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67)
67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3)
천사와 목숨 걸고 대적할 것이냐, 아니면 공짜 부하를 넘기고 간단하게 승리를 얻느냐.
‘힘 일부를 두고 간다는 것은 살점을 의미하겠지.’
그것이라면 이름 없는 혼돈이 제안한 퀘스트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이건 헤사벨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굴욕과 손해를 맛보는 것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뿐이지만, 그녀 역시도 무모한 도박수를 두고 싶진 않을 게 분명했다.
협상만 하면 간단하게 윈─윈.
아이작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미소 지었다.
“각자의 신앙을 걸고 맹세할까?”
라엘라도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좋다. 증표가 될만한 것을 보여주마.”
라엘라의 입이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붉은 살점이 나타났다. 달콤한 향기가 제법 떨어져 있는 아이작에게까지 풍겨 왔다.
라엘라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것을 취해라. 내 몸의 일부요, 붉은 성배의 피가 담긴 살이다.”
아이작은 칼을 내리고 천천히 라엘라를 향해 다가갔다. 라엘라는 여전히 헤사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이작이 라엘라의 손에 얹혀있는 붉은 살점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라엘라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퍼퍼퍼퍽! 살점이 터져나가면서 아이작의 몸 위에 피를 흩뿌렸다.
피를 뒤집어쓴 아이작은 벌에 쏘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튕겨 나갔다. 아이작은 피를 뒤집어쓴 자리를 살펴보았다. 마치 독극물을 끼얹은 것처럼 수포가 연신 부풀어 올랐지만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지독한 독이었으리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피부가 터지고 녹아내릴 수도 있는 그런 독.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약간 따끔한 정도였다.
“흐…… 어, 어섯게?”
오히려 문제는 라엘라였다.
그녀는 턱부터 이마까지 갈라진 몰골로 아이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혀가 둘로 갈라진 탓에 발음이 어색하게 샜다.
아이작은 심판의 검에 묻은 라엘라의 피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말했다.
“피차 안 믿고 있던 사이에? 뭘 또 그래.”
라엘라가 피를 터뜨린 순간, 아이작 역시 기다렸다는 듯 왼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촉수에 휘감긴 검은 라엘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각도로 움직여 단숨에 그녀의 얼굴을 베었다. 원래 몸을 양단할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피를 뒤집어쓰고도 어떻게 버티고 있느냐는 말이다!]공기를 우르르 울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엘라가 아닌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목소리였다.
“내 몸 안에는 이미 네 피 못지않게 지독한 것들이 흐르거든.”
라엘라가 뿌린 피에는 붉은 성배의 독이 스며 있었다. 신성력이 깃든 기적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역병신 지힐렛을 포식했다. 신성, 그것도 역병에 대한 저항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거기에 이미 어보미네이션을 대량으로 포식한 데다, 재생 능력까지 겹쳐 있었으니 라엘라의 독이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이작은 라엘라와 오래 수다를 떨 생각이 없었다. 그는 라엘라가 상처를 회복시키기 전에 바로 성벽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라엘라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퍼덕이면서 팔을 휘둘렀다. 팔에서 긴 상처가 생겨나더니 피가 흩뿌려졌다.
또 같은 공격을 하는 건가 했지만 흩뿌려진 피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가시 방벽이었다. 단순히 저지를 위한 가시 방벽이 아니라, 날카롭게 아이작을 향해 찔러 들어오며 성장하기까지 했다.
[감히 인간이 천사에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으냐!]‘본체도 아니면서 무슨.’
아이작은 얼굴을 스치는 붉은 가시들을 쳐내며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만만치 않았다.
썩어도 준치. 계략가에 가까운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도 천사는 천사다.
아무리 몰려 있어도 지금 상태로 아이작이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적당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쉬리리리리릭!
라엘라의 오른팔에 이어 왼팔 또한 찢어지면서 피가 성벽 위로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가시 방벽은 이제 덤불처럼 성벽을 옭아매며 아이작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일단 달려들기보다 침착하게 가시를 쳐내면서 기회를 노렸다.
[네 힘이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고함을 내지르며 붉은 가시 덤불로 아이작을 몰아붙였다. 아이작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힘이 헤사벨을, 강화된 오언을 물리쳤을 것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자신 또한 그 꼴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방심하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진짜 패를 꺼내지 않는 한, 그녀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슬슬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산골이라 일출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밤은 붉은 성배의 시간이지만 낮은 빛의 법전의 시간이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다면, 거기서 눌러 터뜨려주마!]와드드득! 가시덤불이 성벽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채로 갑작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성벽 위를 덮을 만큼 거대한 가시 창이 아이작을 향해 쇄도했다.
가시라기보다 공성추에 가까운 거대한 것이 덮쳐 오자 아이작은 별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왼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가시 창을 휘감고 물어뜯는 동시에, 아이작은 검을 휘둘렀다.
이삭 검술: 여덟 갈래에 의해 찢어진 붉은 가시의 상처 사이로, 순식간에 아이작의 촉수가 파고들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거대한 가시 창을 상처의 결을 따라 그대로 찢어발겼다. 터져나간 촉수가 그대로 핏빛 비로 비산하며 아이작에게 쏟아졌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모습을 보며 오한을 느꼈다.
[그거군! 그거였군! 네 놈의 정체는……!]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앓는 소리를 토해내며 아이작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드러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헤사벨의 굴복과 오언의 패배, 그리고 아이작이 성배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빛의 법전 기적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직도 썩지 않고 남은 시체가 있었나!]아이작은 그녀의 영문 모를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 온 집중을 다하며 어깨를 폈다.
