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7)
57화. 피비린내 (1)
‘굴마르 공작가의 사람이거나 계시를 받은 고위 사제 누군가겠지.’
헤사벨 때문에 귀찮은 말썽의 단서가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여긴 게르토니아 제국령이다. 변방이라고는 해도 온 사방에 빛의 제국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스스로 태양 아래 몸을 던지는 꼴이다.
‘기습이라도 한다면 나야 감사하지.’
헤사벨이야 자기 목숨 알아서 건사할 깜냥은 될 테니 걱정은 없다. 방해한다 해도 고작 트롤이나 길 막기 수준의 방해라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아이작은 오히려 상대방이 어서 빨리 정체를 드러내어 제 무덤 파기를 기대했다.
자신의 경력 아래 또 누구의 이름이 올라갈지 생각하면서.
***
그러나 아이작의 기대와 달리 또 다른 견제는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수월하게 헨드락 영지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다리만 건너면 헨드락 영지였다.
아이작은 별일 없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멍청한 놈은 아닌 모양이군. 그냥 내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뿐인가?’
우연히 트롤이 공격해 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확실한 것은 상대방이 당장 헤사벨을 해칠 의도는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트롤 정도라면 헤사벨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더 간편한 방법은…….’
아예 헤사벨을 미끼로 내던져 주는 것이다. 어디 외딴곳으로 보내 버리면 알아서 상대가 낚이지 않을까. 아이작은 그런 생각까지 해 봤지만, 그러면 결국 아이작 혼자서 추적자를 상대해야 한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힘을 빌어 집단구타를 할 마음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혼자서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고 싶진 않았다.
아이작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 다리 앞에 서 있는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그리고 무리 맨 앞에 있는 한 중년 남자가 다리를 지키는 병사에게 뭐라 큰소리를 쳐대고 있었다.
“당장 카일에게 손님맞이를 준비하라 이르게!”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셔도 이미 명령이…….”
헨드락 기사단도 그 모습을 발견한 듯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저건…… 르하르트 백작?”
헨드락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당혹감과 함께 긴장이 확 번졌다. 먼저 도착한 르하르트와 그의 사병들이었다. 기사들도 몇 명 보였다.
르하르트는 뒤늦게 아이작 일행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오언과 함께 가장 앞에 있던 아이작이었다. 높은 매력 수치는 어디서든 쉽게 눈길을 잡아끄는 효과가 있었다.
“아이작 님! 오셨군요. 그런데 그쪽은?”
르하르트는 아이작과 함께 온 기사들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에게 함께 다니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오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검은 곰 기사단입니다. 헨드락 기사단이라고도 하더군요.”
“헨드락 기사단?”
순식간에 술렁임이 번졌다. 헨드락 기사단은 헨드락 기사단 나름대로, 르하르트의 사병들과 기사들 역시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움찔했다.
헨드락 기사단은 이미 영지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외부의 침입, 구체적으로는 르하르트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르하르트가 데리고 온 병사들 역시 전투를 걱정하고 있었다. 르하르트는 친구의 아들을 꾸짖기 위해 찾아가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누가 이 많은 병사와 기사들을 데리고 와서 꾸중이나 한단 말인가.
물론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도하기엔 한참 부족하기는 했지만, 단순 방문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만나니, 먼저 공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누가 먼저 칼을 빼 들까 걱정하는 기색이 번졌다.
귀족들 돈놀음에 휘말려 피를 보는 것은 그들 중 아무도 원치 않았으니까.
다들 아이작과 르하르트의 눈치를 볼 때, 르하르트와 오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작 님은 왜 거기…… 같이 계십니까?”
“아이작 님, 르하르트 백작과…… 이미 만나셨습니까?”
질문은 동시에 던져졌지만 아이작은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 친구들이 곤경에 빠져 있길래 도와줬습니다.”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르하르트와 오언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그 뒤를 따랐다.
아이작은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꽃놀이패였다.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어느 쪽에 정의가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는 위치였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쪽 누구도 먼저 싸움을 걸 수는 없었다.
“우선 들어갑시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겠지요?”
***
르하르트와 헨드락 기사단은 어정쩡한 간격을 두고 영지 중심부로 들어갔다. 헨드락 영지는 커다란 계곡 사이에 세워진, 꽤 좋은 풍경을 가진 마을이었다. 다만 농사를 짓기에는 영토가 부족해 보여서 목축을 주로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빈곤해 보이는 마을에서 그 사건이 터진단 말이지…….’
