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2)
52화. 껍질 (2)
봉인이 해제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갑옷의 한 부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벅벅 긁어서 짓뭉개진, 칼센의 갑옷임을 표시하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이었다. 그 문장이 지워진 자리에 빛으로 새겨진 문장이 드러났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의미심장한 문구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변으로 보아 봉인이 해제된 것은 분명했다.
‘아니, 언제고 봉인을 해제시킬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이작은 당황하면서도 어떤 기능이 드러날지 기대했다. 이내 아이작의 눈앞에 칼센의 갑옷에 새겨진 기적과 축복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명천사로 지명된 사람의 갑옷답게 눈이 커지는 엄청난 축복들이 나열되었다.
‘최상급 체력 회복, 진리의 실마리, 인도하는 실타래, 파수자의 망치…… 세상에, 이게 대체……?’
영웅적인 여정 한번을 마쳐야 한 개쯤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축복들이 길게 나열되었다. 이 정도면 천사들은 물론이고 빛의 법전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대우해 준 것이 분명했다.
이때까지 칼센을 그냥 보스몹 정도로만 생각했던 아이작은 새삼 그가 명천사로 지명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배교하기 전까지 진짜 빛의 법전의 영웅이었으며 이단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리라.
아이작이 새로운 기적들에 희열을 느끼던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격한 반응이 나타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윽……?!”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던 섬광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아이작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움찔 떨었다. 그의 온몸 곳곳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작이 치명상을 입었을 때처럼 이름 없는 혼돈이 반응하고 있었다.
갑옷 사이로 촉수들이 기어 올라오며 마구 헤집고 상처를 남겼다.
콰드드드득!
그러나 갑옷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불꽃을 토해 내며 촉수를 불태웠다. 졸지에 자신의 몸을 촉수와 불꽃의 전쟁터로 내주는 꼴이 된 아이작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촉수는 아이작의 능력이고, 불꽃 또한 아이작을 지키기 위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 둘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칼센 밀터조차 씹어 삼킨 촉수가 이 갑옷만큼은 뱉어낸 이유도.
‘아니, 젠장……!’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갑옷을 벗기 위해 잠금쇠를 손에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촉수가 그 잠금쇠를 대신 다시 걸었다. 갑옷을 벗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촉수가 게걸스럽게 갑옷을 깨물었다.
와드드득!
갑옷이 거칠게 우그러들었다. 그러자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던 불과 빛이 동시에 약해졌다.
애초부터 갑옷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갑옷은 외부에서 오는 위협을 막고자 존재하는 것이지, 내부에서 오는…… 촉수를 막자고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촉수는 갑옷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구 씹고 짓이기고 물어뜯었다. 그러자 갑옷에 새겨져 있던 기적들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야, 잠깐!”
아이작은 아까운 갑옷이 상하는 것을 보고 비명을 내지르며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촉수는 이전에 먹어 치우지 못한 갑옷을 이번에야말로 소화시키겠다는 듯 으스러뜨렸다.
결국 아이작이 말릴 틈도 없이, 삽시간에 갑옷이 깨져 나갔다.
‘예전에는 먹어 치우지 못했더니 왜 이번에는?’
해답은 간단했다. 그 사이 아이작이 충분히 강해지고, 촉수도 성장한 것이다.
이제는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덕분에 빛의 법전 사제들이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축복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갔다.
“아, 아아아…….”
아이작의 단말마와 함께, 칼센 밀터의 갑옷은 이내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아이작 님?”
캐틀린은 한참 시간이 지나도 아이작이 나오지 않자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입지 못하셨습니까? 정 입기 불편하시면 도와드릴 하인을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대답이 없자 캐틀린은 문을 열었다. 창고 한가운데 아이작이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어딘가 망연자실해 보였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창고에 들어왔을 때와 차림새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갑옷은 입지 않으셨습니까?”
“……입고 있습니다. 보관 기적이 있길래 숨겨 두었습니다.”
아이작은 강철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칼센 밀터 갑옷의 파츠였다. 캐틀린은 그런 기적까지 있을 줄 몰랐다면서 놀라면서도 그가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음……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조금 지나칠 만큼.”
아이작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며칠은 쇠르에 머물 예정이니 할 이야기가 있다면 숙소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의아해하는 캐틀린의 환송을 받으며, 아이작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아이작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몸 안의 촉수에게 갑옷을 드러내도록 의지를 보냈다.
차르르르르륵! 마치 뱀 비늘이 떨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장갑을 중심으로 갑옷이 번져나갔다. 갑옷은 순식간에 아이작의 다리부터 머리까지 뒤덮은 전신 갑옷 형태로 변했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도 탈착에 최소한 30분은 걸리는 것이 전신 갑옷인데, 전부 무장하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성기사 갑옷에 탈착을 도와주는 기적이 스며 있다 하더라도, 놀라운 성능이었다.
다만 그 생김새는 이전과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우선 전체적으로 깎인 흔적들이 섬세한 무늬를 형성하고 있어서 억지로 문장과 경전 문구를 지운 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교한 예술품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늬들은 사실 뱀 비늘처럼 손톱만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음매는 사슬이나 옷감 대신 촉수로 이어져 있고, 망치로 두들기거나 접착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촉수가 마치 조개 껍질처럼 ‘만들어 낸’ 것이었기 때문에 가공의 흔적이 남지 않은 것이다.
아이작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전신 갑옷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각각의 부위들은 강철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꺾였다. 마치 옷을 안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건 촉수와 껍질이니까 어떤 의미로는 옷을 안 입은 걸지도…….’
아이작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을 들여다보았다.
[오염된 칼센 밀터의 성기사 갑옷(S)]미안합니다, 칼센. 당신의 갑옷은 조각조각 나서 촉수에게 마개조당했습니다.
