따라간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펠트런은 한쪽에 서 있는 시에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명천사들이 불사 황제와 싸우느라 정신없는 동안, 적절한 상황에서 우리는 전선에서 이탈한다. 병사들이 이 무의미한 전투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잘 인솔하도록. 행운은 우리를 따를 것이다.”
펠트런은 은밀한 반역을 시작했다.
여명군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게 만들면 된다.
이미 여명군 안에는 붉은 성배 클럽에서 보낸 인간사냥꾼들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패는 지금 서쪽에서 오고 있었다.
‘성배기사…… 그 정도라면 충분히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