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48)
48화. 등대를 밝히는 자 (4)
“그래, 그래.”
아이작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이 캐릭터를 만들 때 이름 없는 혼돈을 골랐으니 그 업보도 감당해야 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니 죽일 수 없다던 골루와루는 예상대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대로 안에서 잡아먹히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나온 걸 보니, 쇠르에서 벌인 일이 나름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오줌을 지린 흔적과, 엉망이 된 몸과 영혼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도망친 듯한 흔적이었다.
“그러게 감당할 수 없는 걸 먹으려고 하니까 탈이 나지.”
아이작은 그 흔적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
“살…… 살려……!”
골루와루는 고통스러운 몸을 뒤틀며 계단 위를 올라갔다. 아이작의 몸에서 도망치기 위해 골루와루는 제 영혼의 대부분을 떼어 놓고 도망쳐야 했다. 그의 영혼의 격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그나마의 생명력도 보존하기 위해 유크하르의 몸에 전력으로 기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크하르의 몸 역시도 다 죽어 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체나 다름없는 꼴로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은, 그동안 쇠르에서 끌어모은 탐욕의 기운 덕분이었다.
실낱같은 신성이 탐욕을 끌어모아 그의 목숨을 붙여 놓고 있었다.
‘살려줘!’
골루와루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권세가 황금우상에게 서서히 잡아먹힐 때에도, 그를 토벌하기 위해 엘릴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신성을 가지고 있는 한 다시 부활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의 안에서 본 그것.
그것은 달랐다. 그것은 골루와루의 몸을 무참히 자르고 찢으며 씹어먹었다. 신성조차도 간식거리라도 되는 듯 이빨 아래 뭉개졌다.
“꺄아아아악!”
어디선가 그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왔다.
골루와루는 마침내 자신이 배수로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로어커스 향이 가득한 시장 한복판이었다.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이 시체나 다름없는 유크하르가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는 꼴을 보며 경악했다.
제정신으로 판단하긴 힘들었지만, 골루와루는 잘하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잡종 성기사, 아이작이라는 자는 어째선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밝은 곳에선 그 촉수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살, 살려…….”
골루와루가 힘겹게 말을 꺼내자 그제야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민 몇이 다가갔다. 그들은 유크하르의 육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돕기 위해 상태를 살피고, 몇몇은 사제를 부르거나 붕대를 구하러 뛰어갔다.
그 순간 골루와루의 눈이 번뜩였다.
[오라!]골루와루의 발악 같은 외침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골루와루는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 짜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곧 자신을 쫓아올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골루와루는 양치기 목상을 높게 들어 올리며 그들의 욕망과 탐욕에 속삭였다.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기사가 나타났다! 탐욕의 성전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사가!]양치기 목상에는 특정한 감정을 부추기는 힘이 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골루와루는 그들의 욕망에 호소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기억 속에 있는 사실과 정황들을 모조리 털어 냈다.
로어커스 폭등과 조종당한 권력자와 큰손들, 이를 위해 이용당한 사람들까지.
자백이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인간의 욕심을 믿었다.
이제 로어커스 유행은 쇠르뿐만 아니라 제국의 중심부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탐욕의 불길이 대륙을 불태우면 너희들은 태산만큼 많은 돈을 쥐게 될 것이다.
골루와루의 달콤한 속삭임은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밀어 넣었다.
지금 다가오는 성기사는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온 괴물이다.
너희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직업을 잃게 만들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을 것인가? 보릿고개를 버틸 식량을 팔아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가 지금 쥐고 있는 그 황금빛 미래를 시궁창에 박을 것이냐!
[나를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너희는 나와 함께 파멸한다!]오직 한 사람.
한 사람만 이곳에서 묻어 버린다면 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상인들은 골루와루가 쥐어 짜낸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도 직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들은 속았다.
속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속지 않으면 그들은 파산한다.
앞으로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려면 성기사가 죽어야 했다.
그들은 광기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곳에 성기사가 있었다.
***
아이작은 시장을 가득 메운 상인들과, 그들 사이에 숨어 허겁지겁 몸을 빼려는 유크하르를 보았다. 그는 미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마 이 많은 민간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비록 괴물의 본성을 숨기고 있을지 몰라도, 위선을 부리는 한 본색을 드러낼 순 없겠지!’
골루와루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골루와루가 아이작이 괴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릴 수는 없었다. 믿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아이작이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하고 괴물이 되어 버리면 그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저지하려면 그의 사회적 체면을 이용해야 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장 상인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상인들은 그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띤 채 어디선가 주워 온 무기들을 하나둘 꼬나쥐고 있었다. 그들 자신도 이걸 들고 어쩌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중의식은 무서운 법이다.
