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5)
55화. 빚 받아드립니다 (3)
당연하지만 헨드락 영지로 향하는 길은 르하르트 백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르하르트는 아이작을 만나기 위해 쇠르에 가신 몇 명과 들렀을 뿐이었다.
헨드락 영주를 붙잡아 받을 것을 받아내려면 좀 더 철저한 준비, 그러니까 많은 칼과 창이 필요했다. 동선 자체가 르하르트 쪽이 헨드락에 더 가깝기 때문에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하거나 르하르트 쪽이 약간 빠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말을 선물한 거지. 늦지 말라고.”
아이작이 헤사벨에게 설명하자 말을 끌고 온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가 변명처럼 말했다.
“영주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성배기사님에 대한 선의와 경애의 뜻으로…….”
“그래, 그래. 그래서 이 말을 타라고?”
기사가 가지고 온 말은 꽤 멋진 백마였다. 아이작이 새로 얻은 갑옷과도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순종적이니 말을 잘 들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이작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전마라기보단 도련님이 탈 법한 말이군.’
아무래도 선물이다 보니 거친 놈보다는 말 잘 듣고 예쁘장한 것으로 고른 것 같았다. 선물은 포장도 만만찮게 중요하니까.
그때 아이작의 눈이 좀 더 뒤쪽으로 향했다. 기사가 타고 온 흑마였다.
“저 말은?”
르하르트가 선물한 백마보다 덩치가 반 이상 더 크고 거칠어 보이는 흑마였다. 말 그대로 전마처럼 보였다.
아이작의 말에 기사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요? 저건 어렵습니다. 성질이 너무 더러워요. 기수를 몇 명이나 떨어뜨린 녀석입니다. 말이 기수에게 맞춰주는 게 아니라 기수가 말에게 맞춰줘야 합니다. 성배기사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도착이 늦어질까 봐 그런 거겠지. 데려와 보게.”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데리고 왔다. 사실 혈통 자체는 선물한 백마가 더 좋아 보였다. 하지만 백마는 예쁘고 우아하게 달리기엔 좋은 말이었지만, 기마전도 고려해야 하는 아이작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끌려온 놈은 낯선 아이작을 보곤 덩치답게 성질을 드러내듯 거칠게 투레질했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서 불길한 무언가를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아이작은 말을 길들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이 손을 내밀자 말은 아이작을 깨물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작의 손이 놈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저 너머의 기생충이 순식간에 말의 뇌간으로 파고들었다. 뇌를 제압당한 말은 꿈틀하다가 이내 얌전해졌다. 아이작은 말을 통해 느껴지는 공포와 흥분, 감각들을 체크했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 아이작은 말을 잘 타지 못한다. 그가 타 본 것은 기껏 해 봐야 수도원의 조랑말이었다.
‘이렇게라도 해놔야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겠지.’
물론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아니고 고통을 주거나 강제로 차분하게 만드는 정도지만 그래도 쓸만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하군요. 그 거친 군마를 순한 양처럼…….”
“선물은 이걸로 받도록 하지. 좋은 선물을 해줘서 고맙다고 전해주게. 백마는 자네랑 바꿨다고 하고 가져도 좋네.”
아이작의 말에 기사는 희희낙락하며 인사하고 헤어졌다. 자기가 타던 말을 빼앗긴 셈인데 미련 없이 버린 걸 보니 이 흑마의 성질을 기사도 견디기 힘들었던 듯했다.
하지만 어쨌든 아이작에게는 순한 양일 뿐이었다.
“그럼 출발하자.”
아이작은 말에 올라타며 헤사벨에게 지시했다. 아직 해가 떠 있었기 때문에 헤사벨은 거의 코까지 가리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앞이 보이나 싶으면서도 잘 움직이는 걸 보니 문제없는 모양이었다.
***
헤사벨은 자기 말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말을 구해 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타기는 했지만 서두르다가 르하르트보다 먼저 도착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이작은 굳이 빨리 달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르하르트 쪽과 길이 엇갈리지 않겠습니까?”
