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28)
428화. 아름다운 가죽 아래 (3)
‘귀관’이라는 호칭으로 격이 상승했지만, 말 한마디로 얻은 초특급 진급에 투할린은 기뻐하지 않았다.
엘릴의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아이작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과 엘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교의 신이 다른 신도들을 조종하려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엘릴이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간접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신의 압도적인 신성을 마주한 여명군 병사들은 광기 어린 신앙심마저 흘려보내며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극한 환경에서 고통받던 정신이 강력한 힘을 마주했을 때 의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지 루아는 지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벽이…….”
[“문은 이제 곧 열린다.”]엘릴은 칼드부흐를 들어 성지 루아를 겨냥했다. 그 순간, 불타는 처녀가 만들어 낸 불기둥이 폭발하듯 거세게 타올랐다.
[됐다!]불타는 처녀의 외침과 동시에, 성지 루아를 틀어막고 있던 거대한 성벽에 거대한 구멍들이 뚫렸다. 불타는 처녀는 만들어 낸 불기둥을 아낌없이 구멍 안쪽으로 쑤셔 넣으며 대기하고 있던 언데드 광신도들과 월식군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불타는 처녀는 의기양양하게 여명군에게 명령을 내리려다가 그 군세 상당수가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휘하에 들어간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투할린을 보고 사납게 외쳤다.
[화로 장인!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적들을 물리쳐라!]“허, 참.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다들 나한테 염병들이신지?”
투할린이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당장 눈앞에서 엘릴한테 말대꾸한 참이라 그런지 불타는 처녀의 말은 말 같지도 않았다. 작게 중얼거렸지만 불타는 처녀는 투할린에게 의식을 집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분개하려던 순간, 엘릴이 시선을 들어 불타는 처녀를 응시했다.
[“네 일에 집중해라, 병사.”]불타는 처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네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누가 봐도 엘릴을 의식하고 닥치는 모습이었다.
엘릴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보아라, 병사들 하나하나가 저렇게 제 몫을 다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이 미친놈은 자신 외엔 전부 병사인 건가?’
불타는 처녀마저도 병사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모습에 투할린은 그냥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로 공평하게 오만하면 서운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투할린은 뭔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엘릴이 강림했다면 등대지기건 불타는 처녀건 성지 루아를 빼앗길까 봐 신경 쓸 법도 한데,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등대지기는 아예 엘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의 강림보다 성지 루아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엘릴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진격하라!”]땅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지평선 넘어까지 울려 퍼지고도 남을 정도였다. 엘릴 기사들은 그의 수족이라도 된 것처럼 동시에 말을 박찼다.
그 어떤 구호도 성가도 없었지만 그들은 신의 지휘를 따르는 성기사, 그 자체였다.
‘천둥 장인이시여, 이걸 어찌해야 합니까?’
투할린은 생각이 복잡했지만, 천둥 장인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치 여기까지 온 건 전부 네 책임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투할린은 어쩔 수 없이 혀를 쯧 차면서 엘릴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성지 루아에 발을 한번 디뎌보기라도 해야지!”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여전히 저승문은 열려있고, 성지 루아 안에 있는 언데드들은 건재했다. 하지만 엘릴의 등장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투할린이 명령하지 않았다면 다들 제멋대로 엘릴 기사들을 따라갔을 기세였다.
엘릴의 말마따나 병사들 모두가 제 몫을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투할린은 아이작이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꾸득, 꾸드드득.
불사 황제는 몰아닥치는 백골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몸집을 부풀리는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이작이 품은 불길한 짐승의 씨앗을 경계하긴 했지만, 인간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선의와 마음을 귀하게 여겼다. 때문에 잘 다독여 품는다면 어떤 명천사보다도 훌륭한 천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작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바로 저 난폭한 식욕이었다.
뭐든지 먹어 치우고 뭐든지 흡수하여 제 양분으로 삼아 버리는 식욕.
무엇이건 저 욕망의 아가리에 빨려 들어가면 원형을 갖추지 못하고 아이작의 것이 되어 버린다.
아이작은 종말의 작은 현신이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리며 어떤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불사 황제는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 나와 힘겨루기라도 하겠다는 생각인가?”
불사 황제는 양손을 펼쳐 흔들었다.
드득, 드드득. 불사 황제의 손짓에 호응하듯 대기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희뿌연 하늘의 구름이 터져나가면서, 거대한 구체가 아이작을 향해 직격으로 낙하를 시작했다.
끼아아아아아─
두개골이 퍼석퍼석 깨져나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구체는 망령으로 이루어진 원한의 결집체였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죽은 세계, 더 이상 탄생이라곤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육신을 갖지 못한 채 결핍과 갈증에만 시달리던 원혼들은 악밖에 남지 않은 악령이 되어 있었다.
악령들은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새겨진 모든 저주와 욕설, 구걸, 호소, 원한의 단어들을 아이작에게 쏟아냈다.
네가 죽였어! 네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이런 건 내가 원한 불사가 아니야! 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 어머니, 만신의 어머니! 내게 육신을 주세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오리라! 살아 있고 싶어!
