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29)
429화. 아름다운 가죽 아래 (4)
불사 황제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면서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신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성을 사랑하는 것이지, 짐승이나 노예처럼 사는 것까지 찬성하진 않는다.
물론 노예가 있긴 하지만 살점을 가지고 있을 때뿐, 시간이 지나 ‘온전한 몸’이 되면 개종할 기회가 주어진다.
바르바리나 게르토니아 제국의 농노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이작은 그런 불사 황제의 상냥한 부분이 약점이라고 보았다.
[나는 너의 인간성을 믿었다. 네가 이런 형태를 부정하고 화낼 거라고 확신했지.]“네놈……!”
불사 황제는 실시간으로 허물어지는 자신의 세계를 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신격이 붕괴하고 있었다.
아이작조차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품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도 아닌 불사 황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많은 신들의 종말을 보았다.
신앙은 생각보다 쉽게 소멸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신격들이 종말을 맞이했던가.
그리고 지금 불사 황제는 스스로의 규칙을 부정하는 발언을 ‘진심’으로 했다.
지나가는 말이나 농담 정도였다면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이다. 신격의 붕괴가 일어났다는 것은, 불사 황제 스스로의 가치와 세계관이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불사의 신이지 인간의 신이 아니다.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불사 황제를 허물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의 인간성이 그의 신격을 무너뜨린 것이다.
‘안돼.’
불사 황제는 빠르게 생각을 멈췄다.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하거나 절망할수록 붕괴는 빠르게 가속할 뿐이다. 이미 신격이 무너진 이상, 몰락은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빠르게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저 부정한 짐승이 세상에 풀려나는 것을 막는 것.
짐승을 상대하기 위해 불사 황제는 신격을 포기했다. 그는 신이 아니라 야수를 사냥하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
여명군 본대가 전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 살아남은 사제들과 그을린 자들, 유리 눈알을 가진 광신도 중의 광신도들은 불사 황제가 하늘의 배를 째건 말건 흔들리지 않고 언데드를 쳐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성지 루아의 성벽이 무너지자마자, 불타는 처녀의 명령을 따라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을린 자들은 구멍 뚫린 성벽을 뛰어넘었다. 불타는 처녀에 의해 녹아내리다시피 한 성벽은 아직 뜨거웠지만 이미 천국의 열기에 불타 버린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섭리를 거부하는 괴물들아,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천년 왕국의 문이 열린다!”
그을린 자 하나가 포효하며 언데드 광신도에게 달려들었다.
콰드득! 그을린 자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칼은 손쉽게 광신도의 갈비뼈를 박살 내고 거의 두 쪽 냈다. 하지만 언데드 광신도는 웃음을 터뜨리며 네 개의 팔로 그을린 자를 후려갈겼다.
[눈먼 거지들이 구걸하러 멀리도 왔구나! 우샤크에 동냥할 자리를 만들어 주마!]여명군 병사 대부분이 빈곤층이라는 점을 지적한 고급스러운 비아냥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그런 속세의 가치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을린 자는 얻어맞으면서도 밀어붙여 언데드 광신도의 척추를 부러뜨렸다.
언데드들은 준비한 대로 조직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천사의 개입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열풍이 밀집한 언데드 군세를 단숨에 불태워 버렸다. 불타는 처녀가 성지 루아 안으로 들어서며 거침없는 숙청을 시작했다.
[이교도들을 불태워라!]온 사방이 이교도요, 불타지 않는 것은 오로지 축복으로서 입증된 진정한 신도들뿐이니 불타는 처녀의 공격에는 거침이 없었다.
말 그대로 불로써 이교도와 진정한 신도를 가려내는 현장이었다.
불타는 처녀가 만들어 낸 구멍은 하나가 아니었다. 엘릴 기사들은 다른 곳으로 들어갔고, 투할린이 이끄는 이사크레아 여명군 역시 각자 다른 구멍으로 들어갔다.
엘릴 기사들도 내심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고, 빛의 법전 광신도들과 어울리다가 함께 불타 죽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도 이단심문관들과의 마찰 때문이다.
엘릴 왕국이 게르토니아 제국과 교류를 끊은 것도 명천사 재투성이가 생전에 이단심문관들에게 화형당하면서 생긴 일이었으니, 저 광신도 족속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 좋다.
쿵! 콰득, 투할린은 언데드 병사들을 거침없이 박살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래도 엘릴과 빛의 법전 쪽 천사들이 더 위협적인 적이라 그런 것인지, 그가 있는 쪽에는 언데드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거, 괜찮은 건가?’
원래 아이작은 여명군 본대가 성지 루아를 점령하기 전에 먼저 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좀 미심쩍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가능하기나 한 계획이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어쨌든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물 건너간 듯했다.
성벽은 이미 무너졌고, 불사 교단은 명백히 패퇴하고 있었다. 불사 황제가 나선다면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째선지 침묵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성지 루아를 빛의 법전이 차지하느냐, 엘릴이 차지하느냐가 관건인데.’
투할린은 백제국 간의 해묵은 갈등을 떠올렸다.
불사 교단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빛의 법전 신도를 가장 많이 죽인 신앙은 엘릴이었다. 엘릴이 성지 루아를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엘릴은 천년 왕국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부터가 ‘패왕’인 이상 영토 욕심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불사 교단을 쳐 죽인 다음에는 빛의 법전더러 ‘다음 상대는 너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리고 투할린은 무엇이 성지 루아의 주인을 정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 깃발이라도 꽂아야 하는 건가? 아니면 불사 황제의 목을 취하는 자가 승리자가 되는 건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어디 금고 열쇠라도 있나?’
