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66)
66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2)
어보미네이션 안에서 요동치는 자아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아는 역시 오언의 것이었다.
오언은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 아이작을 죽인다는 가장 단순한 목적을 가지면서도, 전략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전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이작을 몰아넣은 뒤,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놈의 몸을 융합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그리고 동시에 동경하던 성배기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황홀한 선택지였다. 그래서 아이작이 오히려 주먹을 맞부딪쳐 왔을 때, 의아해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에 쾌재를 불렀다.
아이작의 손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와 그의 손을 찢어발기고, 짓이기는 순간에도 그는 비웃었다.
이제 아이작에게 남은 것은 어보미네이션의 무수한 살점 속에 파묻혀 녹아내리는 길뿐이었다.
“오오오오오오!”
어보미네이션은 이제 아이작의 왼손을 넘어, 팔꿈치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이작은 집어삼켜지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요하지 않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언은 그 얼굴마저 삼켜 버리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강렬한 허기를 느끼면서였다.
‘배가 고프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오직 분노와 살의만을 느껴야 할 의지 안에 엉뚱한 생각이 끼어든 것이다. 심지어 수십 명의 사람을 흡수하고 아이작까지 집어삼키는 와중에.
이미 아이작의 어깻죽지까지 흡수했는데도, 오언은 맹렬한 허기에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아무거나 먹으면 탈 난다.”
어보미네이션의 몸이 꿈틀거렸다.
순간 오언은 자신의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방의 벽을 밀어낼 정도로 비대해졌던 몸이, 어느새 상당히 쪼그라들었다는 사실까지도.
잘못됐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
어보미네이션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려 했다. 살의를 압도하는 생존 의지였다.
오언은 분노하며 다시 어보미네이션을 조종해 아이작을 덮치려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의 어깻죽지에서 멈춰 도망치지도, 더 이상 덮치지도 못했다.
더욱 강한 허기만을 느낄 뿐이었다.
어보미네이션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오직 아이작뿐이었다. 아이작은 꽤 오랫동안 채우지 못했던 허기가 서서히 충족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가포식(autophagy).’
세포가 자신의 단백질이나 불필요한 성분을 스스로 포식해 에너지를 얻는 현상.
그것이 어보미네이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과 그의 촉수를 흡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반대였다.
이미 촉수가 어보미네이션의 주도권을 빼앗아 자가포식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일용할 한 끼 식사로 만들기 위해서.
“아아아아아아!”
오언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몸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하지만 어보미네이션의 주도권은 이미 완전히 아이작에게 넘어가 있었다.
인간 수십 명의 의지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는, 초월적이고 강렬한 의지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보미네이션이 가지고 있는 의지보다 더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근본적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채울 수 없는 강렬한 허기.
오언은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를 입으로 이미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어보미네이션은 촉수에 의해 산산조각 나 개별적으로 흡수당했다.
아이작이 어보미네이션을 완전히 자가포식하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먹어 치운 사람에 비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 먹은 양은 보기보단 적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식한 것 자체가 몇 달만이었기에 제법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때 아이작에게 메시지가 나타났다.
[‘어보미네이션’을 대량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신체 융합’ 특전을 완전 습득하였습니다.]‘신체 융합 능력 완전 습득이라…… 이건 기대 이상의 수익인데.’
오언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험 삼아 촉수를 움직여 보자 어보미네이션처럼 상대방의 살점을 완전히 녹여서 자기 걸로 삼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촉수 일부를 특정한 형태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짐승의 이빨이나 뿔 같은 것을 달아도 좋을 것 같군.’
오언을 처리했으니 이제 라엘라의 차례였다.
그때 아이작은 뒤를 돌아보고 역시 만만찮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헤사벨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흥건한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해뜨기 직전의 새벽녘은 어두컴컴했다.
라엘라에 의해 성벽 위로 끌려 나온 헤사벨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라엘라의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동공으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라엘라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엘라는 삐걱거리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헤사벨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육신으로써의 라엘라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직접 몸을 하나하나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자괴감 느끼지 마라. 네 근본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라엘라의 말에도 헤사벨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작이 오언을 포식하는 사이, 헤사벨은 속삭임을 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헤사벨의 몸속에 흐르는 피를 강제로 쥐어짜 붉은 탄원을 발동시켰다. 저항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한 움큼의 피로 남았을 뿐, 거부할 수는 없었다. 천사의 권능을 넘어서기에는 그녀의 힘 자체가 너무 미약했다.
“네 몸속에 흐르는 모든 피는 굴마르의 것이다. 그리고 굴마르의 피는 붉은 성배에서 흘러나온 것이지. 네가 마음을 잘못 먹는다 한들 붉은 피가 푸르게 변하겠느냐.”
“혓바닥이…… 길다.”
헤사벨의 대답에도 라엘라는 표정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무표정하다기보다는 표정을 바꿀 여력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헤사벨은 애써 비웃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살점을 잃어버릴까 봐 무섭지?”
