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성인 지정 (1)
고대신 경험치설.
아이작은 이 가설이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고대신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저 그럴듯한 경험치, 아이템 공급원일 뿐이다. 명색이 신이었던 골루와루나 지힐렛을 잡는 것보다 극히 일부 힘만을 사용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잡는 것이 더 힘들 정도였다.
‘그럼 내가 칼센 밀터를 대신해서 고대신을 먹고 있던 건가?’
칼센 밀터는 신이 되려다가 실패했다. 신이 되기 위한 밑 작업으로 고대신들을 사냥하거나 그 힘을 흡수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작든 크든 고대신들에게는 흡수할 만한 신성이 남아있었으니까.
그걸 아이작이 가로채고 있었던 것이다.
‘불사 교단이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아이작으로서도 남이 차려 준 밥상이니 고맙게 먹긴 하겠지만, 나중에 탈 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이 가려 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고대신은 그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정말 확실한 경험치였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놈들의 계획을 방해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음모의 배후와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하던 대로 하는 게 답이군.’
아이작은 지금 걷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라엘라가 왜 하필 헨드락 영지에 있었는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이것은 카일을 이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밖에 이미 누가 와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라엘라를 무찌른 후, 아이작에 대한 헤사벨의 태도는 한층 더 정중해졌다.
“이번에 복잡한 일이 많이 있었지, 헤사벨?”
헤사벨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제 헤사벨은 아이작이 하던 거짓말(사실 아이작은 한 번도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 없지만), 그가 붉은 성배의 명령을 받고 있다던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던가 하는 착각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라엘라는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밝혔고,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꼬드기기까지 했다. 천사의 비호 아래 왈라이카로 돌아간다면 아이작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헤사벨은 아이작 곁에 남기로 선택하고 평생의 신앙과 가문을 버렸다.
공포 때문에 선택했다기에는 의아한 부분이었다.
“나는 솔직히 네가 라엘라 쪽을 선택할 줄 알았다.”
헤사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셨나요?”
“아니. 하지만 네가 잡혀간 걸 알았을 때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헤사벨에게 준 분열 예식은 나중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때가 되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을 테니, 헤사벨의 공격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설마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그걸 쓸 거라고는 아이작도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아이작도 헤사벨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붉은 살점 때문이었다.
게임 설정상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올라가는 살점과 피는 마약보다 지독한 쾌락과 중독성을 가진다고 한다. 성자거나 천사의 비호 없이는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그런데 헤사벨은 그것을 입안에 넣고, 심지어 한참 동안 머금고 있다가 뱉어 내기까지 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조차도 이해 못 할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이 성자 수준의 인내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참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떻게 그걸 참을 수 있었지, 헤사벨?”
“그게…….”
헤사벨은 곤혹스러운 듯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대강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천사가 너를 비호하고 있나?”
헤사벨은 성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천사가 개입했을 수밖에 없다.
***
아이작은 헨드락 성채의 지하로 향했다. 앞에는 헤사벨이 먼저 걷고 있었다.
다른 천사가 개입했냐는 질문에 헤사벨은 허둥대면서도 부정하진 못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아이작에게 거짓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헤사벨은 변명 대신 그를 지하로 안내하며 이곳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면서 몇 번이나 함정인가 봉인을 마주쳤지만, 헤사벨은 그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체했다.
“여기 와본 적 있나? 능숙해 보이는데.”
“이건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쓰는 일반적인 함정 술식입니다. 솔직히 조금 낡은 방식이긴 하네요.”
“라엘라가 꿍꿍이를 꾸미던 장소인가?”
“예.”
아이작은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아리엣 수도원 지하에서 느꼈던 기분이었다.
이내 그 익숙한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긴 지하 계단을 지난 끝에는 반질반질한 새 제단과 붉은 염료로 만들어진 주술진이 새겨져 있었다. 제단 옆에는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어서 아이작과 헤사벨의 전신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순간 아이작은 이곳이 성역인가 했지만, 어딘가 애매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신앙이 부족했다.
“성역을 만들려고 했던 건가?”
“그래.”
대뜸 대답한 목소리는 헤사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올렸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때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헤사벨이 쓰러졌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마치 전원이 꺼지듯 잠든 것 같았다.
