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24)
424화. 불사 황제 (6)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먼지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지 루아를 덮고 있던 돔이 깨져 나갔다.
달걀껍질처럼 부서진 돔의 틈새가 넓어지면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도시의 건물들이 부서지고, 옛 시에서나 언급될 법한 폐허로 변해 갔다.
이름 높은 고도(古都),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현재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성지 루아가 허망하게 붕괴되었다. 이후 쏟아지는 무수한 토사와 비, 바람 속에 성지 루아는 그 흔적만이 아련하게 남았다.
그 사이에도 해가 빠르게 뜨고 졌다.
태양이 지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거의 하나의 광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산이 돋아나고 협곡이 생겼다. 도시가 생겨났다 마모되어 무너졌다. 아득한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의 흔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낮아지고, 평평해지고, 차가워졌다.
이윽고 눈 내린 설원이 찾아왔다.
아이작은 이 기이한 시간의 흐름이 드디어 멈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직도 태양은 광선처럼 보일 지경으로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의 흐름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마모되고 소진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탈 것도, 쌓을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어 왔지만, 숨은 쉴 수 있었다.
파수자의 등대를 켠 주변의 극히 일부 영역만이 원래 세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일부마저도 파도가 들이닥쳤다가 물러나는 것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길 반복했지만, 이 종말의 풍경이 온전히 침식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실제로 시간을 빨리 돌렸다기보단 일종의 심상이 세계를 침식한 거겠지. 문제만 해결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바로 그 문제가 설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종말 끝에 선 자, 죽음을 거부하고 불멸을 신도들에게 베푼 신이 조용히 아이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원한 풍경이 어떻습니까?”
불사 황제는 정신적 파장이 아니라 평범하게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인간이라기보다 해 질 녘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가까워 보였다.
아이작은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멋지군.”
불사 황제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 호칭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신이 종말 끝에 선 자, 영원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이라니? 심지어 살아남은 엘프나 드워프 중에서도 저보다 늙은 자들이 있으니까요.”
큰 싸움이 시작될 것처럼 판을 깔아 놓고 조용히 대화나 하는 모습이었지만, 아이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원래 신과 인간의 싸움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판이 벌어진다.
일종의 퍼즐 맞추기, 또는 논리 싸움에 가까운.
실패하면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사실 나도 조금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
아이작 역시 솔직히 300살이 조금 넘는 주제에 ‘불사 황제’라는 칭호는 조금 과하지 않나 생각했던 것이다.
조금 겸손한 표현을 찾자면 ‘장수 황제’나 더 겸손해지자면 ‘요양원 큰 어른’ 같은 표현도 좋을 것이다.
“저는 그들을 이해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아이작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불사 황제는 자신의 넋두리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저는 신이 된 순간, 어째서 제게 불사 황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가야 할 앞날이 쭉 보이더군요. 압도적으로 길고 긴 시간이.”
“앞날이 보였다고?”
불사 황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아이작을 보았다.
“모든 신앙들은 바뀌거나, 몰락하고, 소멸하고, 사라집니다. 빛의 세기 이전에는 일만 신들의 난세가 있었고, 그 전에는 엘프 일곱 왕조가, 그보다 전에는 고룡의 치세가, 그 전에는 바위와 비의 전쟁이 있었지요.”
아이작으로서는 이해나 가늠이 안 되는 과거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과거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역사보다는 지리학의 시간표를 뒤져 봐야 할 오랜 세월일 것이다.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불사 황제가 ‘고양이와 햄스터의 대전쟁’이라는 단어를 은근슬쩍 끼워 넣어도 아이작은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그거 중요한 설정…… 아니, 정보인가?”
“아닙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다행이군. 그래서?”
“중요한 건 모든 게 무너지고 사라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처음으로 주도권을 쥐고 문명을 일궈낸 지금의 빛의 세기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아이작은 머릿속에 일만 신들의 난세, 엘프 일곱 왕조, 고양햄스 대전쟁, 고룡의 치세, 바위와 비의 전쟁 같은 이름이 붙은 연표를 떠올렸다. 그들은 당대에 대단한 권력을 누리고 영원할 것 같은 권세를 누렸을 것이다.
지금 빛의 법전처럼.
“그 권세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가? 빛의 세기 역시 다른 시대로 대체될 것이라고?”
“그렇지요.”
불사 황제는 담담히 말했다.
“다른 모든 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대’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저마다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지요. 부르는 자가 다시 만신의 난세가 오길 기대하고, 세상의 용광로가 새 시대의 신이 자신들의 용광로 속에서 탄생할 거라고 믿으며, 붉은 성배가 자신들이 쌓아 올린 죄악이 마침내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아이작은 불사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각 신앙의 승리 조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제야 아이작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게임 속의 ‘승리 조건’이란, 빛의 세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대에 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존재한다고?”