촉수는 칼센의 갑옷을 씹어 삼키고는 아이작의 새로운 껍데기로 재창조해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소화하는데 방해되는 기적들을 전부 지워 버린 것은 당연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봉인 이전에 남아있던 기초적인 기적들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밸런스 파괴급 기적들은 다 삭제된 것이다.
‘이건…… 그래. 그것까지 바라면 너무 치트 플레이가 됐겠지.’
사실 갑옷 자체의 기능만 놓고 보자면 지금이 이전보다 훨씬 낫긴 하다. 사시사철 갑옷을 착용하고 지낼 수는 없으니 매번 전투할 때마다 착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줄여 주고, 부드러움이나 가벼움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제는 칼센의 갑옷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빛의 법전 축복이 지워졌으니 내 취향대로 조합을 맞춰서 축복을 새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나쁘지 않아.’
솔직히 기존에 부여되어 있던 축복들은 그냥 화려하고 강하고 희귀할 뿐, 상성과 조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축복들이었다. 애초에 아이작은 빛의 법전 기적을 쓰기 어려우니 새로운 축복을 새기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이작은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은 지우기 힘들었다.
‘아이작 님.’
그때 아이작에게 어떤 의지가 전해졌다.
헤사벨이었다.
헤사벨은 사도가 된 후 혼돈의 자손처럼 아이작에게 의지를 보내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충만한 충성심을 느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녀에게 맡긴 임무를 완료했다는 뜻이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쇠르의 슬럼이었다.
***
쇠르의 슬럼가에는 이슬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굵진 않았지만 싸늘한 기온을 더 싸늘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지저분한 공터 한복판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김을 피워 올리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옷 안에 품은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행위일 뿐, 감히 꺼내 들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광장 한구석에 서 있는, 깊게 후드를 눌러쓴 한 여인 때문이었다.
여인은 어두운 후드 안쪽에서도 붉은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빛내며 섬뜩하게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바르바리들은 한동안 쇠르에 떠돌았던 식인 괴물에 대한 괴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주목!”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을 깨웠다.
자클렛과 함께 아이작이 공터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작은 공터에 들어오면서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로어커스 폭등으로 살길이 막막해져 떠밀려온 바르바리 무리였다. 로어커스 폭등 때문에 물류가 제대로 돌지 않으니 화전을 하던 바르바리들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내려온 것이다.
바르바리들은 성기사 차림의 아이작이 그들 앞에 서자 바싹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전에야 어디 굴러먹던 용병 같은 차림새였기에 거리낌 없이 공격했지만, 지금 아이작은 완벽한 성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성기사는 바르바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보니 참 다양하기도 하군.’
바르바리는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타의든 자의든 신앙이 없는 자들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바르바리들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존재한다.
신앙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의 힘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
즉, 마법 저항력이 높다는 뜻이다.
이 점은 그들이 쉽게 다른 신앙에 이끌리지 않거나 독립 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유크하르는 영악하게도 바로 이런 바르바리들의 특성을 이용하려고 했다.
‘골루와루가 황금우상으로 위장해서 부활한다 해도 당장 신앙을 수급할 방법이 부족했겠지…… 그래서 이들을 이용하려고 했던 거고.’
유크하르는 그 어떤 신앙인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바르바리들을 돈으로 고용했다. 그렇게 우선 자기 휘하에 둔 다음, 로어커스 술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신앙으로 복속시키려 해 왔다. 덕분에 바르바리들의 마법 저항력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작이 그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충격적인 첫마디에 바르바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기사가 그들에게 존칭을 사용하다니? 바르바리들은 같은 국민이면서도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범죄자나 정박아 취급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시 신앙을 가져 보실 생각 있으십니까?”
아이작은 자신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
포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분 내외의 짧은 이야기와 30분 정도의 문답 정도가 이어졌을 뿐이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교리와 자신만의 생각을 담은 철학을 교묘하게 섞어서 이야기했다. 어차피 빛의 법전의 교리는 21세기 현대인인 아이작이 가진 생각과 가장 유사한 신앙이니, 아이작 자신의 생각을 조금 섞어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작에게 징집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체포, 처분될 것이라 생각했던 바르바리들은 이 낯선 포교 방식에 당황하면서도 돌아갔다.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아이작 님.”
헤사벨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사실 말 몇 마디로 설득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저들 몇 명을 죽이기도 했으니.”
“그런 것치고는 설득당한 자들이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자클렛이라는 자가 꽤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더군요.”
자클렛은 포교하는 동안 아이작에게 가장 많은 질문과 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이작이 로어커스 거래를 하는 동안 돕기도 했으니, 이미 정신적으로 일부분 굴복당한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작은 자클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자클렛은 이미 성도가 되기를 자처했으니 두고두고 잘 일해줄 것 같긴 하군.”
아이작은 자신의 바로 아래 직접 명령을 수행할 사도─헤사벨을 두고, 사도 아래 성도라는 직위를 만들었다.
흔히 있는 신관이나 사제 같은 지위였다. 아이작이 직접 기적을 부여해 줄 수는 없었지만, 이 세계의 신앙 시스템 상 개인의 신앙심에 따라 점점 강해지며, 포교 작업을 통해 밑에 많은 신도가 모이면 또한 더욱 강해지게 된다.
자클렛은 꽤 규모 있는 바르바리들의 지도자였으니 금방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계급은, 위로 갈수록 강해졌다. 아래에서 차곡차곡 적립된 신앙심은 위로 올라갈수록 강하게 누적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신앙은 고스란히 내 힘이 되지.’
당연히 아이작은 이 신앙 다단계의 최상위 포식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