“이쉬밀라는 이곳에 성역을 만들려고 했지. 그러면 일이 좀 더 쉬워질 테니까. 로어커스로 돈을 더 벌어들였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한 것 같더군.”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에 아이작은 곧 출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제단 옆에 세워진 커다란 거울이었다. 그 안에서 거울 속의 아이작이 자기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이작은 거울 속 자기 자신이 떠드는 모습에 기이함을 느끼며 다가갔다. 거울 속 아이작은 그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아이작은 이런 특성을 가진 천사를 알고 있었다.
붉은 성배의 사자, 메신저, 목소리.
“거울 시녀?”
교만한 왕과 황제, 교주, 영웅들의 앞에 나타나 현혹하고 파탄으로 이끈다는 존재.
붉은 성배의 또 다른 천사인 거울 시녀였다.
“호오, 금방 알아보는군. 역시 소문대로 고결한 성배기사라 매혹이 통하지 않는 건가?”
거울 시녀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미심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외형이 자기 자신과 똑같았기 때문에 ‘그녀’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거울 시녀는 여성형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꾸 붉은 성배 쪽과 얽히는데, 그쪽이 나한테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관심이 많아졌다고 해야 정확하겠구나.”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맞설 때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거울 시녀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맡은 역할이 다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붉은 성배의 영향력을 더 넓히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면, 거울 시녀는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역할이다.
즉, 거울 시녀의 관심은 붉은 성배 본인의 관심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붉은 성배가 자기 쪽 천사의 일을 방해했다는 뜻이었다.
‘왜?’
“왜 붉은 성배가 자신의 천사를 방해한 거지?”
“더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더 중요한 일?”
거울 시녀는 거울 너머에서 빙긋 웃으며 바닥에 쓰러진 헤사벨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이작은 자신의 모습을 한 그녀가 헤사벨의 모습을 만지는 것을 보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계획했던 일은 붉은 성배의 더 큰 뜻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만 말해두지. 한 가지 더 명확히 하자면, 붉은 성배께서는 너와 적대하고자 하는 뜻이 없으시다.”
아이작은 상대의 의도도 모르는 채 휘둘리는 꼴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주변에 눈치를 볼만한 사람도 없으니 단숨에 강력하게 발동시켜도 상관없었다.
아이작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자 거울 시녀의 미소가 깊어졌다.
[■■ ■■(EX+)] [직업: ■■■■(■)] [능력: ■■■■■■■■■■■■■■]그러나 모든 정보가 먹칠된 것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사라서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보를 가리는 술법이 있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어쨌든 천사에게도 능력이 통하기는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에 온 힘을 집중했다.
아이작의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가느다란 촉수들이 흘러나왔다. 보랏빛으로 변한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먹물이 지워지듯 가려졌던 정보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울 시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에 금이 갔다.
***
거울 시녀의 모습이 여러 갈래로 조각나 흩어졌다. 아이작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몰라 멈칫한 사이, 싸늘한 공기가 지하실을 휘감았다.
“집착이 강하군, 성배기사.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대화하겠다는 생각은 없는 건가?”
산산조각 난 거울 파편 속 거울 시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화하겠다고 하면 대답해 줄 생각은 있었고?”
“비밀과 기만은 우리들의 직업병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면서까지 숨길 이유는 없어. 말했지만, 붉은 성배께서는 너를 적대할 생각이 없으시니까.”
“그럼 말해 봐.”
아이작의 거만한 모습에 거울 시녀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나는 굴마르 가의 후계자가 네 곁에 있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사벨이?”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거지.”
거울 시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붉은 성배의 교세가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나? 붉은 성배를 드러내놓고 숭배하는 곳은 왈라이카 외에는 아무 곳도 없다. 하지만 그건 힘이 부족해서도, 신앙심이 약해서도 아니야. 우리는 너희처럼 드러내놓고 확장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은…… 황제의 재상, 부자의 첩, 장군의 참모, 영웅의 이인자, 성자의 제자다. 우리는 이미 세워진 단단한 체계에 기생해 은밀하게 쾌락과 교리를 전파하지. 덕분에 우리는 왈라이카라는 작은 왕국만 있어도 온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붉은 성배 클럽은 영토라고는 왈라이카라는 왕국 하나만 가지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적지 않다. 라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영웅과 왕을 현혹하고 암암리에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니까.
