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27)
427화. 아름다운 가죽 아래 (2)
아틀란은 만생자의 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엘릴이 현신해? 신이? 불사 황제처럼 우르반수스를 떠나 이 지상에 강림했다고?’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신들은 왜 애시당초 땅에 나타나 활보하며 다니지 않는단 말인가. 엘릴에 대한 전설의 반의 반만 사실이어도 이 세계는 그 무신의 차지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곳을 최후의 전장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엘릴은 세상이 부서지거나, 자신이 부서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는 대전쟁을 염원해 왔어. 지금 여기서 엘릴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야.]아틀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과 천사들만이 아는 목적이나 방법이 있는 듯했다.
만생자는 재차 명령했다.
[엘릴은 불사 황제에게 용건이 있겠지! 신은 신끼리 싸우라고 하고 물러나라!]후우우우…… 무수하게 흩어지는 낙엽 속에서 엘릴이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그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실루엣만 비칠 뿐이었지만 그 숨결만으로도 아틀란은 폭풍 같은 힘을 느꼈다.
‘저게 엘릴이라고? 그 엘릴? 세상을 제패한 패왕?’
[아틀란, 어서!]“제게는 올칸이 강림하실 수 없으십니까?”
[뭐라고?]“엘릴이 나타났다면 올칸께서도 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제게도 힘을 주십시오. 제가 엘릴을 상대하겠습니다!”
[이런 미친 것, 너는 전사가 아니라 수천 개 부락을 지휘하는 칸이다! 정신 차려!]“그렇기 때문입니다! 엘릴이 진심이라면 여기 있는 칸의 군대 태반은 죽습니다! 왜 엘릴은 인간사에 개입하는데 올칸께서는 그러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그건…….”
[그런 식으로 신들이 개입했다간 정말 대전쟁이 성립해 버린단 말……!] [“꺼져라.”]그 순간, 폭풍 같은 엘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지막한 속삭임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아틀란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대던 만생자의 존재가 깨끗이 지워진 것을 느꼈다.
엘릴이 만생자를 추방한 것이다.
저벅. 이내 흩날리는 낙엽 속에서 에델레드, 아니, 그의 몸을 빌린 엘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델레드의 육신 자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운 녹색 안광이 불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틀란은 에델레드의 갑옷에 새겨진 말발굽 자국을 보면서 아까 자신이 놓친 기회를 떠올렸다. 그때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후회가 되진 않았다.
엘릴은 아틀란을 바라보았다.
꽈드드드득. 칼드부흐를 쥐는 소리가 팽팽해진 닻줄처럼 울려 퍼졌다. 엘릴은 양손검인 칼드부흐를 포크 마냥 한 손으로 쥐고 있었다.
아틀란은 저 작은 손아귀 안에 거대한 함선을 붙잡아 둘 정도의 힘이 있음을 느꼈다. 아틀란은 벌벌 떨면서, 동시에 웃음을 줄줄 흘리면서 만곡도를 틀어쥐었다.
죽는다.
아틀란은 자신의 상태를 직감했다.
엘릴이 만생자를 몰아낸 순간, 자신의 몸에 임하고 있던 축복과 기적마저도 깨끗하게 걷혀 나갔다.
저 무신을 순수한 육신의 힘만으로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틀란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엘릴은 히죽 웃었다. 그는 칼드부흐로 스스로의 어깨를 툭툭 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성지 루아를 향하고 있었다.
이내, 엘릴은 흩날리는 낙엽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카, 칸이시여!”
황급히 달려온 것은 장군 무당 테헤르마였다. 만생자와 접신하여 오월의 검을 견제하던 것은 바로 그였다.
“처, 천사께서 퇴각하라는 명령과 함께 전장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저, 저건 뭡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후퇴하라는 명령은 필요 없었다. 이미 엘릴이 등장한 순간 전장이 와해하고 있었다. 칸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엘릴 기사들은 더욱 크게 이름을 외치며 날뛰고 있었다.
