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69)
69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5)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충격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뒤늦게 퍼즐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된 시점부터 헤사벨의 암살, 지힐렛의 잠입, 르하르트 병사들이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촉수를 쓰지 않고 검술로만 공격하던 것, 그녀가 본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분열 예식과 파수자의 등대를 보인 것…….
결국 마지막까지 패를 숨겼던 아이작의 승리였다.
물론 허점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서 뒤늦게서야 막연한 두려움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아이작에 대한 무수한 상상력을 품게 만들었다.
‘공포는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되지…… 특히 생각이 많은 놈이라면.’
아이작은 일부러 침묵하며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어떻게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공략했는지 떠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가 스스로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쪽이 더 나았다.
실제로 우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입힌 타격은 그녀에게 손 하나 잘린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정신적인 충격과 공포는 뇌리에 새겨질 것이다.
아이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붉은 성배의 안배는 깊고 넓다. 그녀의 권속은 어디에나 있다! 너는 그중 고작 하나를 허물어뜨렸을 뿐이다!]“상투적인 소리를 하네.”
[내가 돌아온다면……!]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뭐라고 바락바락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면서 천사란 놈들은 참 죽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오로지 떠들어대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저 상태로도 백 일 동안은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참교육할 무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튕겨 냈던 단검, 분열 예식을 주워 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걸 보자마자 경련을 하듯 몸을 떨었다.
[너, 너!]“그래. 네 주둥이를 꿰매줄 바늘이지.”
[잠깐……!]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몸을 꿈틀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놈은 뒤늦게 몸을 증발시키며 더 빠르게 소멸하려 했지만 아이작의 손이 더 빨랐다.
콰득. 분열 예식이 그녀의 살을 두 번째로 파고든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파드드드드…….
붉은 조각들이 마치 도자기처럼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완전히 지상에서 추방당했다.
아이작은 분열 예식을 수거해 품속에 넣었다.
끝났다. 이걸로 헨드락 성채는 완전히 넘어왔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있었다.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성벽 아래서 아이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환호? 공포? 아니면 충격?
그들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가 아이작에 의해 베여 나가고, 마침내 파멸해 쓰러지는 모습을. 그 모습을 목격한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아까의 환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가장 앞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아이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병사들도 천천히 무릎 꿇었다. 소란을 듣고 나온 주민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도, 가장 큰 공헌을 세운 헤사벨도 모두 침묵 속에서 아이작에게 무릎 꿇었다.
아이작은 몸속에 신앙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영웅을 향해 올리는 환호가 아니었다.
경이로운 존재를 향한 경배였다.
***
[‘붉은 살점’을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붉은 성배’ 신앙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대폭 상승합니다.]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붉은 예배’ 특전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대중에 대한 매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상황이 정리된 후.
아이작은 성벽 위에서 정리가 진행되는 헨드락 성채를 지켜보고 있었다.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을 제압하고 증거물들을 보존했다.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은 이미 기력이 빠진 데다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간호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아이작은 이번 전투에서 얻은 결과물을 정리했다.
‘먼저 붉은 살점을 포식한 결과…… 붉은 성배 신앙 기적의 위력이 영구적으로 대폭 상승. 이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과인데.’
수치적으로 보자면 붉은 성배 신앙의 위력이 대략 20% 정도 강해진 것으로 보였다. 애매해 보일지 몰라도 아이작이 가진 붉은 성배 신앙의 기적인 ‘붉은 탄원’과 ‘흡혈’ 모두 자주 쓸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큰 상승이었다.
다른 기적들은 10% 정도 강해졌다. 단순히 포식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 성과라면 큰 이득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붉은 예배’ 특전은 이번에 얻은 유일한 비전투 능력이었다. 역시 기만과 음모의 천사답게 포식 효과로 대중에 대한 선동 기술 능력이 상승하는 모양이다.
아이작에게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특전이었다.
하지만 진짜 성취는 이름 없는 혼돈이 내린 임무를 해결하고 얻은 보상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포식’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의 기적 중 한 가지를 강화 및 조합할 수 있습니다.]기적의 강화 및 조합.
이 건은 ‘네임리스 카오스’에서도 극히 드문 보상이었다. 결과물에 따라서는 S급을 넘어선 EX급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은근히 골치 아픈 보상이기도 했다.
‘……문제라면 이름 없는 혼돈 신앙 관련 기적이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조합의 결과물이 뭐가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데…….’
물론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했다. A와 B를 조합하면 AB나 BA 중 하나가 나오지 엉뚱하게 C가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그게 과연 얼마나 효율적일 것이냐가 문제다. 닭 잡던 칼이 소 잡는 칼이 되는 것도 애매하니까.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뭘 강화시킬지는 이미 정해두긴 했지만.’
우선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혼돈의 손길’이었다. 촉수는 말할 것도 없이 아이작이 가장 많이 쓰는 스킬이다. 강화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강화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것을 다른 어떤 능력과 조합하느냐였다.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니 좀 더 고민해야겠군.’
