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일인공성전 (4)
오언은 아이작의 대답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쥔 순간부터 그는 성배기사를 동경해 왔다.
하지만 그는 성기사는 물론 제국 기사단에 들어갈 실력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칼과 갑옷 덕분에 그나마 검에 익숙한 동네 청년일 뿐이었다.
오언의 재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라엘라에게 성기사처럼 신의 권능을 허락받을 수 있다는, 막강한 힘과 재능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부정한 길을 걷게 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성배기사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작을 만났을 때 보였던 존경의 표시는 거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어린 성배기사를 동경하고 있었다.
비록 그와 맞서게 되었지만, 그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만족한다고.
‘그랬는데…….’
오언은 쉴 새 없이 난입해 오는 촉수들을 쳐 내느라 정신없었다. 촉수들은 질기고 잘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잘린 것조차도 거머리마냥 갑옷에 달라붙어 갉아먹고 구멍을 냈다.
갑옷을 보호하는 검은 안개조차도 소용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조차 먹어 치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악한……!”
붉은 성배의 힘을 빌린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불길하고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이건 무슨 신앙인지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신앙이 맞긴 한 건가? 괴물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촉수 조각 하나가 갑옷 안쪽으로 파고든 것인지 종아리 안쪽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촉수는 그의 피부 안쪽을 파고들어 허벅지까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오언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
어떤 확고한 목적의식이 오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명령에 의한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사명감에 가까웠다.
오언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 성배기사를 사칭하며 칭송받는 숭고한 여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럴 수 있나? 그래도 되는 건가?
오언은 이 사악한 존재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을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을 때 어떤 본색을 드러낼지 상상해 보았다.
‘막아야 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붉은 성배에 조종당하는 흑기사 오언이 아닌, 어린 시절 성배기사에 대한 동경을 막 품었던 어린아이였다.
오언은 전신을 파고들려는 촉수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아이작의 눈이 커졌지만 오언은 목숨을 던질 각오로 온 힘을 다해 아이작을 내리찍었다.
콰득!
그 순간 오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을 흠뻑 적시는 피는 느낄 수 있었다. 피가 눈에 스며든 것인가 싶어서 눈을 문질러 닦아 보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서 무언가 근질근질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금은 꽤 용감했어. 오언.”
존경했던 성배기사가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오언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언은 검을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휘둘렀지만 닿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퍽, 콰득, 콰드드득.
전신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종기가 급속도로 자라다가 터지는 것 같았다.
“네 몸에 저 너머의 기생충을 잔뜩 박아넣었다. 게 껍질이 꽤 단단한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속살은 평범하게 야들야들한 모양이군?”
기생충? 그런 것은 모른다. 하지만 오언은 자신의 갑옷과 피부 안쪽을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시각을 잃었으며, 안구까지 기어 올라간 기생충이 눈을 통해 튀어나와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이대로 죽이기는 아까우니까 좀 더 숙성시키면 지힐렛 같은 쓸 만한 놈이 될지도…….”
“나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나?”
오언은 이제 움직이지 못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 물었다. 아이작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숭고한 여정에 위협적인 대적자였나?”
아이작은 대답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남겠다.”
오언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일대의 새벽 안개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이게 또 무슨 짓거리인가 했을 때, 주변에 쓰러져있던 병사들이 마치 흡착되듯 오언을 향해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퍽, 퍼퍽!
시체가 된 병사들은 물론, 부상병, 심지어 관문 근처에 있던 병사들까지 끌려오기 시작했다. 오언 주변에 순식간에 사람의 산이 쌓였다.
살아 있는 사람, 죽은 사람 모두 뒤엉킨 아수라장이었다.
아이작은 그것들이 오언을 중심으로 녹아내려 합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언 안에 흩뿌렸던 기생충들도 수많은 자아와 살점에 묻혀 더 이상 의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
아이작은 이 괴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Abomination)…….’
붉은 성배 클럽에서 사용하는 중위 소환체 중 하나였다. 이런 권능까지 부여해 주다니, 라엘라가 작정하고 아이작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에 융합된 병사 중 하나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라는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네 여정은 여기까지다. 성배기사.”
***
헤사벨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라엘라가 있는 방을 찾아갔다. 숙련된 암살자인 헤사벨에게 라엘라의 방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 새벽에 불이 켜져 있는 유일한 방이기도 했다.
방문은 열려있었다. 하지만 그 초대하는 듯한 문을 굳이 열고 들어가는 대신, 라엘라는 붉은 안개로 변해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방은 온갖 호사스러운 물품들과 아름다운 장신구, 가구들로 가득했다. 일반적인 시녀가 쓴다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것들이었다. 단순히 호화로운 것이 아닌 진짜 귀족들이 쓸법한 명품들이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라엘라가 붉은 안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라는 생각에 헤사벨은 조용히 변신을 풀었다.
“나의 기적을 잘도 사용하는구나, 헤사벨.”
붉은 탄원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천사가 되었을 때 만들어 내고 사용한 의식이었다. 이 의식을 통해 그녀는 피부를 벗고 살과 피와 뼈를 자유롭게 분해했다가 다시 형성하는 기적을 거쳤다. 이후 이 기적은 그녀의 사랑을 받는 혈통에게 부여되어 이어졌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님을 뵙습니다.”