“르하르트가 당장 공성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명분을 따져서 침착하게 해결하고 싶은 거라면 어차피 내가 있어야 해. 내가 있는데도 헨드락이 배짱을 부리면 정말 사술에 휘둘린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음모와 교란, 암살의 고향에서 온 헤사벨에게는 이런 행동이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흠, 잘 모르겠군요. 우리 왕국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헨드락 영주의 목에 금화 천 닢을 걸었을 겁니다. 그게 병사를 출병시키는 것보다 싸게 먹힐 테니까요. 아니면 내부자를 매수해서 암살하거나, 식사에 독을 풀거나…….”
그 외에도 헤사벨은 왈라이카 왕국에서 벌어질 만한 온갖 협잡질들을 열거했다. 아무래도 체면이나 명분, 명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동네라서 그런 모양이다.
아이작도 굳이 따지자면 그쪽이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백제국은 좀 더 체면치레가 강한 곳이었다.
그 와중에 고소한다던가 붉은 성배에게 호소한다든가 하는 선택지 따위는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왈라이카 왕국에선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듯했다.
“여하튼 전면전은 가급적 피하려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피가 많이 흐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자칫하면 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겠지…….”
“예. 귀중한 피가 흐른다니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아이작은 왈라이카 왕국이 의외로 인명 중시 사상이 깊은 곳인가 생각하다가 완전히 잘못 짚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왈라이카 왕국의 귀족들은 국민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면전을 일으킨다 함은 자기 손으로 추수할 곡식들을 쓸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아니다. 말을 말아야지.”
전쟁으로 대량의 피를 흘리는 것과 평시에 조금씩 피를 빨아먹는 것,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이작도 붉은 성배 클럽 신앙으로 엔딩을 본 적 있었다. 게임에서 묘사되기로는 왈라이카 왕국의 국민들이라고 가축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들은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농민들은 생산한 식량을 전부 가질 수 있었고, 잉여 식량으로 늘어난 인구 덕에 상공업과 예술이 발달했다. 음모나 분쟁은 귀족들끼리의 이야기였다.
쓸 만하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피를 나눠주고 바로 양자로 삼아 귀족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회 구조가 경직되어 있지도 않았다.
‘물론 소수의 가문들만이 영원히 부를 독점하는 체제겠지만.’
그렇다고 귀족들이 터무니없이 오래 살지도 않는다.
음모와 교란, 암살이 횡행하는 이 나라에서 귀족들의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살인이다. 하지만 숨겨진 0위는 바로 실종이다.
시체를 먹어 치우는 뱀파이어에게 시체를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죽은 귀족이 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다면 뼛조각, 머리카락 한 줌, 피 한 방울이라도 더 가져가려 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어느 쪽이 더 낫다…… 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서적인 면에서는 그래도 빛의 법전 쪽이 낫군.’
물론 이것은 현대인의 기준일뿐,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전쟁터에 징집되거나 귀족들에게 수탈당하는 누군가는 왈라이카가 낫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너도 굴마르 가의 후계자잖아? 공녀? 거의 공주에 준하는 직위일 텐데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나?”
아이작의 기억 속에 헤사벨은 게임 시작 시점에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 과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기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헤사벨은 표정을 굳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붉은 성배 클럽에서…….”
“조심해!”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아이작도, 헤사벨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길 앞쪽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
쾅!
굉음과 함께 통나무가 지면을 강타했다.
허벅지만 한 굵기의 통나무는 일대의 흙과 돌조각들을 날려 버렸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허둥지둥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기사인가?’
아이작은 통나무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무리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빌어먹을, 불! 불화살은 어디 있는 거야! 가서 쏘라고!”
“횃불로 지져!”
다시 한번 또 하나의 통나무가 날아들었다.
상황이 기사들에게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였다. 비탈진 산골인 데다, 주변은 벌목이라도 했던 건지 잘린 나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공격하는 상대는 키가 3m에 이르고 바위 같은 창백한 피부를 가진 트롤이었다.
‘트롤이 이렇게 민가 가까이에 출몰하다니?’
백제국에서 트롤을 만나려면 산속 깊이 들어가야 했다. 트롤의 천적이 다름 아닌 빛의 법전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트롤은 상처를 몇 군데 입기는 했지만 특유의 치유력으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불화살을 쏘라느니, 횃불로 지지라느니 하긴 했지만 싸우면서 그런 짓을 하기가 쉬울 리가 없다.