이들 중 한두 명만 아이작에게 달려든다면 책임은 사라지고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눈감게 될 것이다.
아이작은 일단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헤사벨 굴마르였다.
도망친 줄 알았던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골루와루의 군중 통제에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에게 미련이 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헤사벨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다시 시장 상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전에 시장은 만민이 부족함을 나누는 곳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이작은 딱히 연설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다지 말재주가 좋지 못한 것도 있고.
하지만 연출을 위해서는 적당한 대사가 필요했다.
아이작은 적당히 성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고 담담한 꾸짖음과 함께, 아이작은 처음 시험 삼아 사용해 본 이후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궁극기: 파수자의 등대’를 사용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머리 위로 둥근 후광이 비추며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시장을 가득 뒤덮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상인 비히크는 시장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시장 한쪽에 갑자기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였다.
성기사를 죽여라!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머릿속에 완벽한 내적 논리가 잘 짜여 있는 의지였다. 비히크는 그 충동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먼저 느꼈지만, 그보다 이후 자신에게 찾아올 파산의 공포가 더 강력했다.
로어커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 빚과 용병들에게 낸 대금, 자릿세, 마차 대여금…… 다른 거부감과 두려움은 시장에 있는 모두가 나눠 가지고 있었지만, 파산의 공포는 오로지 그 혼자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를 죽여라!
비히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상인이 팔던 식칼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걸 왜 쥐고 있는지, 이걸로 뭘 할 생각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혼란에 휩싸인 와중, 갑작스러운 빛이 그를 덮쳤다.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은 꾸짖음과 함께 강렬한 빛줄기가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빛과 어둠, 바른 것과 그른 것, 진실과 거짓, 모든 것이 분리되고 명암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비히크의 머릿속도 맑아졌다.
땡그랑.
그의 손에서 식칼이 떨어졌다.
‘내가 무슨……?’
비히크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상황을 명료하게 알아차렸다. 외면하기에는 성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군중의 반응을 보면서 파수자의 등대 효과를 명확히 확인했다.
파수자의 등대.
게임상에서는 강력한 방어 스킬이자 오러 능력으로 표현된다.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면,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준다는 양 온갖 거창한 표현을 다 동원해 서술해 놓았다.
그러나 누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정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아이작은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고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등대의 빛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작이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순간, ‘빛의 법전’의 규칙이 후광의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뒤덮었다. 황금 우상의 기적도, 골루와루가 흩뿌렸던 선동과 탐욕의 속삭임도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대충 광역 디스펠 정도의 효과로군.’
빛의 법전은 빛과 열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반 물리 법칙의 신이기도 하다. 파수자의 등대로 시전된 후광 속에서는 모든 기적, 마법, 허구와 기만은 사라지고 아이작이 고른 ‘정상’의 세계만이 남았다.
여기서는 어떤 신앙의 기적도 존재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범위가 빛의 법전의 성역,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이러니 파수자의 등대가 강력한 방어 오러 스킬 정도로 표현되지.’
그 어떤 신앙의 성기사나 사제도 파수자의 등대 안에서는 빛의 법전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것으로 파수자의 등대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작이 희망하는 바에 따라 등대의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다.
즉, 아이작은 지금 이 성역을 황금 우상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붉은 성배의 것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해당 신앙에 대한 이해도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칼센은 불사 교단의 성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이작은 처음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름 없는 혼돈’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꿨었다.
그때 이후로 아이작은 두 번 다시 파수자의 등대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파수자의 등대를 꺼뜨렸다.
마치 태양빛이 사라지듯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후광이 붉은 노을처럼 사라졌다.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시간은 몇 초 안 될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골루와루가 퍼뜨린 욕심과 선동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놈이 그동안 상인들에게 퍼뜨렸던 로어커스 폭등을 위한 욕심마저도 완전히 걷어 낸 상태였다.
남은 것은 강렬한 현실 자각뿐이었다.
그들에겐 분노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다가올 차가운 미래를 깨달았을 뿐.
상인들은 서서히 무너지듯 아이작 앞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감히 아이작에게 어쩔 생각조차 품을 수 없었다. 애초에 골루와루의 선동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아이작은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가라.”
상인들은 힘없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가서 가족들과 인사하고 그들을 안아주거라.”
아이작은 상인들 사이를 지나 골루와루를 찾아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