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8)
58화. 피비린내 (2)
라엘라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영주님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중요하신 분입니다. 이 아름다운 영지를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분은 영주님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카일은 라엘라의 말이 점점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몰락은 사악한 무리들의 음모 때문이다. 음모에 휘말린 자신이 영지를 빼앗기는 것은 사악한 자들의 계략이 성공하는 셈이다.
즉, 영지를 지키는 것은 곧 악에 맞서는 것이다.
결코 돈을 떼먹는 것이 아니다!
“이 음모에 맞서셔야 합니다. 영주님. 게르토니아 제국의 최선봉에 계신 영주님께서 이 음모에 굴복하면 빛의 법전은 빛을 잃고, 규율 또한 지워질 것입니다.”
“내가…… 내가 나서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사악한 음모와 맞서게 된 영주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자이실지도 모릅니다! 이 악의 무리에 정면으로 맞서 최선봉에 서서 적을 분쇄하십시오!”
“아니,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조금…… 무섭군.”
카일은 좋게 말해 기사 타입은 아니다.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다.
결정적인 판단을 미적미적 미루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의욕적으로 진행했던 로어커스 투자는 파멸적인 결과로 끝났다.
그리고 그런 카일답게, 라엘라의 유혹에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르하르트 아저씨, 아니, 백작이 쳐들어왔다는 것도 불확실하지 않나? 작정하고 온 거라면 병사도 더 많이 데려왔을 테고, 공성 장비도 챙겨 왔겠지. 게다가 이제 파종기야. 농업이 주류인 르하르트 영지는 지금이 중요할 때지. 전쟁을 한다면 서둘러 끝내야 할 텐데 그럴 준비를 해온 것 같지는 않군. 내일까지 협상을 하기로 했으니 내일까지 지켜보도록 하지.”
라엘라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뭔가를 한참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영주님.”
***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은 뭘 결정하고 싶지 않을 때만 대가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군. 세상에, 이 우유부단한 멍청이가 여기서 이렇게나 시간을 잡아먹을 줄 몰랐어. 돌아버릴 지경이군.”
라엘라는 자신의 방에서 쉴 새 없이 걸어 다니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호출을 받고 온 흑기사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대 영주는 너무 똑똑해서 죽여 버렸는데 후대 영주는 너무 멍청해서 말을 안 들을 줄이야. 이제 어떻게 꼬드기는지 알아냈는데, 결국 뭘 결정하려면 한참 걸리니, 빌어먹을.”
“약을 써서 중독시키거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흑기사가 보다 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라엘라가 고개를 훽 돌렸다.
“지금 내 앞에서 기만과 음모를 조언하는 거냐? 붉은 성배의 천사, 칼라일 수도원을 통째로 만찬장으로 만든 나, 붉은 살점의 선지자 앞에서?”
흑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리석은 조언이었다. 기만과 음모는 붉은 성배가 가장 먼저 선택하는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처럼 명천사에 이른 자는 일개 인간에 비하자면 전지전능한 능력과 계락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진짜 눈앞의 여자가 진짜 붉은 살점의 선지자일까? 흑기사에게는 일말의 의심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라엘라가 덥썩 흑기사의 투구 눈가리개 부분을 짚었다.
그 순간 흑기사의 머릿속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아니, 실시간으로 붉은 성배의 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붉은 성배의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없다. 다만 누가 식객이고 누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느냐가 다를 뿐이다. 흑기사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잠시 뒤, 흑기사의 머릿속에 공포와 죄악감이 가득한 것을 들여다본 라엘라는 손을 거둬들였다.
흑기사는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심호흡했다.
라엘라는 그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곳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일을 진행하고 있다. 빛의 법전만큼이나 세상의 화로도, 엘릴도, 불사 교단도, 황금 우상도, 소금 의회도, 올칸 규율도 모두 중요해. 붉은 성배께서 현세의 일을 내게 맡기신 만큼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지.”
“죄, 죄송합니다…….”
“전 영주놈이 숨겨놓은 비밀을 찾으려면 카일의 정신을 멀쩡하게 남겨놔야 한다. 정신을 망가뜨리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게 돼. 다만 저 지능 수준이 과연 멀쩡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라엘라는 비아냥거리다가 혀를 찼다.
“다만 그때까지 이 영지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이 멍청한 놈은 됐어. 그보다 성배 기사를 만났지? 헤사벨을 찾았나?”
“예. 발견했습니다.”
흑기사는 아이작을 찾아 파견되었던 기사들 중 한 명으로 섞여 있었다. 헤사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낮에도 전신을 가리는 복장과 후드를 깊게 눌러쓴 미녀가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살아있는 걸 보니 배교한 게 맞는 모양이군.”
“예. 트롤을 이용해 교란을 일으켜 보았는데,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성배기사에게 충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배 기사가 묘하게 경계하는 듯하여 직접 심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 충성이라.”
라엘라는 웃기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양 속에서 살 수 없는 흡혈귀가 빛의 법전 성기사에게 충성해? 충성이 아니라 진지한 기만책이라면 차라리 믿겠어. 성기사를 속일 정도의 연기라면 오히려 인정해 줘야지.”
라엘라는 정말 그럴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헤사벨이 아이작의 신뢰를 사서 속이기 위해 거짓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녀는 신앙심을 느낄 수 있었다. 헤사벨의 신앙심은 붉은 성배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성배기사도 넋이 나간 모양이군. 어쩌자고 굴마르 가의 후계자를 곁에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큰 그림에는 중요하지 않은 놈이야.”
라엘라는 계곡 아래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길 잃은 아기 고양이의 목을 가져와라. 직접 그 입으로 뭐라고 야옹야옹 핑계 댈지 들어봐야겠다.”