아이작이 정체를 드러냈으니 그녀 또한 온 힘을 다해야 할 차례였다.
[머리가 있는 놈들 중에 그 씨앗을 잇는 놈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심지어 그 씨앗이 등대지기 아래에 숨어 있었다니?]아이작은 굳이 말을 섞는 대신 라엘라를 향해 다가갔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긴장하며 힘을 끌어모았다. 그녀는 아이작의 촉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촉수를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빠르게 촉수를 회수해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대신 그는 검을 치켜들었다.
마치 촉수를 쓰지 않고 대적하겠다는 듯한 모습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 무슨…….]그 순간, 그녀는 눈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아침 해가 떠오른 것이다.
그을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이작에게 집중하지 않는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오히려 방심한 척 눈을 감았다.
역시나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아침 햇살과 함께 달려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역시 성벽 위에 뿌려진 피 속에서 일제히 가시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아이작의 섣부른 동작을 비웃었다. 네가 아침 해를 기다렸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설령 해가 뜬다 해도 네깟놈은…….
그런데 촉수는 왜 다시 집어넣었지?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의문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시들이 아이작의 갑옷을 전혀 뚫지 못하고 구부러지거나 튕겨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모습에 경악했다. 그리고 뒤늦게 어떤 목소리들을 들었다.
“저것 봐! 성배기사님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온 신경을 아이작에게 집중하고 있던 덕분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곳을, 아직도 계곡의 그늘 아래 가려져 어두운 헨드락 성채 아래쪽을 보았다.
그곳에 르하르트 백작과 그의 병사들이 아이작이 미리 지시했던 대로 대기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무수한 시선 속에 자신의 권능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붉은 성배는 음모와 유혹, 암살을 권장한다. 그녀의 권능 역시 당연히 어둠과 은밀함 속에서 가장 강해진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은 그 모든 권능을 약하게 만든다.
이 밝은 여명과 수많은 목격자의 시선 속에 노출된 그녀는 본래의 힘을 절반도 내지 못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발악을 위해 있는 힘껏 가시를 내질렀다. 하지만 아이작의 몸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어보미네이션을 흡수한 이후 아이작이 새롭게 익힌 기술, 바로 오언이 사용했던 상급 검술이었다.
아이작의 몸이 동시에 두 방향으로 움직였다. 가시는 그중 하나를 꿰뚫었지만 다른 하나는 저지하지 못했다.
검날이 햇살을 받아 번뜩였다.
텅.
라엘라가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검날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칼이 닿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목이 베였음을 깨달았다.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보랏빛의 섬뜩한 눈으로 라엘라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이제 누가 눌려 터진 모기에 어울릴지 한번 볼까?”
***
라엘라는 휘청거리다가 성벽을 짚었다. 그 순간 머리가 기울어지면서 머리통이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목이 텅텅거리며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성벽 밑에서 기다리던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발치까지 굴러온 라엘라의 머리와, 붉은 가시에 휘감긴 헨드락 성채, 그리고 성벽 위에 당당하기 서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우, 우와아아아! 성배기사님! 성배기사님이!”
“아이작 성배기사님께서 마녀의 목을 베셨다!”
병사들의 눈앞에 오래된 전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타락한 영주와 사악한 마녀, 그리고 그들을 응징하러 나타난 성배기사.
물론 어디에도 영주가 타락했다거나 라엘라가 마녀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이미 그들은 헨드락 성채를 적으로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오언이 지시했던 기사 돌격 때문이었다.
때문에 단신으로 성채를 굴복시킨 아이작의 모습은 전설 속 영웅 그 자체였다.
“성배기사님! 아이작 성배기사님, 만세!”
여기저기서 아이작을 칭송하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아이작은 그 소리를 들으며 몸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금방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신앙?’
바르바리들을 붙들고 설교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앙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순수한 찬양이 아이작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 쇠르에서 ‘파수자의 등대’를 썼을 때에도 위업을 세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찬양을 받지는 못했다.
그때는 그저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꾸짖었을 뿐이니까.
‘역시 백 마디 설교보다는 한번 보여주는 게 낫군.’
그래서 신들도 신도들에게 기적을 베푸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작은 병사들의 찬양이 너무 이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이작조차도 아직 칼을 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아까보다 더 칼을 단단하게 쥔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사실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라고 해야 했다.
목이 잘린 라엘라는 쓰러지지 않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잘린 목의 단편에서 선혈이 연신 솟구쳤다.
이윽고, 목의 단면의 목구멍이 마치 입술처럼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미 늦었다.”
공기를 떨리게 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자른다고 무엇을 기대했느냐?]라엘라의 피부는 이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그 안의 뼈나 근육, 관절 따위는 아랑곳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그 가죽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붉은 형체가 뼈대를 뒤틀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라엘라의 몸뚱이는 망가진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피부를 탈피하고 붉은 선혈을 쏟아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3m에 이르는 기이한 형체였다.
인간의 팔과 다리는 가지고 있지만 몸통은 없었다.
세 개의 팔과 세 개의 다리, 그리고 세 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속지가 쉴 새 없이 역할을 바꿨다.
복잡했지만 기품있었으며, 그로테스크했지만 아름다웠다.
그것이 지상에서 붉은 성배의 신성을 대변하는 천사.
붉은 살점의 선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