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21)
421화. 불사 황제 (3)
우리는 모두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천국에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기적으로, 현현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소년 역시 여명군에 지원한 순간부터 천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비참한 지상 대신 찬란한 천국의 문에 가 닿겠다고.
문 하나 열자고 기사나 사제가 죽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작은 레오노라의 선택이 ‘효율적’이라는 점은 이해했지만 동조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았다. 대신 루앗딘 열쇠를 휘둘러, 단숨에 소년의 몸통을 찔렀다.
용병이 기겁하며 소년을 놓자마자, 소년은 내부에서 타오른 불길에 의해 단숨에 타들어 갔다.
레오노라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부터는 ‘효율적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해도 되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작은 웃으며 다가왔다.
“혹시라도 그 소년이 뱃속에 괴물이라도 품고 있었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저는 함부로 애한테 칼을 들이밀었다가 통째로 잡아먹힌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레오노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으려 했지만 아이작과 눈을 마주친 순간 숨이 멎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이작의 눈꺼풀 아래에서 짙은 선홍빛의 손가락 같은 것이 비집고 나왔던 것 같았다.
레오노라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가까이 붙어선 아이작은 타들어 가는 아이의 시체가 역광을 만든 탓에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음영 속에서 오직 보랏빛 눈동자만이 음산하게 빛났다.
갑작스레 아름답고 상냥해 보였던 성배기사의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레오노라는 아이작이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더 친절하고 상냥하려 애쓰는 것뿐이라고.
“아가씨?”
샬록이 다가오려 하자, 아이작이 먼저 레오노라에게 손을 뻗었다. 레오노라는 흠칫 떨다가 그 손을 잡는 대신 벽을 짚고 일어섰다.
“돈이 된다고 악마와 거래를 하다가 끝까지 잘 된 사람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 없습니다. 레오노라, 조심하세요.”
아이작은 그녀를 지나쳐 통로를 지나갔다. 뒤이어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이 뒤따라왔다.
샬록은 멀어지는 아이작의 등을 보며 투덜거렸다.
“뭡니까, 저 녀석? 길 안내 했다고 볼일 다 봤다 이건가?”
“뭐, 그렇긴 하죠? 성배기사랑 성기사단이 불사 황제와 월식군과 싸우는데 우리 용병들이 뭘 할 수 있습니까? 응원가?”
레오노라는 용병들의 시답잖은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계산과 이익에 대해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괴물과 천사들이 우글대는 전장에서 황금 우상 상단이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단 한 가지, 거래뿐이었다.
***
칼날이 무겁게 떨어지면서 투구를 갈랐다.
오크는 얼굴을 감싸 쥐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명군 병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으려 했다. 하지만 오크는 발작하듯 일어나 병사에게 몸을 날렸다. 병사는 오크의 등을 힐트로 마구 내려쳤지만 두터운 가죽에 막혀 소용없었다. 오크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병사의 배를 물어뜯었다.
비명, 욕설. 병사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칼을 거꾸로 들고 칼날을 쥔 채로 오크의 등을 찔렀다. 단숨에 복부까지 관통당한 오크는 흠칫흠칫 몸을 떨다가 축 늘어졌다.
이 소소한 승리에 기뻐할 틈도 없이, 병사는 오크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병사를 끌어안은 채로 경직된 오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섬뜩한 기운들이 그의 살갗을 스쳤다.
죽은 지 10초도 지나지 않은 오크가 발작하듯 몸을 떨다가 비명을 질렀다.
“엄마, 엄마!”
전장에서 듣기 힘든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러다 오크가 갑자기 목을 기괴하게 꺾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놈도 끓여 버려. 한 솥 더 나오겠군!”
악령은 숙주의 몸을 빌려 자신이 죽기 전 경험했던 끔찍한 기억을 되풀이하며 비슷한 말을 반복해 외쳤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병사를 발견하고는 게걸스럽게 얼굴을 처박았다. 병사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드득. 그때 갑자기 날아든 창 한 자루가 오크의 머리통을 꿴 채 날려 버렸다. 얼마나 강한 힘이었는지 단숨에 목에서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왼쪽 어깨만 남아있어도 아직 쓸만하군.’
