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3)
53화. 빚 받아드립니다 (1)
‘신앙’은 현실에선 모호한 개념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자원이다.
신도들이 신에게 신앙을 바치면 그것은 신성력으로 누적된다. 이렇게 누적된 신성력은 사제나 주교들이 기적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로 사용된다. 즉,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많은 신도를 거느리면 거느릴수록 사제들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촉수만 해도……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훨씬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겠지.’
골루와루를 상대할 때 촉수가 기적임에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 안에 신성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신앙을 쌓아 힘으로 발현시킨다면, 이는 곧바로 아이작의 힘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힐렛처럼 충직한 종복이 아니라면 아직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허락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신체 강화나 들키지 않을 만한 기적 정도는 베풀 생각이 있었다.
물론 ‘계급’이 높은 사람 중 배교자가 나온다면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바닥에서 시작하는 아이작은 우선 세력을 빠르게 넓힐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굳이 배교하지 않을 정도로 교리를 느슨하게 한 상태였다.
‘다른 신앙들은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보편적인 도덕과 평등을 교리로 내세웠으니…… 욕심 많은 놈은 애당초 이쪽에 관심을 갖질 않겠지.’
소외된 자, 도망친 자, 버림받은 자…… 밑바닥 인생들이나 관심을 가질 만한 신앙이었다.
로어커스 폭락으로 기반이 무너진 쇠르에는 이런 인생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작은 이런 사람들 사이에 암암리에 신앙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더불어 기존 신앙에 대한 불만도.
아이작은 자신이 신도들을 100%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통제하는 것은 곁에 둘 측근들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 측근들만큼은 절대로 배교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가진 사람들은 아이작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클렛이 바로 첫 번째 성도다.
물론 다른 사제들이나 신관들에 비하면 지식도 능력도 한참 부족하지만 원래 어떤 다단계 회사든 초기 멤버는 그 수혜를 더 크게 누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로어커스 폭등 사태 내내 자클렛이 보여 준 능력이나 영향력을 고려하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찍 아이작의 편에 선 만큼, 앞으로 강해질 여지도 많을 것이다.
운도 실력이니까.
자클렛이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밑바닥 인생답게 대세를 알아보고 올라타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에 굴복당한 사람들은 그 공포에 시달리며 지내기보다는 공포와 한 편이 되기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잘해 준 기억은 금방 잊지만, 공포는 쉽게 잊지 못한다.
어쨌든 자클렛이 쇠르에서 성도의 역할을 잘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흠, 그건 그렇고…… 그 물건은 되찾았나?”
“예. 덕분에.”
헤사벨은 눈에 띄게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품속에서 얼룩덜룩한 넝마를 꺼내 들었다.
지저분한 넝마처럼 보이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그것이 성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칼라일 성해포(B)] [상처에 닿을 경우 해당 부위의 출혈과 부상을 즉시 치유하지만, 피를 소모한다.] [그녀가 칼라일 수도원에서 명천사로 지명되었을 때, 그녀는 마지막 신앙의 증명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도려내 천에 감싸 붉은 성배에게 바쳤다. 붉은 성배는 기뻐하며 그녀의 피부를 벗기고 살점을 새롭게 조직하니,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탄생했다.]‘하필이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관련된 물건이군.’
손대기 섬뜩한 기록이 담겨 있는 데다, 분열 예식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물건이지만 일단 명천사와 관련된 성물이었다.
헤사벨은 이 성해포를 내밀며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이작을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대리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기 입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고 말한 적도, 거짓말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상대방의 착각을 이용할 뿐이다.
“잘됐군.”
아이작은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헤사벨은 움찔하다가 결국 아이작에게 칼라일 성해포를 곱게 바쳤다. 유크하르에게 저당 잡혔던 성물을 이번엔 아이작의 손에 넘긴 셈이다.
[‘칼라일 성해포’ 성물을 습득하였습니다.] [숭고한 여정 효과가 더욱 강해집니다.]이걸로 쇠르에서 할 수 있는 용건은 다 해결한 것 같았다. 황금우상 상단의 자산을 대부분 이용할 수 있게 빚을 지워 두었고, 황금우상의 축복, 칼라일 성해포와 헤사벨 굴마르라는 사도까지 얻었다.
