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9)
59화. 피비린내 (3)
“교화되었다…… 라.”
벡스터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되새겼다.
“솔직히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하군요.”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들릴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헤사벨이 그의 종복이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말 잘 듣는 개가 되긴 했으니까.
“그걸 따져 물으려고 절 찾은 겁니까?”
“예. 지금 상황에서는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벡스터는 음울한 눈동자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배 기사님의 훌륭한 인품을 믿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성의 내부 사정이…….”
벡스터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던 기사답게 무언가를 쉽게 떠드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드물게도 초조함이 엿보이는 표정을 드러내며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당장 확인할 도리가 없군요. 그렇다면 아이작 님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만 알아주십시오. 저희도 싸움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르하르트에게도 했던 이야기였다.
‘싸움을 피할 방법에 헤사벨이 관련되어 있다는 건가?’
아이작은 의아한 듯 벡스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뭔가 더 설명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이작은 은근슬쩍 혼돈의 눈을 사용해 보았다.
‘역시 제국 기사단이라 그런가…… 내면을 숨기는 게 익숙하군.’
아쉽게도 벡스터의 내면은 거의 비치지 않았다.
힘을 좀 더 강하게 쓰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눈깔을 비집고 촉수가 튀어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제국 기사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벡스터는 꾸벅 인사한 뒤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헨드락 성으로 돌아갔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헤사벨을 불렀다. 헤사벨은 2층 창문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곧장 고개를 내밀었다.
“부르셨습니까. 아이작 님?”
“네가 내 옆방에서 머무르고 있던가?”
“아뇨. 방은 잡았지만 아이작 님 방 천장 위에서 밤새도록 주무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밤에 잘못 발견하면 심장마비 걸릴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떠오른 말을 삼키고 지시했다.
“소름 돋는 짓은 그만하고 오늘은 네 방에서 자라.”
***
헨드락 영지에도 다시 밤이 찾아왔다.
마을 주민들은 이웃 마을 영주가 성도 아닌 마을 여관에 머무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아무도 사정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헨드락 영주에게 가서 물어보려 해도 성문은 굳게 잠겨 침묵하고 있었다.
이 기묘한 대치 속에서, 주민들은 은밀하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헤사벨은 그런 이야기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밤마다 주민들이 다른 술집에 모여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아도 야밤을 배회하다 보면 예민한 귀는 그런 은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헤사벨은 오늘, 한밤의 마을을 배회하는 대신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덕분에 헤사벨은 할 일 없이 지금까지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전쟁과 음모, 배신, 유혹이라.’
붉은 성배 클럽의 일원이었던 그녀에게는 매혹적인 주제였다. 헨드락 영지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헤사벨은 아이작이 또 무슨 기만 작전을 펼칠지 기대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사벨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 쪽이었다.
창밖에 박쥐 한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붉은 눈동자로 헤사벨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사벨 굴마르.”
헤사벨은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 기괴한 초저주파 울림은 오로지 헤사벨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밤중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받들라.”
붉은 성배 클럽에서 보낸 사자였다.
헤사벨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침대 위에 무릎 꿇고 메시지를 기다렸다.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세뇌에 가까운 가르침은 그녀의 몸을 조종하다시피 했다.
“속삭임에 귀 기울입니다.”
“헤사벨 굴마르, 너의 믿음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있는 것을 느낀다. 너를 만찬장 위에 올리기 전에 해명할 수 있나?”
붉은 성배 클럽은 같은 편일 때에는 온갖 달콤한 말로 아첨하고 현혹하지만, 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즉시 상대방을 식재료 취급한다.
식욕과 살의는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헤사벨은 붉은 성배의 이빨이 자신의 목젖까지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이미 주변에 자신을 ‘요리’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만과 음모의 주인을 섬깁니다.”
“곧게 말하라. 네 주인은 붉은 성배인가, 아니면 성배 기사인가?”
도망갈 퇴로나 돌려 말할 수단조차 끊어 버리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헤사벨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둘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님은 붉은 성배께서 안배하신 가장 거대한 음모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예언에 나오는 ‘세상을 속이는 기만자’라고. 오히려 저야말로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 네가?”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아이작 님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붉은 성배께서 이 거대한 기만을 이미 알아차리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천사 중 한 분이시리라 생각됩니다만, 혹시 천사님께서 붉은 성배께서 예비하신 거대한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시고 책임을 제게 돌리시는 건 아니신지요?”
“하하하.”
박쥐가 낮게 웃었다.
헤사벨도 함께 웃었다.
웃음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창문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시커먼 안개에 휩싸인 흑기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흑기사는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를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헤사벨은 민첩하게 피했으나 창에서 생겨난 강력한 와류가 침대를 휩쓸었다. 침대는 물론 바닥까지 으스러뜨릴 정도의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 회피에 능한 헤사벨조차도 공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녀는 붉은 탄원을 써서 빠져나오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기적이 봉인되어 있었다.
“배교자를 죽여라.”
흑기사는 박쥐가 시키는 대로 헤사벨을 완전히 처치하기 위해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때 그는 헤사벨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포자기하거나 정신이 나가 웃는 것이 아니었다.
“기만은 이쪽이 한 수 위인 것 같군요.”
그제야 흑기사는 방안이 기이할 정도로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방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순식간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덮쳐 왔다.
***
콰쾅!