“어떤 신앙이 승리해도, 세상이 바뀌고 새 시대가 열린다 해도, 불사교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이야 바뀌고 억압받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전히 존재하지요.”
“언데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요. 저의 탄생으로 세상에는 불사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그 개념은 불멸합니다. 개념이 남은 이상, 저는 불멸하지요. 그제야 저는 제가 읽어야 할 책의 두께가 다른 신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두껍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불사 황제, 세상에서 가장 어린 300살짜리 신은 세상과 자신에게 남겨진 압도적인 시간 앞에 겸손하게 손을 모았다.
“그래서 제가 불사 황제인 겁니다. 살아온 날이 아니라, 살아갈 날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어떤 신들보다도 더 많은 신도들을 거느릴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짊어진 시간의 무게는 그 어떤 신도 감당한 적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무수한 시간이 흘러 마침내 승리할 신이야말로 불사 황제인 셈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어쩐지 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에 아이작은 슬슬 파수자의 등대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침식당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버텼다.
엘릴이 규칙을 지배하는 세계를 따라갔다가 어떤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봤는지를 생각하면 버텨야만 했다.
“좋겠군.”
아이작은 비아냥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성지 루아쯤은 양보해도 승리할 수 있잖아?”
불사 황제는 그림자를 길쭉하게 찢으며 웃었다.
“양보하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지요. 게다가 다른 모든 신앙에 성지 루아를 양보할 수는 있어도 등대지기만큼은 안 됩니다. 그 매몰찬 광인에게 세상의 주도권을 넘겨줄 수는 없지요.”
아이작은 불사 황제의 과거를 들여다봤기 때문에 그가 등대지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실 개인적인 호오가 아니더라도 굳이 자기 수도를 박살 내고 신도들을 죽인 자에게 성지까지 양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 등대지기를 싫어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 그러면…….”
“당신도 안 됩니다. 아이작.”
불사 황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당신만큼은 안 됩니다. 세상 그 무엇이 성지 루아를 점령하더라도, 당신만큼은.”
아이작은 불사 황제의 날 선 적대감에 당황했다.
물론 자신이 그의 군대를 박살 내고, 전선을 망가뜨리고, 함선을 탈취하고, 성지에 괴물들을 끌어들이고, 명천사를 둘이나 소멸시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인가?
지금 생각해 보니 싫어할 만한 짓을 좀 하긴 했다. 하지만 불사 황제가 아이작을 싫어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당신은 본 적 없는 시대입니다.”
“본 적 없는 시대?”
“모든 신들은 각자 자신의 신앙이 멸망하는 시기까지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의 끝을 대비하거나, 준비하거나, 막으려고 애쓰지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집권한 뒤의 세상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신도 뭣도 아닌데 내가 다음 세기를 집권하는 게 가능한가?”
“모릅니다.”
“뭐라고?”
“저는 사실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예측할 수도, 알아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기원하지 않은 자, 그 무엇도 빚지지 않고 태어난 자, 홀로 태어난 독생자(獨生子)니까요. 당신의 과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도 알 수 없습니다.”
‘아이작 님은 독생자십니까?’
아이작은 갑자기 어떤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주 예전에, 에이단이 그에게 우르반수스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홀로 태어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 어떤 조상이나 가문, 인연을 빌리지 않고도 태어난 존재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죠. 아이작 님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우르반수스가 시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요.’
아이작은 네필림이므로 독생자라고 말할 수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육신에 한정한 것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은 이 세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다른 존재이다. 때문에 아이작은 이 세상의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세상에 마모되거나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도 했다.
불사 황제 입장에서는 우르반수스와 완전히 상관없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이 세상에 뚝 떨어져 모든 역사서를 망쳐놓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작은 영지의 기사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 상관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변화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그러니 당신이 불사교단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을 전력으로 몰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작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불사 황제와의 정면 대결은 그가 피하고 싶었던 결말이다. 한없이 게임 오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내가 의외로 좋은 세상을 만들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당신이 깃든 육신은 혼돈을 추구하는 종말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요. 제가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와서 발목을 잡는군.’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괴물을 신뢰하는 쪽이 이상하다.
특히 그 촉수괴물이 자기 신도들과 천사들을 잡아먹고 있는 중이라면 더더욱.
아이작은 주변의 기온이 더 싸늘하게 내려간 것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카훌린에 검기를 피워 올리며 불사 황제를 주시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설원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봄이 찾아올 리 없는 마모된 땅에, 새하얀 백골들이 봄비가 내린 후 돋아난 새싹들처럼 솟아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득한 혼돈의 바다에 우연히 돋아난 이 질서의 땅에, 인류는 간신히 터전을 잡고 문명이라는 텃밭을 일궜습니다. 이제 와서 그 작은 영역을 혼돈의 대리인에게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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