예상치 못한 큰 수확이었다.
‘헤사벨이 나중에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데…….’
사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적지 않은 일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누굴 섬기는지 잘 모르고 있어서 완전한 배교로 취급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이작은 그때 헤사벨이 자신을 선택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을 들이는 것은, 칼센 밀터라는 좋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일이 키우는 것보다는 남이 키운 신자를 빼앗아 오는 게 더 빠르지.’
무릇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자가 하는 법이라고 했으니까.
헤사벨 굴마르는 성장 가능성만 따져 봐도 충분히 공들일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흡혈귀라는 것은 신경 쓰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아이작부터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었으니까.
헤사벨은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얌전히 명령을 기다렸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아이작 님?”
“음.”
아이작은 이미 생각해 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떠나는 대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만간 누군가 찾아오겠지.’
아이작은 문제를 먼저 해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누군가 자신에게 부탁하게 만들어야 더 이득이니까.
***
“손실이 얼마라고?”
“그, 그게…….”
보고를 들은 헨드락의 영주, 카일 헨드락은 현기증을 느꼈다.
“대체…… 대체 왜? 황금우상 상단도 사들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황금우상 상단도 이번 일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황금우상 상단의 투자 행보는 이 바닥에서 가장 관심받는 이슈이자 신용의 증거다. 신이 가호하는 경제활동이 쉽게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우상 상단이 큰 손실을 입었다면, 이는 황금우상이라는 신앙에 대한 테러나 도발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하필 왜 이 타이밍에?’
헨드락 영지는 게르토니아 제국 변방에 있다.
중앙인 수도에서는 너무 멀고, 그렇다고 최전방에 붙어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시기에 따라서는 잘나가던 때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저 어중간한 곳에 자리 잡은 시골 촌구석 영지.
하지만 카일은 야심이 많은 남자였다. 자신의 선친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었을 때부터 그 야심은 눈에 띄게 부풀었다. 카일은 인근 도시인 쇠르에서 일어난 로어커스 폭등이 자신의 힘을 키울 훌륭한 기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브란트 공작가의 이름까지 팔아서 다른 귀족들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투자에 귀족들을 꼬드기기 위해 백제국의 대귀족인 브란트 공작가가 이번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출처 불명의 소문인 척했으나 귀족들은 사실상 배후가 카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 준 이유는, 그들로서도 투자에 참여할 귀족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투자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책임을 카일에게 돌리게 될 것이다.
‘못 갚는다고 잡아떼?’
카일은 최악의 수를 상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이웃한 영주, 르하르트로부터 다 큰 로어커스를 사들이기로 이미 수개월 전에 계약했던 것이다. 로어커스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르하르트가 배 아파할 생각에 즐거웠는데, 순식간에 가격이 폭락하자 입장이 역전되었다.
이제 르하르트가 산더미 같은 로어커스를 들고 오면 들고 올수록 카일은 점점 파산의 구렁이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돈을 떼먹기로 한다면, 르하르트는 로어커스 대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같은 신앙의 사도건 뭐건 파산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르하르트도 이번 일로 손해가 이만저만 아닐 테니까. 게다가 다른 귀족들도 뭐라도 받아내기 위해 르하르트를 지원할 것이다.
카일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정말로 잠깐 휘청거렸지만, 옆에 서 있던 여인의 부축으로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영주님.”
그를 부축한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속삭였다. 여인에게서 풍겨 오는 냄새를 맡은 카일은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라엘라.”
라엘라는 그에게 늘 현명한 조언을 해 주는 시녀였다. 선친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투자를 망설일 때에도 라엘라는 카일에게 과감한 투자를 조언했다.
그래서 선친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자마자 카일은 영주로서 첫 행보로 로어커스 투자를 선언했다. 그러다 라엘라가 한 달 전쯤 다시 로어커스를 팔기를 권유했지만 이미 벌여 놓은 판이 너무 큰 데다, 도저히 가격이 내려갈 것 같지 않아 그녀의 조언을 무시했었다.
