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7)
47화. 등대를 밝히는 자 (3)
유크하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목상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아이작은 그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유크하르가 양치기 목상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반투명한 무언가가 유크하르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돼지 같은 모습이었으나 워낙 이것저것 뒤섞인 외형이어서 정확히 알기는 힘들었다.
“이름이 뭐냐?”
[아직 이 인간도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만…… 너, 천사와 인간의 부정한 교합으로 이루어진 잡종이라면 내 이름을 들어도 감당할 수 있겠지.]반투명한 돼지는 몸을 꿈틀거리며 이름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겠지. 수수께끼를 내마.]“수수께끼?”
[그래…… 나는 차가운 태양이며…….]“재물신 골루와루.”
[…….]골루와루는 당황한 듯 말을 잃었다.
아이작은 돼지의 외형을 본 순간 이미 알아차렸다. 게임 속에서 골루와루는 정해진 장소 없이 등장하는 이벤트성 몬스터였다. 뜬금없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레벨에 맞지 않는 몬스터들을 쏟아부어 플레이어를 죽이곤 했다.
설정상으로는 탐욕스러운 자의 냄새를 맡고 쫓아가 죽여 빼앗는 거라던가.
어쨌든 돼지 외형에 수수께끼를 내는 고대신은 골루와루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크하르가 끌어낼 만한 고대신도 그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냐, 잡종아? 이제 내 이름도 다 잊혔을 텐데.]“아무도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를 내려고 했던 거냐? 정신 나간 놈이군.”
아이작은 고대신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성역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익숙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흥분하고 있었던 것도 성역 때문만이 아니라, 고대신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힐렛의 신성을 씹어 삼킨 후 이름 없는 혼돈은 다른 신성에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들을 보았을 때 이곳은 원래 황금우상의 성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크하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장소를 타락시킨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할 생각이었지? 아니, 사실 관심 없어. 그냥 죽어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공격하기 위해 촉수를 뽑았다. 그리고 배수로 구멍 속에 숨어서 기습을 준비하던 지힐렛에게 공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아이작도 함께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암습을 당한 골루와루는 어느 쪽도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대비할 능력이 없었다.
아이작의 촉수가 유크하르의 가슴을 꿰뚫고, 지힐렛이 목을 물어뜯었다. 목숨을 앗아 가기에 충분한 치명상을 두 군데나 입은 유크하르는 단숨에 절명했다.
“성질이 급하군. 잡종 성기사.”
그때 목이 부러진 유크하르가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유크하르의 목소리긴 했지만 아이작은 그 본질이 골루와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골루와루는 반투명한 모습을 한 채 유크하르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촉수를 회수했다.
“너는 강력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 양쪽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지. 나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골루와루를 반이라도 살아 있게 만들어 놓는 매개가 유크하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양치기 목상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강한 성물이 아니니까.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기사.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아.”
“그럼 자살해 주게?”
“……나는 탐욕과 금은보화의 신이다. 성기사, 나와 거래하자.”
골루와루는 탐욕신, 혹은 재물신으로 불리며 황금우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인들 사이에서 숭배받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황금우상이 형태야 어쨌든 남과 손을 잡는 거래와 시장, 금융을 상징한다면, 골루와루는 그저 홀로 모으기만 하는, 독점을 추구하는 탐욕 그 자체였다.
“사악한 고대신이 성기사한테 거래를 제안하는 거냐?”
“네가 모시는 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등대지기의 하수인은 아니군. 그러면 상관없지 않나? 나는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니까.”
골루와루는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탐욕이 느껴진다, 성기사. 사람들의 인정을 원하나? 그 손에 승리를 움켜쥐고 싶나?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신을 네 아군으로 삼는다면 든든할 텐데?”
아이작은 재밌다고 느꼈다.
확실히 보수적인 빛의 법전이라면 모를까, 다른 신앙들도 자신들의 교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거래 자체를 배교 행위로 보지는 않았다.
“무슨 거래?”
아이작은 골루와루가 무엇을 제안할지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았다.
역시나 골루와루는 예상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황금우상의 신이 되도록 도와다오.”
***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황금우상 신도들을 가호하는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우연과 행운, 예감 속에서 유크하르도 그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 분명한 신적 존재로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신을 원했다.
다른 신앙들처럼 기도에 답해주고 기적을 베풀어 인도해 줄 사제와 다른 신의 신봉자로부터 지켜 줄 칼을 든 성기사를 원했다.
그래서 유크하르는 양치기 목상과 재물신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자신이 황금우상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크하르는 관념적인 신에게 인격을 씌우고자 한 거지.”
“인격?”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감동하고, 분노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인격신 말이다. 엘릴이나 붉은 성배, 불사 황제가 그러하듯. 유크하르는 자기가 황금우상의 인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용해서.”
골루와루는 즐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놈은 나를 부활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빌렸지. 아마 불사 황제의 권속들의 힘을 빌린 것 같더군.”
‘또? 하긴, 고대신이 얽힌 시점부터 또 그놈들일 줄 알았지.’
하기야, 불사 교단 말고 또 어디서 손을 빌릴 수 있을까?