이 또한 붉은 성배의 기적 덕분이다. 공작들만큼은 축복받은 체질은 아니지만 그를 눈여겨본 명천사의 가호로 펠트런은 아직 살아 있었다.
펠트런은 창을 회수하기 위해 비명을 지르던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숨을 헐떡였지만 이내 늦은 상태였다. 오크가 입에 문 채 끌고 나간 내장이 바닥에 길게 펼쳐져 있었다.
이미 병사의 숨이 꺼지기도 전에 무수한 악령들이 도사린 채 그의 몸에 깃들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펠트런은 그가 위협이 되지 않도록 목을 날려 버렸지만, 소용없었다. 목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는 내장을 질질 끌면서 어딘가로 빠르게 기어갔다.
“뭉쳐라! 뭉쳐야 살 수 있다!”
기사들 몇몇이 병사들을 최대한 규합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펠트런은 이미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망가진 전열을 최대한 수습해 전선이라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기사들조차 어디가 후방이고 전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특히 이런 난전에서는 전후방의 구분이 의미 없었다.
“뭉치지 마! 뭉치면 다 죽는다!”
또 다른 절박한 기사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저 말도 사실이다.
한군데에 뭉쳐있다가 하나가 악령 들려서 옆 사람을 물어뜯고 찌르기라도 하면 좋은 표적이 될 뿐이다. 오크가 쏜 화살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그 자리에서 악령 들린 자가 되어 버린다.
“자살해! 자살해야 천국에 갈 수 있어!”
누군가 높은 톤으로 깔깔 웃으면서 소리쳤다. 이건 미친 소리다. 악령 들린 병사가 발가벗은 채 전장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미 뼈며 내장이며 다 드러나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이상해질 지경이었다.
오크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그들은 무당들의 보호를 받고, 아직 전열이 깨지지 않은 채 여명군과 악령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명군 병사들이 오크와 언데드, 양쪽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들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쿠르르르릉.
오월의 검이 아틀란을 상대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명천사 황천이 거대한 힘을 부여한 듯, 아틀란은 믿기지 않는 위력으로 하늘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황천의 위력 앞에서는 공중에 있는 오월의 검도 이점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불타는 처녀는 성지 루아의 성벽을 상대로 맹렬한 화염 기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녀가 만들어 낸 불기둥은 성지 루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전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등대지기조차 찢어진 하늘을 전부 다 막아 내지는 못했다. 그는 무력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망자들 몇몇만을 불태울 뿐이었다.
‘아니, 막지 않는 건가?’
펠트런은 그런 의심을 품었다.
등대지기의 힘이 저게 전부일 리가 없다. 음모와 기만으로 먹고 살아온 펠트런은 본능적으로 등대지기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일개 인간’으로 추락해 버린 펠트런은 그 흉계가 무엇인지 추측도 할 수 없었다.
‘여명군은 이미 패배했어. 천사끼리 싸운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런데 뭘 하겠다는 거지?’
펠트런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지옥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는, 끝없이 서로 죽고 죽이기만 하는 전쟁터.
수십만 여명군은 이곳에서 전멸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유해는 지금까지 모든 여명군이 그러했듯, 단 한 구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여명군 병사들을 이 지옥으로 끌어들인 것이 펠트런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상 흑제국 동맹이 만들어 낸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정작 내가 그사이에 끼여서 죽을 위기라니.’
펠트런은 그 아이러니에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최소한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는 알아야 도망을 칠 텐데, 이미 천사의 발등까지 찍은 상황에서…….
그때, 길고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펠트런의 시선이 돌아갔다.