2년 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13차 여명군이 시작된다.
바로 새로운 신의 탄생 미수 사건이다.
새로운 신앙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칼센 밀터였다.
칼센 밀터는 아홉 번째 신앙의 신이 되기 위해 빛의 법전을 배교했다. 그리곤 붉은 성배와 불사 교단의 도움을 받아 신이 되려고 했다. 이미 인간의 몸으로 신의 반열에 올라선 엘릴과 불사 황제라는 선배가 있으니,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칼센은 실패했지.’
이때, 칼센 밀터는 신이 되는 데 결국 실패했다.
헨드락 영지에 숨겨진 무수한 힘과 자원을 끌어다 쓰며 농성하던 칼센 밀터는 결국 흑제국으로 탈출했다. 백제국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내려 한 시도에 대해 분노했다.
백제국은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제대로 된 준비조차 없이 13차 여명군을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칼센 밀터가 죽어 버렸으니…….’
이제 새로운 신이 탄생하려는 사건 자체가 터질 리가 없다.
아이작은 이 때문에 여명군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가능성은 낮게 보았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성지 수복은 백제국 교인들의 역사적 사명이고, 사회에 분노와 부조리가 누적될수록 여명군을 갈망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신 탄생 미수 사건은 트리거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이작은 바로 그 트리거를 일단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비탈진 계곡 위쪽에 그럴듯한 고성이 눈에 들어왔다. 올라가는 길목 아래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 오언이 말을 서둘러 앞으로 보내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영주님께서 손님맞이를 하실 수 있도록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기사들과 함께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오언은 아이작에게 아직 미련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영지 중심까지 들어온 르하르트가 더 큰 문제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르하르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달려가는 헨드락 기사단의 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뭔가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아이작이 남았다는 사실에 더 안도하는 듯했다.
“아이작 님.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평화롭게 해결하실 생각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야 합니다만…….”
르하르트도 본인 입으로 한 이야기지만 신빙성이 없는 말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병사를 끌고 오진 않았을 테니까.
가문이 몰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판돈이 걸린 상황이니 대화로 안 통하면 칼부림이 나는 상황도 예상했을 것이다.
아마도 르하르트는 몇 명 죽을 수도 있겠지만 혼쭐을 내준 다음 적당한 보상을 받아 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카일은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고 벼르고 있을 테고.
“그러면 그냥 제 방식대로 하지요. 어차피 더 초조한 건 헨드락입니다. 덕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코앞까지 왔잖습니까?”
만약 르하르트가 누구라도 해쳤다면 헨드락은 자위를 위해서라도 반격에 나설 명분이 생긴다.
그걸 핑계로 돈을 안 갚으려고 들지도 모르고.
결국 이 문제는 누가 칼을 먼저 뽑느냐에 따라 어떻게 해결될지 달려 있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이작은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헨드락 영지는 이미 가신들에게 줄 돈도 부족한 상태고, 르하르트는 영지라도 압류하지 않으면 본인이 파산할 지경이니까…… 살인 사건의 원인 대부분은 돈과 치정문제라지?’
누가 되든 피를 보기는 볼 것이다.
아이작은 그때 누구 손을 들어줄지 고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아이작과 르하르트가 성문 앞에 도달했을 때, 역시나 손님맞이는커녕 성문까지 굳게 잠겨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르하르트의 병사 중 한 명이 나서서 소리치려 하자 그를 제지하고 르하르트가 직접 나섰다.
“나는 르하르트 영주, 코벤 르하르트 백작이다! 문을 열어라!”
그러나 성벽은 묵묵부답이었다.
농성체제로 들어갔다기에는 성벽 위에도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르하르트는 몇 번 더 소리치고 카일을 향해 을러 보려는 듯하다가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문 열어, 이 오줌싸개 애새끼야! 침대에 지리고 베개 밑에 대가리 처박고 있을 때처럼 숨어 있으면 이번에도 아무도 모르는 척해줄 것 같냐! 열어!”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르하르트는 이웃 영주답게 내밀한 사정을 꽤 자세히 아는 것 같았다. 르하르트는 몇 번 더 카일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언급하며 문을 쾅쾅 두드리고 발로 걷어찼다.