쇠르는 백제국 변방에 위치한 무역 거점 도시다.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일도, 외국의 정체불명 물자가 들어오는 일도 흔하다.
유크하르는 지힐렛이 그랬던 것처럼 왈라이카 사냥꾼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고용한 셈이 되었지만.
“그리고 나의 부활을 위해…… 쇠르에 욕심의 불길을 지폈지. 나도 도와줬고. 양치기 목상의 위치와 때마침 유행 조짐이 보이던 로어커스를 활용한 투기 전략 등을 알려주었다. 아, 돈이라는 것은 모으면 모을수록 정말 즐거워지지.”
아이작은 골루와루의 전략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고대신들이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도도 없고,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쇠르의 욕심쟁이들을 시작으로 황금우상 신도들을 홀라당 먹어 버릴 전략을 세운 것이다.
황금우상 신도들은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로어커스 폭등에 매달릴 테고, 그 탐욕은 골루와루의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골루와루는 결국 부활하지 못하잖아?’
게임에서 골루와루를 이벤트 몬스터로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지힐렛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중간보스 수준이다. 결코 신앙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기껏 해봐야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 정도.
결국 골루와루의 전략이 실패하기는 한다는 건데, 그게 어떤 시점에 왜 일어나는지는 아이작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빈약한 인간은 내 몸으로 삼기에 너무 나약하고 늙었다. 그리고 너한테 정체를 들키자마자 나한테 달려와서 헐레벌떡 방법을 달라고 애원했지.”
골루와루는 코웃음 치며 유크하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원하는 게 내 몸이냐?”
“그러면 가장 좋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겠지?”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몸 너머에서 두 눈동자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건강하고 어린, 심지어 천사와의 혼혈이라 신성까지 품고 있는 성기사라니. 숙주로 삼기에는 최상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서투른 욕심으로 가진 것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욕심으로 차근차근 무너뜨리다가 삼키는 것에 능했다.
유크하르를 무너뜨렸을 때처럼.
“뭐, 어때.”
하지만 아이작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을 벌리고 다가온 것이다. 골루와루는 당황해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몸을 주겠다고?”
“정체 모를 촉수 괴물보다는 말도 통하고 전략적인 고대신이 낫지. 그리고 황금우상 상단을 집어삼켜 신이 되겠다며? 그러면 단숨에 내 세력도 생기는 셈이군.”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의 터무니 없는 비교에 분개합니다.]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정말 괜찮다는 듯 유크하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자신을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이미 쇠르의 탐욕을 통해 힘을 얻고 있었고, 완전히 육신을 가지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그 탐욕이 유지되는 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이 빙의하자마자 자기 자신을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골루와루는 아이작 안의 거대한 욕심을 읽었다.
놈은 자신을 정말로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크하르한테 그랬던 것처럼.
골루와루는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아이작을 향해 덮치듯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그 욕심이 마음에 드는구나! 좋아, 우리는 좋은 조합이 될 거다! 세상을 집어삼켜 보자꾸나!”
유크하르의 몸이 으스러지면서,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육체가 아이작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작은 팔을 한껏 벌리고 골루와루의 침입을 받아들였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의 몸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짙은 신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을 느꼈다.
***
‘뭐지? 이게 대체 뭐지?’
골루와루는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공허를 맞닥뜨리고 당황했다.
죽은 신이라 해도 신성을 가진 신. 영혼의 격과 크기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골루와루는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피라미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이게 대체?’
골루와루는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재물신에게는 지식 또한 재물이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탐구하는 것 역시 좋아했다. 새로운 경험을 낯설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어둠, 이 공간은 달랐다. 골루와루는 이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안다는 사실에, 알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자신의 존재감만큼이나 나약했다.
하지만 그 비명을 듣고 누군가 깨어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어둠 너머에서, 그 어둠만큼이나 거대한, 하지만 수천, 수백 개에 이르는 눈동자들이 집요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뒤늦게 시커먼 어둠 속을 표류하는 어떤 존재를 발견했다.
그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역병신 지힐렛. 표류하는 신의 사체였다. 이내 그것을 다진 고기처럼 박살 내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기어 올라왔다.
골루와루는 깨닫기도 전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아아아아아아아!”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덮치고 다시 튕겨져 나가기까지는 3초도 안 되는 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아이작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유크하르의 몸으로 돌아온 골루와루는 산채로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고 기어가며 도망치려 애썼다.
“윽.”
콰드드드득!
아이작도 멀쩡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광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작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원래는 왼쪽 손바닥에만 나타나던 촉수가 온몸을 째며 튀어나왔다.
아이작은 삽시간에 온몸이 촉수로 넘실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여전히 분노한 듯 유크하르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마치 말 안 듣는 개를 패기라도 하듯 몇 번이나 때리고 다그치고서야 촉수가 하나둘 씨근거리며 몸 안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의도한 일이긴 했지만 과한 반응에 아이작이 당황할 정도였다.
마침내 촉수들이 다 들어가고서야 이름 없는 혼돈이 경고하듯 메시지를 날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은 자신의 소유임을 강하게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