천사들이 싸우는 굉음과 전장의 소음에 비하면 작은 소리였지만, 이 지옥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명하고 웅장한 울림이었다. 나팔은 몇 번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일단의 병력이 찬란한 후광을 두른 채 돌격하고 있었다. 칸의 군대 일부가 그들을 발견하고 가로막으려 했지만, 마치 강물에 부딪힌 모래 알갱이마냥 흩어져 내렸다.
펠트런은 그들이 흩날리는 깃발들에 전율했다.
세상에는 전투에서 기쁨을 느끼고, 전장에서 천국을 찾는 미치광이들이 있다.
그들이 왜 자신들을 빼놓고 전쟁을 논하느냐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엘릴 왕국군!”
***
“썩 꺼져라!”
쾅. 땅을 모루 삼은 투할린의 망치질이 땅을 직격하자, 바닥을 타고 낮은 전압의 벼락들이 악령 들린 자들을 지졌다.
많은 문화권에서 대장장이의 망치질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중에서도 벼락의 힘이 담긴 투할린의 망치질에 반경 수십 미터에 있던 악령들이 단숨에 퇴마 당해 날아갔다.
“드, 드워프? 화, 화로 장인인가?!”
힘겹게 몇몇이 뭉쳐 오크와 악령들의 공세를 버티고 있던 병사들이 투할린을 보고 놀라 외쳤다. 그들에게는 바로 어제까지 머리를 쪼개던 언데드보다 백 년 넘게 은거한 드워프가 더 생소하게 느껴졌다.
특히 더러운 인상에 험상궂은 드워프라면.
투할린이 인상을 쓰며 다가오자 병사는 자신도 모르게 창을 치켜들었다.
“이런 모지리들! 동맹도 못 알아보고 그런 이쑤시개를 들이대?”
순간 투할린이 버럭 화를 내며 호통쳤다.
“그 변변찮은 무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다! 썩 치워!”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다가 ‘동맹’이라는 말에 뭔가를 떠올렸다. 그들은 뒤늦게서야 투할린 뒤쪽에 선 병사들과 깃발을 발견했다. 선명한 흰 바탕에 보랏빛 십자가.
“이, 이사크레아 여명군!”
병사들도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전공을 입소문을 통해 이미 전해 듣고 있었다. 특히 시에로 여명군을 통해 성배기사의 위명을 전해 들은 병사들은 순식간에 창칼을 땅으로 내리고 환호했다.
“성배기사! 성배기사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
“세상에,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도착했어! 우리는 살았어!”
투할린은 그들의 외침에 쓰게 웃고 말았다.
‘정작 그 성배기사는 여기 없지만 말이지.’
투할린은 병사들에게 슥 턱짓했다. 여명군 병사들은 헐레벌떡 화로 장인들이 펼치고 있는 퇴마 결계 안으로 몸을 던지듯 들어갔다. 둔하게 울려 퍼지는 망치질 소리가 그들의 피폐하고 찌들어있던 정신을 서서히 정화했다.
투할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먼 곳에서 기동 중인 엘릴군을 응시했다.
아이작이 빠진 후, 투할린과 에델레드는 역할을 둘로 나눴다. 투할린이 이끄는 세상의 용광로 교단과 보병 전력은 여명군 본대 전력을 흡수하며 서서히 이동하고, 에델레드가 이끄는 엘릴군은 그 기동성을 살려서 칸의 군대를 교란하는 쪽으로.
전력이 둘로 나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적이 언데드가 아닌 악령 들린 자들 뿐이라면 투할린 혼자서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천사만 개입하지 않으면 이 전장에서 진짜 위험한 쪽은 칸의 군대다.
그리고 엘릴군은 올칸 규율의 기병대를 유린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할 수 있다면 내가 오크 놈들 머리를 뭉개 주고 싶었지만.’
투할린은 쓰게 웃으면서 엘릴 군대가 일으키는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 이 전장에서 오크를 한 놈이라도 더 많이 죽일 수 있는 쪽은 내가 아니라 엘릴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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