흑기사가 굉음과 함께 창밖으로 튕겨 나갔다. 놈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안개가 긴 궤적을 만들었다. 새로 얻은 능력, ‘저 너머의 색채’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에 성공한 아이작은 어둠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하군요. 아이작 님! 아이작 님 말씀대로 암살자가 찾아왔습니다!”
헤사벨이 기쁜 듯 외쳤지만 아이작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틈에 막다니?’
아이작은 생존을 건 싸움에서 실력을 보겠답시고 일부러 약한 공격 따윈 하지 않는다. 다만 적에게 패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촉수를 꺼내지 않았을 뿐, 그가 가진 가장 강한 검술인 여덟 갈래를 사용했다. 덕분에 헤사벨의 방은 난장판이었다.
메시지 전달자로 사용된 박쥐는 죽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흑기사는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아이작은 녀석이 충격에서 회복되기 전에 뛰어내리며 칼로 내리찍었다.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녀석은 아까보다 훨씬 더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이걸로 아이작은 놈이 검술 실력만으로는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벡스터나 게벨 정도 되려나? 상당한 실력자로군.’
갑옷을 두르고 있는 어두운 기운은 여전해서 무슨 갑옷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쩌저저저적!
검이 다시 한번 맞부딪쳤다. 아이작이 가진 심판의 검은 흑기사의 검은 안개와 맞닿자 맹렬한 불꽃을 피워 올리며 주변을 불태웠다. 검을 중심으로 검은 안개가 걷혀나가자 흑기사는 서둘러 아이작을 튕겨 냈다. 힘도 아이작보다 우위였다.
‘갑옷 안에 촉수를 두르고 있는데도…….’
아이작은 칼센 밀터의 갑옷을 장착하고 있었다. 갑옷 안쪽은 촉수가 촘촘하게 감싸고 있어서 충격을 경감시키는 동시에 그의 완력까지도 보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기사의 힘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흑기사는 곧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 아이작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하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아이작은 빠르게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이 아니었다면 피 좀 흘렸겠는데…….’
갑옷에는 꾸준하게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조개의 껍질이 아무는 모양으로 즉각적으로 복구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긴 했지만, 갑옷을 뚫고 칼이 파고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상급 검술을 발동시키기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오히려 흑기사가 차분하게 일련의 동작을 펼쳤다.
순간적으로 아이작은 흑기사의 몸이 둘로 나뉜 듯한 착시를 느꼈다. 흑기사는 검을 내려치는 동시에, 아래서 베어 올렸다.
까가가각!
아이작이 방어하기로 선택한 공격은 내려치기였다.
쾅! 다행히 정답이었다.
문제는 정답이 두 개였다는 점이었다.
아래서 올려 벤 검이 아이작의 허리를 강타했다. 칼센 밀터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속에 든 것을 게워 낼 뻔한 고통을 억누르며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려치기를 막길 잘했군.’
아이작이 내려치기를 막은 이유는 잘못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려 베기는 맞아봐야 중상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맞아보니 아니었다.
‘갑옷이 아니었으면 몸이 양단 났겠어…….’
아니, 그 전에 몸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와서 흑기사와 마을 전체를 잡아먹고 ‘헨드락 마을’을 ‘헨드락 마을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놓겠지.
그러면 아이작이 그간 고생한 것은 말짱 헛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오랜만에 자신을 몰아붙인 상대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며 다시 칼을 쥐었다. 그러나 흑기사는 짜증스럽게도 다시 아이작에게 기회를 줄 생각 없다는 듯 검술을 재차 펼쳤다.
이번에는 세 가지 동작이 한꺼번에 아이작을 덮쳐 왔다.
그때 아이작은 헤사벨의 의지를 느꼈다.
그가 고개를 홱 돌린 순간, 그의 투구 옆을 스치고 흑기사의 안면부를 석궁 화살이 꿰뚫었다. 흑기사는 기이한 괴성을 터뜨리며 휘청거렸다.
“잘했다!”
뛰어난 실력자라면 살기를 느끼고 몸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헤사벨은 암살자답게 아이작의 뒤쪽 어딘가에 숨어 살기를 교란시켰다. 아이작과 의지가 공유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묘기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흑기사를 몰아붙였다. 흑기사는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능숙하게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노림수는 공격이 아닌 그다음에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전투가 길어지면서 소란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나거나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하던 전쟁이 진짜 일어나는 건가 했지만 막상 거리에는 치열하게 싸우는 두 기사뿐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자 흑기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흑기사는 애당초 이렇게 시선을 많이 끌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헤사벨을 처치한 뒤 빠져나갈 생각이었겠지.
보는 눈이 많아지면 아이작도 불리하지만 놈도 불리해진다.
‘뭣보다 여기는 게르토니아 제국 영지다, 이 사악한 놈아.’
누군가 결국 섬광의 기적이 담긴 하급 성물을 발동시켰다. 아이작이 어렸을 때 선물 받았던 적도 있었듯이, 백제국 안에서는 가장 흔한 기적이었다. 눈부신 섬광이 흑기사를 덮친 순간 놈의 몸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아이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 앞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시켰다.
콰자자자작!
여덟 갈래의 공격이 모두 흑기사의 몸에 적중했다. 심판의 검은 흑기사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안개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그중에서도 아이작이 신경 써서 적중시킨 머리의 투구가 깨져 나갔다.
박살 나며 떨어진 투구 아래 피 흘리는 얼굴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 그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오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