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2)
72화. 성인 지정 (3)
‘성인?’
아이작은 살짝 경직되었다.
이솔데는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아이작에게는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성체까지는 괜찮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것을 숨기려던 것은 그가 빛의 법전이 내린 성체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지킬 힘도 있고 명성도 쌓이고 있다. 이젠 일방적으로 휘둘릴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은 다르다. 최대한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스타 성배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성인은 너무 나가는 것이다.
성체는 신의 가호를 내려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성체가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든 신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성인은 인간이 신에게 추천하는 사람이다.
즉, 사람만이 아니라 신들에게까지 주목받게 된다.
정확히는 신이나 천사들 앞에 내보내 놓고 ‘이 인간을 보아라! 굉장하지? 뭔가 날개 하나 달아주고 싶지 않니?’하면서 둥기둥기 띄워 주는 것에 가깝다. 당연히 천사나 신의 관심을 받게 될 텐데, 비밀이 많은 아이작으로선 그런 관심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인으로 지정되면 유리한 것도 많겠지만 지금은 곤란해.’
아이작이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 사이,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겸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성인이라니요. 그저 운과 가호가 따라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요행에 불과합니다. 성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지정되겠습니까?”
“아, 제가 앞서 말했네요.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후보로 건의할 예정입니다. 당연하지요. 이 자리에서 바로 성인으로 지정할 수는 없으니.”
이솔데의 해맑은 말에 아이작은 안도하면서도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성인이 되는 것과 후보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성인 후보는 1년에 대륙 각지에서 서너 명씩 언급되니까.
하지만 안도하는 아이작의 마음을 찍어 누르듯 이솔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천사 퇴치는 대단한 업적 아니겠습니까? 주교님까지 직접 오셔서 검증할 정도라면 교단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긴 합니다.”
“…….”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지방 귀족들이 자기 명성을 드높이려고, 혹은 시골 촌뜨기들이 착각한 기적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는 없잖아 있다. 그들에 비하면 아이작은 진짜 업적다운 업적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성인으로 지정되는 데에는 진짜 업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성체는 신의 일이지만 성인 지정은 인간의 일이다.
즉, 정치적인 상황과 당사자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 성인 지정 사태의 내막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다.
‘교단이 급히 성인을 지정하려고 한다? 여명군의 간판으로 쓰기 위해? 쓸만한 성기사를 붙잡아 두려고? 아니야.’
가장 최근의 성자는 칼센 밀터였는데, 마무리가 참혹했다. 교단으로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즉, 더러워진 성인이라는 칭호를 서둘러 덮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교단이 황제와 기 싸움을 벌이는 거군.’
사태의 본질은 아이작이 정말 성인감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빛의 법전은 게르토니아의 황제인 발트제메르와 균형을 맞출 저울추를 찾고 있었다.
***
아이작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교단 사람들이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방에서 궁리를 시작했다.
백제국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게르토니아 제국은 빛의 법전을 숭배한다.
이 세상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게르토니아도 신앙의 권력이 막강하며, 황족이나 귀족도 교단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 황제, 발트제메르가 등극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지…….
현 황제 발트제메르는 성체다.
머리 위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뿔과 말도 안 되는 용력, 부여받은 막강한 기적들이 증거였다.
발트제메르는 제국 내부 권력투쟁을 순식간에 끝내고 황제가 된 뒤, 빛의 법전에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 구도에 균형을 가져왔다.
빛의 법전 쪽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지만 심하게 따질 수는 없었다.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성체니까.’
성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의 의지가 육신을 가지고 형상화된 존재다. 그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육신에 투사된 신의 의지도 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발트제메르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기적의 보유자였다.
이렇게 노골적인 신의 의지를 교단이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황제 역시도 교단의 힘을 과도하게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가진 힘 역시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덕분에 기묘한 균형이 이뤄진 게 현 백제국의 정치적 구도였다.
‘그 와중에 붉은 성배의 천사를 퇴치한 성배기사가 나타났고, 어쩌면 성체일지도 모른다? 이건 진짜 성체건 아니건 무조건 성인 감투를 씌우려고 들겠군.’
아이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교단은 아이작을 황제에 맞설 상징으로 삼고 싶어 한다.
그 말인즉,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온갖 견제를 받는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출세하기야 하겠지만, 귀족들이 아이작의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다면 그의 소중한 ‘비밀’이 들킬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단이 아이작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까? 그럴 리 없다. 오히려 나서서 싸우라 채찍질할 테고, 촉수가 들키면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발트제메르 황제 그 자체가 문제다.
‘발트제메르…… 빛의 법전 쪽 최종보스라고 해도 될 존재지.’
게임상에서 불사 교단의 최종 보스는 불사 황제 베셰크다. 하지만 베셰크는 신이기 때문에 예외를 둔다면, 칼센 밀터가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반대편인 발트제메르는 빛의 법전 쪽의 최종 보스다.
칼센을 잡아먹은 아이작이지만, 우연한 요행, 그것도 칼센이 불사 교단의 대전사로서 완전히 각성하기 전의 일이다. 발트제메르는 여명군이 시작되어 끝나는 시기까지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니 지금 아이작으로선 범접도 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 잠깐. 이거 잘만 이용하면……?’