헤사벨은 최소한의 예의만을 표시했다. 이미 적대하는 관계가 된 마당에 이 이상의 예절은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창문을 넘어오기 전에 기적을 거두어 창밖에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 거다.”
“……예. 물론입니다.”
헤사벨이 가진 권능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붉은 성배에게서 받은 권능이다. 붉은 성배의 천사인 라엘라는 얼마든지 그 기적을 거두고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녀를 암살하기 위해 오언을 보냈던 밤처럼.
라엘라는 부드럽게 다리를 꼬면서 헤사벨을 응시했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헤사벨. 이 제안을 위해 너를 끌어들였다.”
헤사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듣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라엘라는 미소로 응답했다.
“성배기사에게 나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해라. 그리고 그에게 돌아가서, 그의 목에 칼을 박아넣어라.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그건…….”
“그렇게 한다면 네 가문은 계속해서 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굴마르 공작가는 붉은 성배의 피를 직접 받아마시기도 했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었다. 사후세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다른 천사들과 달리 현세에 자주 모습을 보이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으니까.
“네 백부가 실종되고 후계자까지 배교한다면 공작가는 크게 흔들릴 거다. 이미 가주는 난리가 났더군. 네 아버지를 실망시킬 생각이냐?”
“저는…….”
헤사벨은 주춤했다.
아이작에게 굴복한 것은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문이 몰락한다면? 가문의 수많은 식솔들과 자신을 믿고 의지하던 동생들, 아버지는?
붉은 성배 클럽은 몰락한 자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헤사벨.”
라엘라의 채근에 헤사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고민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헤사벨은 조용히 라엘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엘라는 만족한 듯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헤사벨을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헤사벨은 갑자기 온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켰다.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라엘라를 휘감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순간에 녹여 없앨 수도 있는 강력한 흡혈 능력이 발동되었다.
우둑.
그러나 다음 순간, 헤사벨은 라엘라의 손에 목이 붙잡혀 있었다.
라엘라는 그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은 모습으로 헤사벨의 목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대체 뭘까, 헤사벨?”
라엘라는 오른손에서 돋아난 스무 개의 손가락으로 헤사벨의 목을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헤사벨은 권능을 써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모든 기적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그 성배기사가 뭐길래 네가 공작가의 지위와 경력과 가족까지 다 버리고 네가 이렇게까지 할까? 단순한 공포? 강압적인 복종? 아니야. 뭔가가 분명 더 있어.”
라엘라는 헤사벨의 의도를 캐내려는 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애당초 그녀는 헤사벨이 항복하리라곤 생각조차 안 했다.
헤사벨의 침입을 허용한 이유는 그녀를 통해 아이작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헤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라엘라는 목을 압박하는 손을 살짝 풀어 주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헤사벨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촉수 한 가닥이 라엘라의 눈을 꿰뚫었다.
콰득! 상당히 깊숙이 꿰뚫린 라엘라는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을 잃었다. 헤사벨은 급히 라엘라의 손에서 빠져나와 호흡을 가다듬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준비해 온 단검으로 라엘라의 심장이 있을 부위를 연달아 찔렀다.
콱, 콱, 콱!
1초도 안 되는 사이 라엘라의 심장은 너덜너덜해질 만큼 구멍이 뚫렸다. 여기까지였다.
‘이렇게 쉽다니?’
헤사벨은 놀랍도록 일이 잘 풀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이작은 암살하는 시늉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헤사벨은 결코 일을 대충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라엘라에게 들킬 것은 뻔했다. 기적을 금제당할 것도 알고 있었다. 라엘라 앞에서 헤사벨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라엘라는 오직 ‘붉은 성배 클럽 신앙의 기적만을 거둘 수 있다’는 것.
헤사벨은 아이작이 축적해 온 신앙을 소모해 기적을 하나 더 받았다.
촉수의 기적.
이름 없는 혼돈이 베푸는 가장 기초적인 기적 중 하나였다.
헤사벨은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라엘라의 머리라도 잘라야 하나 했다. 어차피 천사는 죽지 않고 일시적으로 추방될 뿐이지만 그래도…….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라엘라가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헤사벨은 라엘라를 올려다보았다.
촉수가 꿰뚫은 라엘라의 눈 쪽 구멍이 기이할 정도로 크게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시커먼 구멍이 헤사벨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눈구멍 사이로 새하얀 손가락들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들은 구멍을 크게 벌리며 밖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헤사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정도면 아이작이 시킨 일 이상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고 믿으면서.
“아이작 님!”
쿵, 쿵쿵, 쿵쿵쿵!
헤사벨은 미친 듯이 복도를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성이 기이한 진동과 소음으로 가득했다.
마치 성 전체가 거대한 심장이 되어 뛰는 것 같았다. 이제 아이작이 나타나 뭔가 해야 하지 않나? 라엘라를 암살하고 나면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흰 갑옷에 금발.
그녀가 신봉해마지않는 성배기사, 아이작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 자신이 그만큼이나 아끼는 부하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아이작님,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아니, 나도 쫓기는 중이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지나쳐 가며 대답했다.
쿵쿵쿵쿵!
그제야 헤사벨은 아까부터 성을 울리던 기묘한 진동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서 천장과 바닥을 가득 메운 채로 달려오는 거대한 살점 무리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헤사벨은 그제야 아이작의 뒤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