“…….”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목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하지만 목을 부러뜨리거나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든지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점은 네가 지상에 발붙일 수 있는 힘이지! 하지만 살점을 받아들이려면 붉은 성배를 숭배해야 하니까…… 나를 다시 꼬드기려는 거야!”
헤사벨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생각하는 바를 멋대로 입 밖에 꺼내며 떠들었다. 그녀 말대로였다. 라엘라에게는 그녀의 살점이 들어가 있었다. 오언에게 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힘이 담긴 살점이었다.
그저 쓰다 버리는 껍데기에 불과한 라엘라의 몸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문제는 이 살점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죽어 가는 라엘라의 몸을 버리고 헤사벨에게로 갈아타려는 것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계획이었다.
라엘라의 입가가 쥐어짜지듯 올라갔다.
“싫은가?”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라면 나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네 일탈은 잠깐의 방황으로 치부해 줄 수 있다. 굴마르 공작가는 성물을 잃어버린 책임을 면제받고 천사의 살점을 먹은 너를 크게 환영하겠지. 그리고 또.”
라엘라는 입을 크게 벌렸다. 거의 목까지 내려온 턱 안쪽에서 거대한 살점이 나타났다. 벌떡이는 살점에서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중독적인 향.
붉은 성배가 제안하는 천국은 지극히 말초적인 쾌락의 천국이다.
빛의 법전처럼 빛과 진리로 가득한 신전도, 엘릴과 함께하는 영광과 명예로 가득한 전장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유혹당하는 쾌락.
헤사벨 역시 당연히 붉은 성배가 제안하는 사후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이 살점을 먹는다는 것은 천국을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받아들여라.”
헤사벨이 아무리 단호하게 아이작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이 유혹은 마약 중독자에게 다시 마약을 코앞까지 들이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사벨은 떨리는 눈으로 입가로 다가오는 살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살점이 입에 닿았다. 하지만 헤사벨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에 피 맛이 나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뱀파이어들에게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다시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뭔가를 놓치고 있다.
지금 헤사벨의 반응은 그녀의 눈에 법칙을 거스르는 수준의 기이한 일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만.’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차피 헤사벨이 받아들이든 말든, 살점을 입안에 쑤셔 넣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강하게 붉은 성배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이 맛을 보면 다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이나 다름없으니까.
라엘라의 손이 강제로 쥐어짜듯 헤사벨의 입을 벌렸다. 그리곤 이내 입안에 살점을 쑤셔 넣었다.
헤사벨은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일단 입안에 넣은 이상 뱉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대리인을 교체하기 위해 붉은 예식을 준비했다.
“왜 우리 애한테 이상한 거 먹이고 그러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
아이작은 헤사벨의 기운을 쫓아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가 본 것은 라엘라가 헤사벨의 입에 살점을 강제로 넣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그게 라엘라에게 이식되었던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신체임을 알아보았다.
라엘라의 몸은 기이했다. 마치 탈피를 준비하는 곤충처럼 거죽이 길게 늘어지고 뼈대가 제멋대로 툭 튀어나오거나 꺼져 있었다.
라엘라라는 껍데기 안에 괴상한 괴물이 엉성하게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안 좋을 때 왔나 보지?”
라엘라는 말없이 푹 꺼진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그녀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선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성배기사. 소문은 들었다만…….”
“명예롭고 신앙심이 두텁다는 소문? 아니면 엄청난 강자라서 나쁜 놈들을 썰고 다닌다는 소문?”
“얼굴이 꽤나 반반하다는 소문.”
천사의 귀에 들릴 정도라길래 기대했는데 맥 빠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라엘라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소문 이상이군. 이건…… 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외모가 아닌데. 엘릴의 혈통인가, 아니면 어떤 천사가 함부로 피를 뿌리고 다녔나?”
네필림을 암시하는 말에 아이작은 말없이 웃었다.
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붉은 성배조차도 네필림 출신이니까.
라엘라는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상관없겠지. 네가 신성의 방계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전략도 조금 달라졌겠지만…… 나는 본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
“확실히 정정당당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야.”
라엘라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네가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천사를 추방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너 하나쯤 지워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천사의 힘은 막강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직접 힘을 써서 싸우는 타입은 아니지만, 진짜 힘을 쥐어 짜내기 시작하면 이제 막 성배기사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아이작이 감히 대적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붉은 성배가 바라는 일도 아닐 테고.”
붉은 성배는 은밀한 방식을 좋아한다. 그것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이 와중에도 주둥이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 게 실로 음모의 대가답군. 성배기사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거냐?”
“네가 정상적인 성기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봤다. 정상적인 성기사라면 나와 대화를 이렇게 나눌 일도 없겠지. 내 눈엔 네가 품고 있는 야망이 보이는구나.”
아이작은 웃으면서도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네게 지금 당장 승리와 명예, 그리고 힘을 주겠다. 이 자리에서는 내가 패배하고, 네가 승리한 것으로 하지. 그리고 나의 힘 일부를 남겨두고 가겠다. 너는 싸울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얻는 거야.”
“대가는?”
“지금 당장은 이 아이면 충분하겠군.”
그녀는 헤사벨의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