[투할린.]그때 투할린은 심장 속에서 크게 요동치는 듯한 천둥 장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천둥 장인이 직접 목소리를 내서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투할린은 전투를 멈추고 경건한 태도로 명천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둥 장인이시여, 부르셨나이까?”
[‘미스틸티르’가 근처에 있다. 그것을 회수해야 한다.]투할린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천둥 장인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미스틸티르. 그것은 스반바르 군도 지하, 대화로 속에 잠들어 있다는 ‘진정한 빛의 법전’을 깨우기 위한 신성한 소재였다.
‘세상의 용광로 신도라면 격변하는 시대의 현장을 쫓아야 한다는 아이작의 조언은 진실로 세상의 용광로를 위한 것이었군!’
투할린은 내심 감탄하며 서둘러 천둥 장인에게 물었다.
“그게 어디 있습니까?”
천둥 장인은 대답 대신 직감으로 드러냈다. 투할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성지 루아의 중심으로 시선을 향했다.
거대한 피라미드. 어쩐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피라미드로 가야 한다고, 심장이 소리치고 있었다.
***
로튼해머는 굉음과 함께 돔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돔은 이제 곳곳에 뚫린 구멍이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고, 천사들의 난입과 전투의 여파로 더 큰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레오노라.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소?”
로튼해머가 답답한 듯 물었다.
그들은 이미 성지 루아 중심의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선 상태였다.
길고 복잡한 복도는 또다시 용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미 쉬지 않고 싸워온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언데드와 어둠으로 지친 상태였다.
레오노라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젤라가 집중하고 있잖아요? 조용히 하세요.”
“으음.”
로튼해머는 불안한 눈으로 앞장서 걷는 안젤라를 응시했다. 원래 안젤라는 보호를 위해 성기사단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부터인지 레오노라가 교묘한 언변으로 성기사들을 하나하나 구워삶더니, 자연스럽게 안젤라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있었다.
레오노라는 이미 아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덕분에 이동속도가 훨씬 빨라지긴 했지만, 아이작의 명령을 기억하는 로튼해머는 그녀를 불안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다스의 손을 회수하여 파괴하거나 빼돌릴 것.’
로튼해머는 아직도 그 ‘미다스의 손’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이 은밀하게 부탁한 이상 레오노라를 염두에 둔 명령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다스의 손을 찾아낸 순간 레오노라와 충돌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용병은 열여섯, 샬록이라는 자 외에는 그다지 수준 높아 보이진 않지만…….’
로튼해머와 성기사단에 상대가 될 전력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안젤라를 인질로 잡을 가능성에 대비해 로튼해머는 게벨을 일부러 안젤라의 곁에 붙여 두었다.
상대를 경계하는 것은 레오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금은보화를 옆에 끼고 사는 상인은 배신과 살의에 민감하다. 군대처럼 비효율적인 병력을 상시로 거느리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황금우상 상단은, 때문에 늘 비대칭 전력을 갖추는 데 능숙했다.
그리고 가장 가성비 좋은 비대칭 전력은 정보다.
레오노라는 문득 안젤라가 갑자기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걷다가 멈춰서길 반복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레오노라의 어떤 직감이 요동쳤다.
안젤라의 ‘가치’가 급격하게 요동친 것이다.
레오노라는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직감이 있다. 단순히 안젤라의 값어치가 뛰었다면 그녀가 뭔가 가치 있는 성물을 찾았거나, 어떤 기적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다스의 손을 얻었다고 찾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면 미다스의 손에는 값을 매길 수 없으니까.
‘이건…….’
그리고 지금, 안젤라의 값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나라를 살 수 있을 만큼의 황금 물결로 보이는가 하면, 거지의 빈 그릇을 간신히 메울 동화 몇 닢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가치가 쉬지 않고 뒤바뀌고 섞이면서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가치가 격변하는 무언가. 미다스의 손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안젤라, 뭐가 보이니?”
레오노라는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안젤라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레오노라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게 뭐지?’
안젤라의 얼굴은 거대한 공허였다.
그 무엇도 아니며, 모든 것이기도 했다.
레오노라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으려 했지만, 오히려 안젤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텅 빈 공허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배신할 줄 알았습니다. 레오노라.”
불사 황제의 목소리였다.
레오노라는 불사 황제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미다스의 손에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레오노라, 무슨 일이오!”
로튼해머가 급히 앞으로 나서고 게벨이 칼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갑자기 기괴하게 변한 안젤라를 보고 숨을 들이키는 것 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젤라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레오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가치만을 좇는 사람이지요. 사람에게 값을 매기고, 값이 안 맞다면 손실처리를 할 수 있는 사람. 저는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거 놔!”
불사 황제의 전언을 전하는 악령이 들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가치가 격변하는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안젤라가 공허한 얼굴을 길쭉하게 찢으며 중얼거렸다.
“미다스의 손은 사실 형태가 없습니다.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람이 이 피라미드에서 소원을 빌면 사람의 그 육신이 미다스의 손이 되지요. 아득한 옛날에는 시장통의 원숭이였고, 가장 최근에는 미다스라는 어떤 남자, 그리고 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녀, 안젤라였군요.”
불사 황제는 마치 사용 설명서라도 알려 주는 듯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더더욱 미다스의 손을 넘겨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재앙을 감당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자유롭게 소원을 비십시오.”
악령이 빠져나간 순간, 공허는 완전히 안젤라를 집어삼켰다.
그 공허 속에는 오로지 작은 손만이 남았다. 그 손은 레오노라의 손을 으스러지라 움켜쥐고 있었다.
소원을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레오노라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당장 이 짓거리를 그만둬!”
그리고 이루어졌다.
…. (계속)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