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1)
51화. 껍질 (1)
캐틀린은 방금 죽을상을 하고 있던 사람이란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작에게 거액을 지불했다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지만, 그게 즉각 현금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빚으로 남게 된다면 당장의 파산은 막을 수 있으니까.
특히나 로어커스 폭락으로 상당량의 현금을 잃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한 푼 한 푼이 절실했다.
일단 상부로부터 빌린 황금을 고스란히 다시 돌려줄 수 있을 테니, 그녀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럼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자는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황금우상 상단 내부에서 신용도와 액수에 따른 이자액을 별도로 산정해두고 있을 텐데. 거기에 맞춰서 조건을 우선 제시해보게. 어차피 나는 황금우상 상단의 자산을 이용하는데 관심이 더 있으니.”
“알겠습니다! 경리를 시켜 바로 정리해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캐틀린이 서둘러 관련 내용을 정리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이제 궁핍하게 여행하는 것도 못 해 먹겠단 말이지.’
수도원을 떠난 이후의 여정은 말 그대로 서바이벌 그 자체였다.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아무 데서나 자고, 촉수로 아무거나 먹고, 적당히 힘이나 키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것도 슬슬 익숙해지긴 했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고생이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작은 우선 황금우상 상단과 접촉해 빚을 만들어 두기로 했다.
‘로어커스 때문에 일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리긴 했지만…….’
이번 사건의 여파로 여명군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해지겠지만, 아이작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여명군도 벌써 12번이나 일어났다. 성지가 불사 교단 수중에 있는 한 여명군은 언제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아, 그리고 그쪽에 선물할 게 있는데.”
“선물이요? 이미 거액을 맡겨주신 것만으로도…….”
“속으로는 사실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어쨌든 그쪽 물건이니 그쪽이 갖는 게 맞을 것 같군.”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져온 상자를 캐틀린 앞에서 열었다. 안에는 초라한 모습의 양치기 목상이 담겨 있었다. 캐틀린은 잠시 그게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거, 성물입니까?”
“그래.”
황금우상 상단의 기원은 한 유목민족이었다고 한다. 떠돌던 중 한 양치기 소년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소가 험난한 산맥을 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길을 따라간 양치기 소년은 아무도 넘지 못했던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이후 한 달씩 걸려 돌아가던 산맥의 길목을 이 민족이 독점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세계의 무역 루트를 열었고, 황금우상 상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양치기 목상은 바로 그 길목을 발견한 소년이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깎았다는 물건이었다.
‘황금뿔이나 미다스의 손, 호박 눈 같은 S급 성물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양치기 목상 정도면 그래도 A급 정도는 되는 성물이다.
캐틀린은 조심스러운 손으로 양치기 목상을 쓰다듬었다.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에 사제도 성기사도 없다고 했지만, 사실 상인들 본인이 신도인 동시에 사제이다. 지부장급에 이른 상인이라면 남다른 감식안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캐틀린은 한눈에 양치기 목상이 진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귀한 성물이 상단에 반납된 것을 본 캐틀린은 기절할 듯 기뻐했다. 한순간이지만 성배기사가 기막힌 속임수로 자신을 속여넘겼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사실은 오드리프 본점에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캐틀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이 하나의 선언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작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황금우상 상단에 ‘양치기 목상’ 성물을 반납하였습니다.] [황금우상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크게 상승합니다.] [감식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역시.’
성배기사는 성물을 취득하는 것만으로도 버프를 얻을 수 있지만, 성물을 잃어버리면 즉시 버프를 잃는다. 하지만 성물을 반납한다면 작지만 영구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가진 성물 전부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다닐 수 없다면 반납할 물건은 반납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쪽이 좋았다. 특히나 양치기 목상은 직접 전투에 도움도 안 되고 부피도 커서 짊어지고 다니기 번거로워서 반납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작은 캐틀린이 사용하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재질에 장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는 장식까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정보까지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감식 능력이 향상된 덕분이었다.
‘행운은 그렇다 쳐도 감식 능력까지 상승하다니. 축복이 꽤 큰데?’
성역을 빼앗고 황금우상 상단에 큰 손해를 입혔으니, 성물 반환으로 인한 보상도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호의가 느껴지는 축복이었다.
‘혹시 다른 상인들을 구제하고 로어커스 폭등으로 인해 올 피해의 여파를 줄여서 그런 건가?’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황금우상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유크하르 말마따나 인격이 없는 신이니 감사해봤자 감사받았다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하기로 했다.
아이작이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캐틀린은 양치기 목상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캐틀린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더니 아이작에게 말했다.
“이런 선물을 연달아 받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아이작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군요.”
“선물?”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
캐틀린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입구부터 먼지 쌓인 상자와 넝마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곳이 상회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복도가 방을 둘러싸고 있군.’
사람이 자주 지나다녀 들키지 않고 침입하기 어려운 데다, 외부에서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벽과 문 또한 다른 장소와 남다른 재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금고라도 되는 건가?”
캐틀린은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금고는 아니지만 비슷한 곳입니다. 금고도 이만큼 엄중하게 관리하지는 않거든요.”
캐틀린이 창고의 문에 다가가자 갑자기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 인사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각에 숨어 있던 경비였다. 그가 문을 열어 주고서야 아이작과 캐틀린은 창고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 금고에 대한 소문은 많다.