***
“이 빌어먹을 자식.”
다음 날 점심, 르하르트는 여관 1층의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벡스터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욕설을 들었지만, 욕설의 방향이 벡스터가 아닌 카일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벡스터는 묵묵히 걸어 들어와 르하르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르하르트는 검집이 든 검을 바닥에 쿵 내려치며 쏘아붙였다.
“그래, 카일 헨드락 영주님은 여전히 몸이 안 좋으신가?”
“원체 몸이 약하셔서…….”
“그 꼬장꼬장한 얼굴로 용케 거짓말을 달고 사는군. 벡스터 경. 어린애 뒷바라지나 하는 게 피곤하진 않나?”
“다만 영주님을 받들 뿐입니다.”
담담한 대답에 르하르트는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제국 기사단의 단단한 충성심은 은퇴 후 다른 상관을 섬기면서도 유지되는 것 같았다. 르하르트가 벡스터에게 보이는 존중 역시도 저 꼬장꼬장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대신해서 대화하러 온 건가?”
“예.”
“상황이 안 좋네. 벡스터 경.”
르하르트는 수도의 귀족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심지어 빛의 법전 주교급 인물까지 엮여 있다는 사실과 브란트 공작가마저도 자기 이름을 팔았다는 사실에 언짢아한다…… 그런 이야기까지 곁들여 겁을 주었다.
길고 장황한 협박이었지만 단순한 협박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이번이 온건하게 해결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서 그렇네. 벡스터 경.”
르하르트는 한층 더 늙어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나? 나도 헨드락 영주의 피해자니 내 손으로 해결하면 큰 몫을 떼주겠다더군. 그쪽이 차라리 더 온건하게 해결될 거라고. 무슨 뜻이겠나?”
“해결 안 된다면 용병들을 고용할 생각인가 보군요.”
“그래. 전쟁 전문가들이 나서겠지. 놈들이 이 영지를 유린하고 나면 어떤 꼴이 되겠나? 혹시 주교가 여기에 이단심판이라도 벌이겠다고 하면? 그 꼴을 보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선 거야.”
결국 르하르트도 빚 받으러 온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일을 가장 온건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일이 성에 틀어박혀 버틸수록 최악으로 치달을 뿐이었다.
“영지를 잃을 수도 있겠지. 성이나 다른 재산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고. 헨드락 영지라는 이름만 남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내가 재기할 발판 하나 못 만들어 주겠나? 내가 선대 영주와 쌓아온 인연이 얼마인데?”
“사려 깊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벡스터는 묵묵히 대답할 뿐이었다.
르하르트가 그의 담담한 태도에 화를 내려던 무렵, 벡스터가 입을 열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르하르트는 멈칫했다.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예. 그러니 당분간만이라도 싸움이 날 수도 있는 일은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사소한 싸움도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부디 영지 일은 영지 안에서 해결할 기회를 주십시오.”
벡스터를 알고 지낸 이래 그가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을 처음 보는 르하르트는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는 이 사태를 ‘영지 일’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영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르하르트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틀…… 이틀 주겠네. 이틀 뒤에는 조사단이 올 거야. 핀체트 주교가 파견한 이단심문관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있네. 그 전에 해결할 방법을 찾게.”
“감사합니다.”
벡스터는 허리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르하르트는 한층 더 피곤해진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회의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작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벡스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이작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성배기사 아이작 님 되십니까?”
“음? 예. 맞습니다만.”
벡스터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속삭였다.
“괜찮다면 조용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아이작과 벡스터는 여관의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이작은 벡스터가 왜 대화를 청했는진 몰라도 그가 갑자기 싸움을 거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싹수가 있어 보인다면서 실력을 보자고 한다거나, 아니면 적이 될지도 모르니 미리 죽어라! 라고 한다거나.
같잖은 생각이었다.
단지 호기심 때문에 해 본 생각일 뿐이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데.’
기세만 놓고 보자면 게벨과 비슷하거나 약간 못해 보였다. 성기사가 아닌 기사 중에서 이렇게 강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제국 기사단 요원이라는 말이 허명은 아닌 듯했다.
나이 때문에 은퇴했으니 한계가 있겠지만, 헨드락 기사단 일곱 명을 합친 것보다는 강할 것 같았다.
“여기가 좋겠군요.”
벡스터는 나무 아래 멈춰 섰다. 주변에 들을 만한 사람도, 숨을 만한 장소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벡스터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헤사벨 굴마르는 성배기사님께 귀화한 것입니까?”
뜬금없는 이름에 아이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헤사벨 굴마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굴마르 가의 후계자가 쇠르에서 유크하르의 개가 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제법 퍼졌습니다. 당연히 헛소문으로 여겼지만, 정황상 의심할 여지는 있어 보였지요. 그런데 수배서와 같은 얼굴이 성배기사님 곁에서 보이더군요. 상황을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동료로 받아들이자마자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다니. 아이작은 헤사벨을 이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가에 심각한 고민을 느꼈다.
자신을 헤사벨을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과 더불어 헤사벨 그녀가 버리기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킨다면 차라리 떼어 놓고 활동하는 게 나았다.
아이작이 아니라고 잡아뗄지, 아니면 몰랐다고 둘러댈지 고민하다가 벡스터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예.”
아이작은 당당하게 말했다.
“붉은 성배 클럽의 추종자,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헤사벨 굴마르는 쇠르에서 빛의 법전의 영광을 목도하고 교화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제 종복입니다.”
본래 사악한 이교도였으나 신성한 성기사를 만나면서 교화되는 이야기.
얼마나 흔하고 멋지면서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