“역시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소.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미 늦은 일입니다. 그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짚어보지요. 갑자기 왜 로어커스가 폭락했을까요?”
그녀의 말에 카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정부지 나날이 신고가를 갱신하던 로어커스의 가격이 왜 떨어졌을까? 그것도 황금우상 상단까지 투자하던 시장이?
“황금우상 상단을 노린 테러인가?”
“그것 말고.”
라엘라의 입술이 꿈틀거리다가 겨우 다시 열렸다.
“좀 더 큰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요?”
“설마…… 나를 향한?”
“……예. 말씀하신 대로 백제국 귀족층에 경제적 위기를 안겨주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지요. 귀족들은 빛의 법전의 가장 신실한 신도이자 수호자니, 어쩌면 빛의 법전의 근간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수가.
카일은 빛의 법전을 노린 전대미문의 테러에 휘말렸다는 사실과, 그 전모를 밝혀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명석한 두뇌로도 다른 귀족들을 설득할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니라 다른 사악한 존재의 공격으로 투자가 실패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듣자 하니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가 이번 로어커스 폭락에 큰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아이작?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이름이 아이작이었나?”
“예. 그 성배기사가 암시장의 악당을 무찌르고, 사악한 괴물에게 정신이 조종당하던 상인들을 풀어주면서 가격이 폭락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공이로군. 우리 영지에 오면 극진히 대접해야겠어.”
“그게 아니라.”
라엘라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잠시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신실함은 놀라웠지만 카일로서는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웠다.
‘제게 인내를 허락하소서’ 운운하는 기도문이 짧게 지나간 뒤, 라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잘 짜 맞춰진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로어커스 폭등에 정신 지배라니요? 쇠르에서 이렇게나 먼 곳에 사는 영주님도 정신 지배에 당하셨을까요? 다른 귀족들은요?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성배기사가 괴물을 물리쳐 로어커스 가격이 떨어지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설마…… 성배기사가 빛의 법전 세력을 공격했단 말인가?”
“성배기사라곤 하지만, 꼭 빛의 법전을 모신다는 법은 없죠. 엘릴 교단이나 세상의 화로에서도 성배기사는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카일은 이 놀라운 전모에 다시금 전율했다.
다른 신앙의 성배기사가 빛의 법전에 공격을 감행하고, 자신은 하필이면 그 공격에 가장 먼저 당한 것이다. 카일은 이제 단순히 파산의 문제를 넘어 신앙의 수호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책임을 다른 교단 탓으로 돌리게 된다면 그가 살 구석이 생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가 사실은 빛의 법전이 아닌 다른 어떤 사악한 신앙을 섬기고 있고, 정체를 숨긴 채로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힘을 키울 생각인지도요.”
“거기까지는 너무 갔군. 라엘라.”
아무리 그녀가 현명한 조언을 한다 해도 카일은 공상과 이론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라엘라는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가 더더욱 엄격해야만 했다.
성배기사가 어디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카일도 어렸을 때부터 성배기사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카일은 그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만약 아이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빚쟁이들도 자신을 비난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기사단을 보내야겠군.”
카일은 결국 결정했다.
“헨드락 기사단을 보내겠소. 그 성배기사를 정중히 모셔오도록 청한 뒤, 내가 직접 만나 판단해 보지.”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영주님.”
라엘라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카일은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곧바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홀을 빠져나갔다.
***
라엘라는 카일이 사라지자마자 표정 없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가죽을 뒤집어쓴 듯한 무기질적인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용히 의지를 드러내자, 곧바로 기둥 뒤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흑기사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굴마르 가의 딸에게서 신앙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라엘라는 기사에게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굴마르 가의 딸은 마지막에 아이작이라는 성배기사를 쫓았다. 헨드락 기사단과 동행하면서 그녀의 행방을 조사하도록.”
“아이작이 아니라 헤사벨 굴마르입니까?”
“그 시대착오적인 성배기사는 붉은 성배의 관심거리도 아니야. 중요한 건 굴마르 가의 후계자다. 배교한 것이 확실하다면 즉시 처형하고 성물을 회수해라.”
흑기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배기사에게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라엘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까짓 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닐 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라엘라의 말에 흑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지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