수백억, 어쩌면 수천억에 달할지도 모르는 악령들이 아이작을 향해 일제히 저주의 말을 쏟아부었다. 일반인은 뇌가 끓어올라 터져 버리고, 천사조차 미쳐 버리기 충분한 압력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에게 그런 정신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이름 없는 혼돈에 의해 ‘객관화’된 아이작에게는 그 모든 저주가 수천 줄의 욕설이 채팅창을 지나가는 수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일일이 눈여겨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정신 공격에 면역인 것과 별개로, 무수한 원령들은 마치 추락하는 달처럼 덩어리져 아이작을 덮쳤다. 악령들은 외골격마저 뚫고 아이작의 육체를 향해 굶주린 귀신처럼 달려들었다.
육신을 내놔! 내게 살아 있는 느낌을 줘!
“그래.”
아이작은 달려드는 악령들을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다음 순간, 외골격 안으로 빨려 들어간 악령들이 일제히 쑥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불사 황제는 있을 수 없는 일에 생각을 멈췄다.
‘악령들이 아이작의 육신을 차지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달만큼이나 거대했던 악령들의 무리는 아이작에게 부딪치자 마치 베어 문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불사 황제는 무슨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 다시 손을 휘저었다.
천상의 배를 갈랐던 그의 그림자 칼이 다시 움직였다. 불사 황제의 칼은 마치 정교한 수술을 행하는 집도의처럼 날카롭게 아이작의 외골격을 베었다.
콰득, 콰드드득! 문어 같은 꼴로 응축되어 있던 외골격이 부서지면서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마치 좁은 씨앗에 갇혀 있던 식물이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묘목이 되었다가 거대한 고목이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이 싹틀 수 없는 땅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수천 가닥의 팔을 크게 벌렸다. 악령들이 그 촉수 사이사이로 넘나들었지만, 마치 산들바람인 양 느긋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자세로, 아이작은 수천 개의 눈을 떠 불사 황제를 응시했다.
불사 황제는 저 불경한 형태의 짐승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기도하는 백목…….”
***
외경 너머, 우르반수스에서도 이름 없는 혼돈의 영역에 끝도 없이 늘어선 불길한 숲이 있다.
이름 없는 혼돈에게 경배를 바치다 그대로 나무와 같은 형태가 되어 버린 ‘기도하는 백목’이 모여 숲을 이룬 것이다. 그 숲 사이로 불경한 괴물들과 정돈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이 배회했다.
진짜 나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른 살점과 체액, 그리고 인간의 신체 부위들이 두서없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아이작은 일반적인 기도하는 백목의 크기를 아득하게 상회하는 크기로 육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불사 교단의 신도들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그리고 지금도 커지고 있었다.
불사 황제는 기도하는 백목에 망울지는 열매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열매들은 아이작 만큼이나 빠르게 부풀어 오르다가, 이내 제 발톱으로 열매를 찢으며 태어났다.
마치 스스로 배를 찢어 태어난 아기들처럼.
그리고 그 형태에 불사 황제는 또 한번 경악했다.
열매 속에서 ‘태어난’ 것들은 말미잘에 박쥐 날개가 달린 나이트 스토커였다. 이름 없는 혼돈의 대표적인 권속.
아이작은 불사 황제의 신도들을 양분 삼아 육신을 만들고, 불사 황제의 신도들의 영혼을 이용해 혼돈의 권속 안에 집어넣은 것이다.
메에에에에─!
첫 번째로 태어난 권속이 마치 어린 양 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 저주와 원한 따위는 씻겨지고 사라진 순수한 혼돈의 원형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수천 개의 열매들이 찢어지고 사방에서 체액이 흘러내렸다.
기는 것, 나는 것, 뛰는 것, 매달리는 것…….
마치 어린아이가 서툰 솜씨로 대충 이어 붙인 찰흙 인형처럼 태어나는 육신들에는 규칙이 없고 어설픈 형태로 비틀거렸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은 탄생만으로 기쁜 듯 너풀거리며 아이작을 경배하듯 주변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백골들이 밀어닥치는 것은 그에게 양분을 더해 줄 뿐이고, 악령들은 그가 열매를 틔우기 위한 꽃술의 수분일 뿐이다.
불사 황제는 대놓고 말도 안 되는 권능으로 포식하는 아이작을 보며 경악했다.
“미쳤어, 네 놈이 미쳤구나!”
불사 황제는 결국 아이작에 대한 분노를 토해 냈다.
드디어 아이작이 본색을 드러냈다고, 그가 세상에 종말을 불러오기 위해 아름다운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악의 화신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가지 사이사이에 돋아난 수천 개의 입술을 통해 속삭였다.
[나는 네 신도들에게 네가 주지 못한 생명을 줄 수 있다. 반면 너는 거기 가만히 서 있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지?]“이건 생명이 아니야! 이건 모독이다! 인간이 괴물이나 짐승으로 격하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쩍.
불사 황제의 노성이 울려 퍼진 순간, 세상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사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만들어 낸 심상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사 황제가 문제를 깨닫기 전에 아이작이 먼저 말했다.
[지금 스스로를 부정했군.]그것은 불사 황제의 격이 붕괴하는 소리였다.
아이작의 퍼즐이 다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