천사들마저 꼬리 말고 달아나는 와중에 그들이 뭘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물러나?’
아틀란은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지극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사다운’ 모습, 혹은 에델레드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보상일지도 모른다.
명예롭게, 한번 봐줬으니 자신도 한번 봐준다고.
뭐가 어찌 됐든 엘릴의 변덕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없을 것이다.
“후퇴해라.”
아틀란은 후회 없이 명령했다.
에델레드와 달리 그에게는 불사 황제에 대한 신의나 우정 따윈 없었다. 약탈할 만큼 약탈했고, 사내다움도 증명했으니 아쉬울 게 없다. 그는 보물을 챙기고, 이 아수라장은 신과 천사들에게 맡기면 된다.
***
“엘릴! 이 광인이 결국…….”
불사 황제는 얼굴을 얻어맞은 상황에서도 아이작을 노려보기는커녕 하늘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아이작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 성지까지 왔다는 것은, 누군가가 뭔가 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누군가의 대계건, 음모건 상관없다.
변화를 바라는 자들의 손길이 아이작을 성지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 도와줄 것이란 아이작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게 엘릴일 줄은 몰랐지만.’
엘릴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는 이렇다 할 뚜렷한 기적이나 권능으로 아이작을 돕지도 않았다. 하지만 불사 황제가 지배하는 세계의 규율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지금, ‘인간이 신에게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규율이 생겨났다.
‘퍼즐이 풀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면 퍼즐의 룰을 바꾸는 수밖에.’
아이작은 재차 불사 황제에게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촉수로 목을 휘감았다.
우드드득. 확실하게 물리력이 통했다.
정말 타격을 받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촉수에 휘감긴 불사 황제가 느끼고 있을 당혹감은 그 이상일 것이다.
“감히 내게 이런 흉측한 것을 들이대다니!”
불사 황제는 처음으로 눈에 띄게 분개하며 아이작의 촉수를 쳐냈다. 그의 손길에 닿은 촉수들은 빠르게 말라붙으면서 끊어져 버렸다.
혼돈의 권세들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그의 모습은 생전의 잔재이리라.
‘인격신의 단점이지.’
엘릴이 죽어서도 근친 취향을 벗어날 수 없었듯이, 불사 황제 역시 자신이 신이 되기 품었던 배신감과 분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러나라!”
불사 황제가 명령하자 백골의 파도가 아이작을 휩쓸 듯이 밀어닥쳤다. 자연적 재해에 가까운 그 물결을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작은 맞서는 대신 오히려 표류하듯 쓸려나갔다. 마치 산사태에 휩쓸리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그 안에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쿠드드드드득. 거대한 백골의 물결이 기이한 뒤틀림을 만들어 냈다.
불사 황제는 그대로 아이작을 짓이기려 했지만, 백골의 물결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대체 어디서 어떻게 써먹나 했는데 이렇게 쓰게 되는군.’
[망자의 외골격(EX─)] [영혼에 껍질이 있다면 그것은 살과 뼈라고 부르겠지요. 사람은 연약한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육신을 몸에 두릅니다. 이 힘은 가장 단단한 부분을 겉으로 드러내고, 대신 영혼을 보호합니다. 단, 사용하는 동안 피를 많이 흘리게 됩니다.]아이작은 백골들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먹어 치웠다.
이때까지 백골은 그에게 어떠한 영양도 공급하지 못했지만, 묘지 군주가 죽음으로 제공한 이 능력을 통해 비로소 용도를 찾을 수 있었다.
푸스스스…… 거대한 백골의 거체가 몸을 움직였다.
용도도, 기능도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외골격을 만드는 데 써먹었기 때문에 마치 거대한 자석에 줄줄이 쇳가루가 엉겨 붙은 듯한 형태였다.
굳이 묘사하자면 거대한 머리통이 촉수 수천 가닥을 늘어뜨린 듯한 모습.
