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61)
61화. 일인공성전 (1)
카일은 자신의 목젖 가까이 다가오는 칼날을 보고서야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반역이다!”
카일의 외침에 병사들이 술렁이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기세의 벡스터와 기사들의 압력 앞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꼼짝없이 포위된 카일은 이를 악물고 벡스터를 노려보았다.
“네 놈, 아버님이 거두어 주신 은혜도 모르고…….”
“거뒀다고? 나는 제국 기사단원이다. 은퇴했다고 내가 다른 주군을 섬길 것 같은가?”
벡스터는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국 기사단은 제국에만 충성한다. 그것은 은퇴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선대 헨드락 영주가 기사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벡스터의 노후를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데려왔을 뿐이었다.
즉, 고용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벡스터는 어쨌거나 카일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조용히 항복해라. 이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말이다.”
선대 헨드락 영주를 생각해서라도 카일을 지금 제지하는 것이 나았다. 공성전이 벌어져 영지가 피폐해지고 무수한 피가 흐르면 절대로 목숨을 건질 수 없다.
벡스터는 기사로서 뭐가 됐든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 싸움은 달랐다. 이것은 버티는 것이 불명예스러운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명예가 아니라 불경한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네가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영지는 유지하기 어렵겠지만…….”
카일은 다 글렀다고 판단한 듯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정신적 무능은 뭐냐?”
카일의 말에 딱딱한 돌덩이 같던 벡스터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당혹스러움이 흐르다가 한 명이 벡스터에게 속삭였다.
“정말 모르나 본데요?”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 네 무능을 대변한다. 카일 헨드락.”
카일은 억울했다. 횡령, 배임, 배교, 불화 조장 모두 억울했지만 그중에서도 정신적 무능이 가장 억울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억울함을 토로할 시간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카일의 손을 포박했다.
벡스터는 다른 기사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마을로 가서 르하르트 백작과 성배기사에게 헨드락 영주가 항복한다는 메시지를 전해라. 지금 우리의 진짜 적은 헨드락 영주가 아니라 이 안에…….”
“벡스터 경.”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벡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검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엘라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영주님께 무슨 무례한 짓을 하고 계십니까?”
“라엘라.”
벡스터는 차갑게 내뱉으며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붉은 성배의 탕녀다. 즉시 제압하여 지하 감옥에 감금해라.”
벡스터는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선대 영주의 죽음 이후부터 쭉 진행해 왔던 조사였다.
그는 동원할 수 있는 선을 총동원해 도움을 얻은 끝에 라엘라가 붉은 성배 클럽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라엘라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조종당하는 영주를 끌어내려야만 했다. 때문에 자신이 가르치던 헨드락 기사단을 우선 포섭했다. 이미 영주의 무능으로 봉급마저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섭외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성배기사랍시고 마을로 찾아온 자는 곁에 같은 붉은 성배 클럽의 시녀를 데리고 있었다. 때문에 벡스터는 아이작에게 다급히 상황을 묻고 파악하고서야 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탕녀라니, 무례하군요.”
라엘라는 웃으며 다가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벡스터는 라엘라의 등 뒤에 서 있던 흑기사를 발견했다. 다른 기사들은 같은 헨드락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여긴 건지 신경 쓰지 않고 다가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흑기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쾅, 콰득!
다른 기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흑기사가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기사 하나의 몸뚱이가 갑옷째로 절반쯤 잘린 채 쓰러지고, 다른 기사 하나는 양단 나서 상반신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벡스터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경악하며 칼을 세웠다.
“오언? 네가 왜!”
그제야 벡스터는 흑기사가 지금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오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오언은 벡스터가 제일 열심히 가르쳤던 기사였지만, 그가 알기로 오언에게 이런 실력은 없었다.
오언은 대답 없이 성큼 다가왔다.
벡스터는 이를 악물고 칼을 겨누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앞선 기사 둘이 당한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의 상급 검술을 보유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벡스터도 상급 검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빡, 빠각, 쩌억!
순식간에 검날이 맞부딪쳤다. 세 번의 공격이 날아왔다. 두 번은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마지막 한 번은 벡스터의 허벅지를 무참하게 베었다. 벡스터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는 오언을 올려다보았다.
“이 개자식…….”
오언은 대답도 없이 벡스터의 목을 날려 버렸다. 무참하게 굴러가는 머리통의 모습이 성벽 위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카일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벡스터가 패배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카일은 멍하니 그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오언은 기사들을 한마디 말도 없이 응시했다.
기사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병사들마저도 무기를 버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카일 곁으로 라엘라가 다가왔다.
“구해 드렸습니다. 영주님. 고마우시죠?”
그녀의 달콤한 속삭임에 카일은 뒤늦게서야 벡스터가 했던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지금 항복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던 그 말을.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
“역시나 벡스터 경에게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군.”
르하르트는 아쉽다는 듯 성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향후 진행될 공성전을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하던 기사들은 의아한 얼굴로 르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겠습니까?”
“벡스터 경이 카일을 두들겨 패서라도 내보낼 줄 알았다. 그것도 안 된다면 꽁꽁 묶어서라도……. 이번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굳이 말해줬으니 말이야.”