벽과 바닥을 가득 채운 호박 보석이라든가, 빠져 죽을 만큼 있는 찬란한 금은보화들, 온갖 진귀한 약재와 향신료까지. 물론 황금우상 상단의 본점이 있다는 오드리프의 금고라면 모를까, 도둑질의 위험이 있는 탓에 지점은 그렇게까지 물건을 보관하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채권 뭉치와 문서 몇 장뿐.
물론 그 문서들엔 귀족이나 사제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댈 힘이 있지만 말이다.
역시나 창고를 열자 별거 없어 보이는 낡은 상자와 먼지 쌓인 넝마들만 나타났다.
캐틀린은 그 중 벽 쪽에 서 있는 등신대의 넝마를 벗겨 냈다. 그러자 안에서 칙칙한 회색빛의 갑옷이 드러났다. 평범하게 생긴 갑옷이었지만 아이작은 향상된 감식 능력과 상태창 덕분에 곧바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이건…….”
“우연히 입수하게 된 전신 갑옷입니다. 빛의 법전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 아마도 성기사 갑옷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느 성기사단의 소유물인지 알 수 없더군요. 그래서 혹시 몰라 보관 중이었습니다.”
캐틀린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건 이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갑옷이었으니까.
“어디서 얻었길래?”
“그게…… 부끄럽지만 장물입니다. 불사 교단의 습격을 받은 폐허에서 찾은 물건이라더군요. 시장통에 돌아다닐 물건은 아닌 것 같아 저희가 입수했습니다.”
캐틀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갑옷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다면 아이작 님께서 이 갑옷을 써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반납하기도 애매한 물건이고, 그렇다고 팔기에도 찜찜하더군요. 하지만 숭고한 여정을 수행 중인 같은 빛의 법전 성배기사시라면 충분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작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긴 했다. 얼마나 옳냐면,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아이작보다 이 갑옷을 가질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칼센 밀터의 성기사 갑옷(봉인)]왜냐면 이것은 칼센 밀터가 성기사 시절 입었던 갑옷이었으니까.
성기사 갑옷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세부적인 특징과 문장 정도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갑옷은 성기사단의 소속과 신분을 알릴 만한 표식, 심지어 가볍게 적힌 경전의 글귀나 기도문조차도 모두 거칠게 지워져 있었다. 노골적인 배교의 흔적이었다.
‘캐틀린이 함부로 처분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군.’
빛의 법전 문장들을 제거하고 기도 문구를 지운 성기사 갑옷이라니. 이단심문관들이 달려와서 이놈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덕분에 칼센 밀터의 갑옷이라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갑옷 그 자체가 배교자의 흔적이긴 하지만…… 뭐 적당히 가리면 되려나?’
안일한 생각이었으나 그만큼 탐나는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센 밀터의 갑옷이다. 엄청난 기적들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분명 그 촉수 다발에 휘감겼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아니, 잠깐. 칼센은 촉수가 먹어 치우지 않았나?’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촉수가 칼센을 포식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갑옷만 남아 있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고기만 먹고 껍질은 뱉었나?’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은 칼센의 성기사 갑옷을 살펴보았다. ‘봉인’이라는 표시가 등급조차 알지 못하게 막고 있었지만, 이미 드러나는 기적의 힘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강력한 기적에 보호받고 있는 갑옷이라면 아무리 촉수라도 소화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완력 강화, 피로 회복, 무게 경감, 물리 보호…… 이건 또 뭐야. 청결 유지에 하급 온도 차단 효과? 대충 냉난방이 잘 된다는 건가?’
봉인된 상태의 기초적인 기적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봉인을 해제하면 얼마나 골 때리는 기적이 스며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
‘칼센 놈, 검소한 줄 알았는데 몸에 호텔을 두르고 다녔었네.’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냉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캐틀린은 아이작이 의외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의아해했다.
성기사들은 다른 건 몰라도 장비 욕심은 있는 편이었으니까.
반면 아이작은 그녀의 무지가 오히려 부러웠다. 이 갑옷의 원주인이 누군지 몰랐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착용했을 텐데.
‘안 그래도 칼부림 좀 할 때마다 칼센에 비교되는데 칼센의 갑옷까지 차고 있으면 더 의심받는 거 아닌지 몰라…… 아, 모르겠다.’
아이작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받도록 하지.”
역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이었다. 정 무서우면 게르토니아 제국 안에서는 벗고 다니다가 다른 신앙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차면 그만이다.
아이작의 말에 캐틀린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습니다! 그러면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도와드리지요.”
“아니, 나 혼자 입어 볼 테니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아이작은 혹시 모르지만 촉수가 예민 반응할까 싶어 그녀에게 부탁했다. 촉수가 뱉어낸 물건이라면 착용했을 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캐틀린은 아이작을 귀중한 창고 안에 혼자 두는 것에 약간 고민하는 듯했지만 신뢰를 보여 주겠다는 듯, 고개 숙인 뒤 밖으로 향했다.
아이작은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을까 걱정하진 않았다. 게벨의 갑옷조차도 몸에 딱 맞게 스스로 조절됐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아이작이 장갑과 부츠, 각 부위들을 착용할 때마다 찰칵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몸에 꼭 맞게 조여들었다.
그렇게 아이작이 마지막 파츠, 투구 부분을 쓴 순간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정당한 소유자로 인정되었습니다.] [장비의 봉인이 해제됩니다.]“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