순간 아이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교단과 황제의 갈등.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자신.
‘이거 내가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거 아닌가?’
둘 사이에서 잘만 줄타기를 한다면 기존 계획보다 훨씬 큰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아이작에게 의지가 전해져왔다.
헤사벨이었다.
[중앙 귀족들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아이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적절한 반대편 저울추가 도착한 것이다.
***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헨드락 성채 문 앞을 두드렸다. 말발굽 소리를 들은 르하르트와 병사들이 서둘러 성문 앞으로 나갔다. 먼지구름 속에서 급하게 멈춰선 자들은 한 무리의 기병들이었다.
“르하르트? 르하르트 백작!”
먼지투성이가 된 기병들 사이에서 남다른 덩치를 가진 여자가 뛰어내렸다. 화려한 갑옷처럼 보였지만 뒤집어쓴 엄청난 먼지 때문에 갑옷은 낡고 바래 보였다.
르하르트는 뛰어내린 여자를 보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옹 후작님? 왜 이렇게 일찍…….”
“성배기사님은 어디 계신가! 아직 안에 계시겠지?”
여자는 인사할 여유도 없다는 듯 서둘러 아이작부터 찾았다. 그녀는 아직 얼떨떨해하는 르하르트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곁에 있는 호위 기사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이분인가? 이분? 아니면 저분?”
“여기 이분입니다.”
르하르트는 그녀가 무례를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아이작을 소개했다.
후작은 아이작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어리군! 게다가 잘생겼고!”
“아이작입니다.”
아이작은 이 정신없는 사람 대신 침착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뒤늦게서야 그녀도 정신을 차리고 예의를 차렸다.
“델리아 리옹이오. 성배기사님! 이번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다고 들었소!”
델리아는 먼지투성이 손으로 아이작의 손을 덥석 쥐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무례를 다시 깨닫고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았지만, 그녀의 옷도 먼지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뒤늦게 달려온 시종이 손수건을 주고서야 제대로 닦을 수 있었다.
“급히 오신 모양입니다.”
아이작이 듣기로 중앙에서 사람이 오는 것은 나흘 뒤였다. 교단에서도 빨리 온 편이지만 이 정도면 중앙은 목숨 걸고 뛰어오기라도 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여기 그 노망난 노친…….”
뒤에서 시종이 급히 끌어당기고서야 델리아는 말을 멈췄다.
아이작은 이 할 말 다 하고 사는 귀족이 대체 어떻게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는 중앙에서 살아남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 그 노망난 붉은 성배의 천사가 여기서 난동을 부렸지요. 옳은 일을 위해 이렇게 서둘러 와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이작이 적당히 수습해 주자 델리아의 눈에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이 말실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 많고 호방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눈속임일지도 모른다고.
“원래 용병대도 모집하고 정찰도 진행하면서 올 생각이었기에 기간을 넉넉하게 잡았던 것이오. 그런데 오는 도중 천사가 나타났다느니, 성배기사가 물리쳤다느니, 교단 사제들이 몰려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그래서 내 호위들만 거느리고 달려왔소.”
아이작은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공성전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몸만 온다면 기한은 대폭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거리는 아니었던 건지 그녀와 함께 온 기사들과 귀족들은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쌩쌩하게 떠드는 것은 델리아 뿐이었다.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좀 먹고 천사가 뒈진 자리도 좀 구경하고!”
델리아가 앞장서 들어가자 르하르트가 서둘러 따라붙었다.
“먼저 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죽은 게 아니라 추방된 것이라고…….”
“그거나 저거나!”
아이작은 성문 안으로 사라지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재밌군.’
교단의 사제들도, 중앙 귀족들도, 애당초 카일 헨드락에게서 빚을 징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지금은 그게 뒷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빚을 받아 낼 자신이 있으니 그다음 수순으로 바로 넘어가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일단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뭘 뜯어낼 수 있는지부터 볼까…….’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
헨드락 성채는 곳곳이 변형되거나 아직 치우지 않은 곳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시설은 아직 쓸 만한 상태였다.
회의실 겸 예배당으로 쓰이는 공간이 대표적이었다. 신실하진 않아도 카일 역시 빛의 법전 신자였기 때문에 예배당엔 붉은 성배의 힘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빛의 법전 쪽 후안 주교와 중앙 귀족의 델리아 후작이 마주쳤다. 대충이나마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온 델리아는 후안을 보자마자 뒤틀리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안 리아르 주교님. 부족한 신자 델리아 리옹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후안 주교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앞길이 밝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델리아 후작님.”
여전히 후안이 뭐라고 웅얼거리자 어린 사제가 대신 전해 주었다.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듯해 보였지만 아이작은 이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다른 성기사들, 그리고 델리아와 함께 온 귀족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팽팽한 긴장감의 중심에 아이작이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긴장의 끈을 끊는 것도, 그 위에서 몸을 튕기면서 노는 것도 전부 자신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다.
아이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사안이 시급하니 우선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지요.”
“중요한 일?”
델리아와 후안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
아이작은 오싹한 관심을 즐기면서 입을 열었다.
“예.”
아이작은 예배당의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헨드락 영지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