결과물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엇과 조합해도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좀 더 고민해보다가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많았다.
“아이작 성배기사님.”
고민 중이던 아이작에게 르하르트가 다가왔다.
르하르트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깍듯이 고개 숙이며 경례했다.
전에도 예의를 지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작의 배경인 교단에 보이는 예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아랫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아이작은 잠시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겸손한 성배기사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르하르트 백작님.”
“아닙니다. 성배기사님. 제가 어떻게 감히…….”
당연하지만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처치했을 때, 르하르트도 그 모습을 보았다. 천사는 일평생 한 번만 봐도 많다. 그런데 그 천사를 일개 인간의 육신으로 물리치다니. 신화 속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그 일로 르하르트는 아이작을 빛의 법전이 보낸 대행자 내지는 천사 후보 정도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작은 르하르트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예. 이제 성 내부의 시신들은 모두 정리가 끝났습니다. 통로는 아직 복구 중입니다만, 주요 경로는 끝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생존자들을 찾았는데…….”
르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아이작을 찾아온 이유가 이 일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무슨 일인지 알지만 모르는 척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카일 헨드락 영주를 찾았습니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넋이 나간 모습이더군요.”
“유감이군요.”
카일 헨드락에 대한 처분은 애매한 상태였다.
금전을 횡령하고, 이웃 영주의 병사와 기사들을 공격하고, 성배기사에게 칼을 들이댔으며, 사악한 이교도들로 추정되는 라엘라와 오언을 끌어들인 일…… 목이 서너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붉은 성배의 명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그의 영지에 임해 음모를 꾸몄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붉은 성배의 꼬드김에 넘어가 조종당했다’라고 하면 변명거리로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한낱 인간이 어찌 음모와 계략의 명천사에게 대항하겠는가?
물론 그렇다 해도 영주로서 책임져야 할 몫이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책임져야 할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여관에 틀어박혀 있던 르하르트? 뒤늦게 찾아와서 뒷북이나 두드릴 이단심문관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해결한 아이작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카일에 대한 심판을 미뤄 둔 상태였다.
물론 아이작은 카일을 어떻게 써먹을지 이미 결정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평판을 위해서는 조금 느긋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카일 헨드락은 중요한 증인이니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마저 라엘라의 이단 증거물을 더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이단심문관이 도착한다.
그때까지 아이작은 라엘라가 이곳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몄는지 알아내야 했다.
***
아이작은 라엘라의 방을 뒤졌다.
하지만 성과는 딱히 없었다. 아이작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붉은 성배는 음모와 비밀의 신앙이다. 그중에서도 명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것도 며칠이나 성안에서 수성전을 준비해 왔으니, 꼬투리가 잡힐만한 증거는 모두 파기하고도 남았으리라.
수상쩍은 약재 따위가 있긴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분명 여기서 죽치고 있던 이유가 있을 텐데…….’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 클럽은 새 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터전으로 헨드락 영지를 낙점하고 있었다. 칼센 밀터는 사라졌지만, 여기에 터를 잡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그 비밀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비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보물의 내용물은 아는데 보물의 위치를 모르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신 말고 고대신들도 들쑤셔서 깨우고 있었지. 그거랑 관련이 있나?’
불사 교단이 벌이는 일은 새로운 신의 탄생만이 아니다.
그들은 고대신들도 들쑤셔 깨우고 있었다.
천사만도 못한 퇴물들을 깨워서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으나, 붉은 성배 클럽 또한 그걸 돕고 있다. 어쩌면 라엘라는 이곳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고대신의 부활을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라엘라의 목적을 단정 짓고 자료를 조사하자 어느 정도 연결점이 나오긴 했다.
라엘라의 방에서 발견된 서류 중에는 로어커스 유통 자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익숙한 지명들이 있었다. 쇠르와 아리엣, 그리고 변방의 몇몇 지역들.
아이작은 게임을 하던 기억을 뒤져서 이 지역들 중 반 이상이 성역이 있는 곳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고대신 부활을 위한 중계지점을 만들고 있던 건가? 입지가 좋으니 확실히 도움은 됐겠지만…….’
어쩌면 로어커스 유통을 이용해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이동하기 쉽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명천사가 직접 나설 만한 일인지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자료로 아이작은 어느 지역에서 고대신 부활이 준비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전부에서 고대신이 부활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런 정보들을 모으다 보면 목적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불사 교단도…….’
아무리 붉은 성배 클럽이 음흉한 집단이라 해도 불사 교단에 비하면 규모도 힘도 미약하다. 게다가 아이작은 불사 교단이 아리엣 수도원에서 이미 고대신을 부화시키려던 꼴을 직접 목격했다. 그때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그저 경호원이자 배달부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 고대신들은 대부분 필드 보스나 네임드 몬스터 취급이지. 잘해봐야 경험치 수준일 텐데 왜 부활시킨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아이작은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고대신 부활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경험치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아이작은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다.
‘누군가 부활한 고대신을 처치해서 그 힘을 흡수하려는 밑 작업을 하던 중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