결국 영주의 위엄을 걱정한 건지, 아니면 르하르트의 성대를 걱정한 건지 누군가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르하르트 백작님.”
“벡스터!”
꽤 나이 지긋한 모습의 기사였다.
르하르트도 그를 한눈에 알아본 듯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이 나왔군. 그 애송이보다 차라리 자네와 대화하는 게 낫지. 카일은 지금 어디 있나?”
“헨드락 영주님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휴식 중입니다. 내일 다시 오시겠습니까?”
“내일?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하늘에서 금무더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비루한 몸뚱이가 낫겠느냐?”
“손님으로 찾아오셨다면 손님답게 예의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르하르트 백작님.”
벡스터라 불린 기사는 힐긋 시선을 올려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존경받는 성배기사님 앞 아닙니까. 공명정대하신 빛의 법전 아래 명암이 선명하게 갈릴 것입니다.”
아이작을 언급하자 르하르트도 씨근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을 싸움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대놓고 들이받으면 르하르트의 처지도 곤란해진다.
르하르트는 다시 말에 올라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내일이다. 벡스터! 자네를 믿고 오늘은 물러가네만 내일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저라도 나서겠습니다.”
르하르트는 그 말에 군말 없이 병사를 물렸다. 아이작은 기사 한 명의 말에 르하르트가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벡스터라는 기사가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요?”
“으음, 제국 기사단 출신인데 존경받을 만한 품위와 실력을 가졌지요. 제국 기사단에서 은퇴했을 때 헨드락의 선대 영주가 데리고 온 기사입니다. 늙었지만 제국 기사단 경력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르하르트의 말투에는 존경과 신뢰감이 담겨 있었다. 그를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듯했다.
제국 기사단이라면 제국군 직속의 기사단이다.
황실 수호를 최고 우선순위로 잡는 황실 기사단과 달리 제국 기사단은 제국의 존속 그 자체를 위해 게르토니아 곳곳으로 파견되는 정예 요원들이라 할 수 있다.
‘오언이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했으니…… 벡스터가 단장이겠군?’
아마 그 젊은 기사들은 벡스터가 가르치기 시작한 기사들인 모양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를 만난 건가?’
아이작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벡스터는 여전히 서서 떠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먼 거리였지만, 아이작은 어째선지 벡스터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성배기사가 정말 르하르트 그 늑대 같은 놈이랑 같이 왔다고!!”
헨드락의 영주, 카일은 책상을 내려치며 일갈했다. 벡스터가 아이작과 르하르트 일행을 돌려보낸 직후였다.
다른 기사들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수근거렸지만, 벡스터만은 조용히 카일을 응시했다.
“대체 왜?! 오언, 자네가 성배기사와 함께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끝까지 같이 왔어야지!”
“예, 예. 하지만 이미 르하르트 백작과 뭔가 이야기가 된 듯한 상태인 데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작의 기사와 병사들을 그대로 성안으로 들여보낼 상태였던지라…….”
“아니, 잠깐…… 그런데 성배기사가 애당초 왜 우리 영지로 온 거지? 오언, 내가 그를 초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했나? 내가 그의 공을 치하하고 여정을 돕고 싶다고?”
“예. 했습니다. 영주님께서 존경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이작의 출현은 카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자신은 존경받는 성배기사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 보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 관해 털어놓으면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현명하고 선한 성배기사라면 이야기 속의 성자처럼 분명 바른 방향을 알려 줄 테니까.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그 성배기사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영주님?”
“라엘라.”
라엘라는 조용히 카일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아직도 그 성배기사의 목적이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나 분명한데도요?”
“……공연한 욕심을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려던 나를 꾸짖으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라엘라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는 사악한 책략에 휘말리신 겁니다. 그 작자가 이 아름다운 영지를 탐내는 것이 분명하군요. 그래서 르하르트와 손을 잡고 이렇게 곧장 달려온 겁니다. 로어커스 폭락사태조차도 영주님을 몰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카일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음모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자신의 책임은 없다는 이야기에 혹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자신이 이렇게나 몰락한 것은 음모 때문이지 결코 자신이 멍청한 판단을 하거나 눈치 없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지성이 속삭였다.
“그런…… 설마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만큼 영주님과 이 영지가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런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