백골은 오로지 아이작을 보호하고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는 목적으로 쉬지 않고 다른 뼈를 포식했다. 하지만 이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입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오래는 유지 못 하겠군.’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작은 막대한 출혈을 느꼈다. 백골들은 오랜 시간 메말라 있던 세월만큼이나 탐욕스럽게 그의 피를 들이마셨다. 죽은 신의 내장이 피를 활발하게 공급하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다.
단지 버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불사 황제를 꺾어야 한다.
하지만 엘릴이 규칙을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작과 불사 황제의 힘의 격차는 현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을 꺾어야 하는가?
장르가 논쟁에서 투쟁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신과의 싸움이 퍼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를 먹어 치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백골을 먹어 치울 수 있는 것. 그건…….’
산뜻한 숲 내음이 아이작의 코끝을 스쳤다.
다소 뜬금없지만, 아이작은 수목장(樹木葬)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탐욕스럽게 불사 황제를 훑어보았다.
***
와해 직전이었던 여명군 본대 병력은 빛의 법전 성기사는커녕 사제조차 없는 투할린의 지휘 아래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자신들의 신의 보호 아래 들어왔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기꺼이 합류했다.
그때, 모두가 전장의 분위기가 뒤바뀐 것을 느꼈다.
외곽에서 착실하게 여명군을 규합하고, 칸의 군대를 박살 내며 전진하던 투할린도 마찬가지였다. 엘릴 기사들이 칸의 군대를 반으로 갈라 죽이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큰 피해 없이 짓밟던 와중이었다.
투할린은 갑자기 청량한 바람과 함께 도래한 강력한 신성을 감지했다.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의 강력한 권능이었다. 신성을 감지할 수 있는 모두가 이 새로운 신성의 등장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불사 황제에 이어 또 다른 신이 등장했다고?’
이 정도 힘의 등장이라면 일대 천사들 역시 모두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투할린 역시 명천사 천둥 장인이 자신의 육신을 빌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성지 루아에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내려와 역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역사상 가장 많은 천사들이 모인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때 칸의 군대 안쪽에서 급박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과 수없이 다퉈 온 투할린은 그 북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약탈 종료. 다른 말로 전격 후퇴.
투할린의 눈이 불타올랐다.
“이놈들! 도망 못 친다!”
투할린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곧바로 등을 보인 오크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오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달아났다. 빠르게 치고빠지는 전술에 능한 오크들은 도망치는 것도 빨랐다. 어차피 죽어도 환생하면 그만이니 복수하겠다며 달려드는 놈들도 없었다.
덕분에 늘 그랬듯, 오크들은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투할린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노성을 토해냈지만,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오크 토벌이 아니었다.
‘아이작. 아이작을 지원해야…….’
하지만 그의 시선은 성지 루아가 아닌 저 먼 곳에서 먼지구름을 피워올리며 달려가는 기사 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것은 에델레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에델레드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에델레드는 말을 달리다가 투할린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투할린은 자신도 모르게 망치를 틀어쥐었으나, 가까이 다가온 에델레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병사. 진격을 준비해라.”]고막과 정신, 두 가지를 동시에 웅웅 울리는 기이한 목소리였다.
엘릴은 명천사로 점지받기까지 한 투할린을 일개 병사로 전락시켜 버렸다. 투할린은 부지휘관인 자신은 결코 명령받을 위치가 아니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전술? 전투력? 경험?
그 모든 것은 엘릴 앞에서 무의미하고 초라해진다. 신이 아니더라도 그를 상급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아집일 뿐이다.
“저는 세상의 용광로 신도입니다. 제가 귀하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간신히 이렇게라도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엘릴에게 엎드려 절하기 직전이었던 동료 장인들과 라이칸스로프 전사들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투할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릴은 빙긋 웃었다.
[“귀관은 싸우러 이곳에 온 것 아닌가? 전장이 마련되었으니 싸워야 하지 않겠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