아이작은 그제야 거울 시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헤사벨이…… 나한테 붙여놓은 너희의 빨대다?”
“영웅의 이인자, 부자의 첩, 장군의 참모, 성자의 제자처럼 좋은 표현을 내버려 두고 그렇게 칭하고 싶다면, 그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거울 시녀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의 충성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를 고른 것은 오롯이 헤사벨의 의지였으니까. 우리는 그녀의 배교를 방치하고 관대하게 놓아주었을 뿐이다.”
즉, 붉은 성배는 아이작이 크게 될 것이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작이 정말로 그들 말대로 영웅이나 성자 같은 존재가 된다면,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헤사벨은 당연히 크게 우대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미 그녀는 사도로 대우받고 있으니까.
아이작은 이미 혼돈의 눈을 통해 파편적으로 정보를 습득한 상태였다. 거울 시녀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였다.
“그러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나를 공격할 때 말리지 그랬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더러 그만두고 그냥 내빼라고? 하하. 반대로 질문하지. 너는 그걸 바랐나, 성배기사?”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군.’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이미 도망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기어코 그녀를 물고 늘어져 잡아먹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강해지게 만들고, 헤사벨을 심어두기 위해 자기 쪽 천사가 다치는 것을 감수했다 이거네? 그러다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건 그거대로 실망스러운 결과지.”
거울 시녀는 느긋하게 말했다.
“붉은 성배의 안배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영웅과 왕의 재목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었지. 네가 거기서 죽었다면 네 그릇은 거기까지였다는 거다.”
극복하기 어려운 아슬아슬한 시련을 안겨 주면서 더 강해질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거울 시녀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포식할 수 없었다면 확실히 더 강해질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거기서 아이작은 뭔가를 깨달았다.
“설마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나?”
거울 시녀는 크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너의 시련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와 너의 관계를 숨기고, 동시에 네가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보물 상자로 남겠지. 그뿐일까. 우리는 네 상상 이상으로 네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웅은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니까.
아이작은 새롭게 알게 된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데?’
앞으로도 헤사벨을 옆에 끼고 있으면 붉은 성배의 뒷배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천사마저도 기꺼이 버림패로 쓰는 붉은 성배의 흉계는 기가 찰 노릇이지만, 어차피 신이란 족속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게 다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건 붉은 성배는 아이작의 성장과 성공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작이 성공했을 때, 곁에 그녀의 편을 세워두는 것뿐이었다.
모르고 당하면 모를까, 안다면 아이작이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이작은 팔짱을 끼고 거울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 정체는 상관없는 건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엄청나게 싫어하던데.”
붉은 성배는 이름 없는 혼돈을 싫어한다. 아니, 모든 신앙이 이름 없는 혼돈을 싫어한다. 심지어 인격이 없는 신들조차도 설정상으로는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작은 거울 여인이 자신의 정체를 못 알아봤을 것이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목격한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거울 시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중 동맹은 우리에게 흔해 빠진 일이야. 너도 우리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을 텐데.”
뒤통수 조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아니, 저쪽은 100% 뒤통수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좋아. 한 가지 조건만 확실해지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아이작도 무방비하게 당할 생각 따윈 없었다.
***
헤사벨은 눈을 떴다.
사방이 혈관과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 중심에는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이 제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헤사벨은 기괴한 풍경에 놀라면서도 본능적인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곳이 아이작이 만든, 아이작을 위한 성역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차렸군.”
아이작이 촉수를 회수하며 다가왔다. 헤사벨은 그가 붉은 성배 쪽과 모든 이야기를 마쳤음을 알고 다시 부복했다. 이후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오롯이 아이작에게 달려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곁에 두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질문이었다.
“왜 내 곁에 남는 걸 선택했지, 헤사벨?”
가족이나 명예, 쾌락 따위가 아니라?
헤사벨이 붉은 성배에 등을 돌리지만 않았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은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헤사벨은 그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님. 다만…….”
“다만?”
“저는 이기는 쪽에 붙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평생 동안 배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