‘화염 축복이나 열을 가할 사제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쉬운데, 그러질 못하는 걸 보니 사제는 없는 모양이군.’
척 봐도 성기사단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국기사단은 아닌 것 같으니, 지방 영주의 기사들 같았다.
“도와줄까요?”
아이작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 헤사벨이 물었다.
그녀가 나선다면 간단할 것이다. 붉은 성배의 기적을 쓸 수 있는 헤사벨이라면 트롤의 재생력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아이작은 상황 파악을 마친 다음, 결론을 내렸다.
“르하르트 백작의 기사들일 수도 있겠군. 내가 가지.”
아이작은 말에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달려온 말발굽 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아이작은 심판의 검을 꺼내 들며 트롤을 향해 쇄도했다.
“우오오오오!”
트롤은 괴성을 내지르며 아이작에게도 거대한 통나무를 던졌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아이작에게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그의 머리통이 단숨에 으스러질 것이 분명한 상황.
아이작은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 순간 말이 민첩하게 몸을 비틀면서 사선으로 지면을 튀어 올랐다. 트롤이 던진 통나무는 다른 나무에 부딪혀 바스러졌다. 신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승마술에 기사들이 경악했다.
‘드리프트 비슷한 걸 생각하긴 했는데…… 말이 생각보다 잘 따라주는군.’
그의 의지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말을 쉽게 지면을 박차며 다시 트롤을 향해 달려들었다. 트롤은 예상치 못하게 아이작이 손쉽게 회피하자 당황한 듯 이번에는 통나무를 던지는 대신 들고 휘둘렀다.
부웅! 아이작이 아닌 말을 노린 공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말은 아이작이 착지하자마자 지시를 따라 급히 떨어진 장소로 이탈했다.
이번에는 아이작의 차례였다.
아이작은 막 공격을 마친 트롤의 품으로 파고들어 심판의 검으로 베어 올렸다.
치이이이이익! 부정한 것을 태우는 심판의 검이 트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고 상처를 불태웠다. 목을 노리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커서 닿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의 공격에도 끊임없이 상처를 회복하던 트롤은 공포스런 직감에 비명을 질렀다.
“성, 성기사님을 도와라!”
그때 기사들도 상황을 파악한 듯 급히 소리쳤다. 트롤은 도망치려다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도망칠 틈도 찾지 못했다. 놈은 통나무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간격을 확보하려 애썼다.
아이작은 통나무를 회피하면서 접근하려다가 짜증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새로 입은 갑옷의 강도가 궁금해졌다. 때마침 주변에 부서진 통나무들도 보아하니 강도가 약한 소나무였다.
아이작은 통나무의 궤적을 예의 깊게 주시하다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쾅! 발밑의 땅이 길게 패며 아이작이 밀려났다. 그러나 박살 난 것은 아이작이 아니라 통나무였다. 온 사방에 나뭇조각들이 비산했다.
‘역시 좀 뻐근한 것 말고는 멀쩡하군.’
보호 기적으로 무장한 성기사 갑옷은 그 자체로 흉기로 취급될 만큼 단단했다.
‘다만 위로 휘둘렀다면 무게가 부족해서 나가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다녔을지도…….’
위험하진 않지만 분명 꼴사나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트롤은 손에 들고 있는 부분만 남은 통나무를 보고 잠시 멍한 모습을 했다. 녀석은 곧바로 다른 통나무를 찾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뜨거운 것이 목을 파고들었다. 놈이 자세를 낮추기를 기다리던 아이작의 검이었다.
뜨거운 피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놈의 목을 불태웠다.
“후…….”
전투를 마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아이작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초면이지만 감명 깊은, 아니, 사랑에 빠진 건가 싶을 정도로 흥분에 찬 얼굴의 기사였다.
“정말 굉장했습니다. 성기사님! 어느 성기사단 소속이십니까?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누구십니까?”
기사는 그제야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듯 허둥지둥 가슴을 쿵쿵 치며 소리쳤다.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 오언 렌리입니다! 카일 헨드락 영주님이 내리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