르하르트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공성전을 준비하면서도 극적인 반전을 기대했다. 전면전은 양쪽 모두에게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타협이 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실리적인 이유에서도 기대하긴 했지. 지금 우리는 병사 100명과 기사 15명이 전부다.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공성전은 턱도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드락 쪽에서 먼저 밀고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기사들의 수준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헨드락 기사단은 이제 막 만들어진 지 10년도 채 안 된 데다 벡스터 외에는 수준이 높지 않다.
하지만 르하르트는 넓은 농지를 보호하기 위해 꾸준하게 기사들을 양성해왔고, 봉토를 하사받은 낮은 귀족 계급의 기사들도 있었다.
때문에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은 결국 벡스터 말고는 없다는 게 르하르트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성채 안쪽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카일도 ‘현명한 선택’을 강요받을 테니…….”
르하르트가 낙관론을 늘어놓을 때였다.
“침략자들은 들어라!”
성벽 위를 올려다보자 어제 기습했다가 도망친 오언이 서 있었다.
“감히 영주를 몰아내고 헨드락 영지를 모욕하려던 배신자 벡스터 오하르는 죽었다! 다음은 네놈들 차례다!”
“뭐야, 무슨 일인가?”
“그, 그게…….”
르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설마하면서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거라고 생각 못 했던 르하르트는 이후 닥칠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작님!”
기사 하나가 급히 르하르트의 몸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제야 그는 헨드락 성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헨드락 성채의 성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기사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헨드락 기사단의 기사들은 비탈길을 순식간에 돌파해 달려왔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방책은 기사들을 전혀 제지하지 못했다.
이내 맹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병사들과 함께 앞쪽에 있던 르하르트 역시 그 충돌에 휘말려 굴러갔다.
헨드락 기사단의 기사들은 단숨에 르하르트의 병사들을 짓밟아 버리며 돌파했다. 기습의 효과는 엄청났다. 순식간에 병사들 수십 명이 도살당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어쩌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잔뜩 훈계나 늘어놓은 다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르하르트의 환상은 산산이 깨졌다.
“백작님!”
“침략자를 죽여라!”
헨드락 기사 중 한 명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들이 서로 부딪쳤다.
르하르트는 솔직히 자신의 기사 한 명이 헨드락의 기사들 둘쯤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르하르트는 눈앞에서 기사들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검이 맞부딪치면 검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부러지고, 충돌하면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단순한 수련 차이라고 보기 힘든 일이었다.
헨드락 기사 중 한 명이 벌게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르하르트를 발견했다. 르하르트는 그의 눈이 광기로 물든 것을 확인했다.
아주 오래전, 여명군 시절에나 보던 광기에 찬 병사들이 떠올랐다.
“죽어라!”
두두두두두. 헨드락 기사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의 창끝이 르하르트의 목을 꿰뚫는가 싶은 순간, 어디선가 달려온 그림자가 맹렬한 기세로 부딪쳤다.
쾅! 거대한 흑마를 타고 나타난 아이작이 헨드락 기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기사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능숙하게 말을 움직여 말발굽으로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지면에 머리통이 처박힌 기사는 꿈틀거리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
“백작! 일어나십시오!”
아이작이 짧게 지시했다. 하지만 르하르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말에서 뛰어내려 르하르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야! 정신 차리라고!”
그제야 르하르트는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이작은 비틀거리는 르하르트를 말에 다시 태우고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을 휩쓸어 버린 헨드락 기사단은 다시 말을 돌려 잔병과 르하르트를 처리하려 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를 발견했다. 말을 베어 쓰러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말은 그 속도와 무게 자체가 흉기다. 정면충돌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헤사벨!’
아이작이 의지를 통해 강한 신호를 보내자 날아든 화살이 말의 눈을 꿰뚫었다. 그 서슬에 함께 달려오던 말 두어 마리가 함께 쓰러졌다.
아직 해가 떠 있었기 때문에 헤사벨은 마을 지붕 아래 숨어 저격을 수행하고 있었다. 난전 상황이라 기사들은 누가 누구에게 저격당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드락 기사들은 땅에 떨어진 충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아이작과 르하르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쥐고, 없으면 맨손으로 찢어 죽이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이 투지로 트롤과 싸웠다면 두세 명만 있어도 트롤을 잡았을 텐데.’
정상적인 투지가 아니었다.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양치기 목상처럼 느슨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정신 속박이다. 아니면 약물을 썼거나.
피에 미친 꼴을 보아하니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헤사벨이 달려오는 기사들을 노려 화살을 쏘았지만, 말과 달리 갑옷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어쩌다 맞는 놈도 통각이 마비된 듯 달려왔다.
마침내 가장 앞서 온 기사와 아이작이 충돌했다. 기사는 메이스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아이작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첫 번째 기사를 시작으로 아이작은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기사들의 수준 자체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광기와 완력이 더해진 것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아이작은 포위당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난전을 위해 태어난 기술, 아발란체 검술: 전조 동작이 펼쳐졌다.
산을 울리는 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아이작을 둘러쌌던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나동그라졌다.
팔다리가 무사한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갑옷이 우그러지거나 찢어진 흔적도 보였다.
‘위력이…… 꽤 늘었군?’
늑대를 사냥하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