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성인 지정 (5)
꼭두새벽에 벌어진 소란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귀족들과 기사들을 소집한 델리아는 초조하게 식당을 서성였다.
“기사들은? 귀족들은 모두 모였나?”
“그게 아직 안 깬 사람들도…….”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문을 부숴서라도 당장 모이라고 해!”
델리아의 예민한 반응에 귀족들은 술렁였다.
그녀는 그런 귀족들의 반응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는 어둠과 환각, 환청을 처음 봤을 때 착란에 빠졌었다. 그녀의 난동을 알아차린 호위들이 달려온 덕분에 착란에서는 벗어났지만, 난장판이 된 그녀의 방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한 귀족들도 있었다.
식당 한구석에는 모포를 뒤집어쓴 채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는 귀족도 있었다. 그녀와 함께 먼지투성이가 되어 말을 타고 달렸을 정도로 강단 있는 귀족이었다. 옆에는 여러 차례 구토를 하다가 탈진한 귀족, 이빨 자국이 난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다가 붕대로 둘둘 싸매고서야 멈춘 기사도 있었다.
델리아 정도라면 아주 양호한 상태였던 것이다.
“역시 저주일까요?”
한 귀족이 델리아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주…….’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머리 깊이 박혀 있는 단어였다.
성배기사 아이작은 이미 저주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 사제들도 머무르고 있고, 르하르트도 별일 없다고 했었으니 안심하고 머물렀을 뿐이다.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천사가 남기는 저주의 종류는 다양하다. 신학에 지식이 없는 델리아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오?”
후안 주교와 온 성기사 중 하나가 식당에 들어섰다.
“아침 예배를 드릴 시간에 이런 소란이…….”
그는 뭐라고 하려 했지만 델리아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자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델리아는 성큼성큼 성기사에게 다가가 삿대질하며 물었다.
“그쪽은 아무 일도 없었소? 사제가 몇 명이나 있었는데 이런 저주도 어쩌지 못하는 거요? 심지어 주교님도 계시는데? 이단심문관은 멋으로 따라왔소?”
“무슨 망발을…….”
성기사는 얼굴을 붉히며 화내려 했지만, 상대는 후작이었다. 성기사가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봉신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밤새 저주에 시달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그제야 성기사는 식당 구석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저주의 후유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 성기사는 머뭇거리다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주교님께 보고드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
잠시 뒤 교단 쪽 사제들과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밤사이 저주에 시달린 사람들은 모두 7명. 모두 중앙 귀족 측 사람들이었다. 사제들은 델리아를 비롯해 저주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치료와 안정의 기적을 내렸지만 착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제 중 한 명이 델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델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오? 심지어 나도 걸렸던 것을?”
그녀의 거센 어투에 당황한 사제는 주눅이 든 듯했지만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악몽 자체가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착란 증세들은 그저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보이는 것뿐이지요. 만약 저주 때문이라면 증세가 모두 동일해야 하는데 리옹 후작님도 그렇고 모두 증세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은 옳았기 때문에 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저주의 증거라고 내세우려고 했던 이빨 자국은 벌써 다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한날한시에 우연히 악몽을 꿀 리는 없으니, 저희들도 저주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아직 별다른 흔적을 찾지는 못했으나, 천사가 추방당하면서 얌전히 물러났을 리는 없지요.”
“크흠…….”
델리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주 때문에 놀라고 당황하기는 했으나, 이게 천사가 추방당하면서 남긴 저주가 맞다면 아이작은 정말 큰 업적을 세운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인 아이작인 성인 지정 저지는 한층 더 어려워질 터였다.
그때 아이작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작은 침중한 표정으로 델리아에게 사과했다.
“제가 부족한 실력으로 천사에 손을 대 후작님께 불경한 기운이 찾아들었군요. 사과드립니다.”
델리아는 깜짝 놀라 그의 사과를 막았다.
“아닙니다. 성배기사님. 이게 어떻게 아이작 님 잘못이겠습니까. 제게 믿음이 부족하여 약한 마음을 가진 탓에 사특한 것이 스며든 것이지요.”
델리아의 말에는 어느새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하는 업적을 세운 것은 분명해 보였다. 비록 그녀 입장에서는 난처한 존재였지만 존경해 마땅한 성기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곤란하군요. 이대로 저주가 계속 이 땅에 남는다면 영지민들도 불안해할 겁니다. 저주받은 영지가 되어 버려질 수도 있겠군요.”
델리아는 아이작의 말에서 뭔가를 느꼈다. 어렴풋이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 꺼내기에는 힘든 발상이었다. 왜냐면 이 자리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시선이 쏠리자 후안 주교와 어린 사제가 입을 열었다.
“밤사이 이 성에 불경한 어둠이 찾아들었습니다. 신도님들. 후안 주교님께서는 이후로 성에 축성을 내려 저주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 임시방편이긴 하나, 머무는 동안은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감사한 조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에게만 보호의 기적을 내린 탓에 자신들만 저주에 시달린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귀족들만 저주에 시달린 것이 바로 그 증거라면서.
“그리고,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의 조사와 목격자들의 증언, 사제들의 조사를 통해 아이작 성배기사가 이곳에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명실상부한 빛의 법전께서 눈여겨보실 만한 업적입니다.”
귀족들과 사제, 그리고 성기사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아이작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진영에 상관없이 엄청난 위업을 세운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 후안 주교님께서는 이 조사 결과를 중앙에 보고드리고 성인으로 지정할 것을 요청드릴 예정입니다.”
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조사 결과가 그대로 교황에게 전달된다면 아이작이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물론 아이작 님이 성체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해 봐야겠으나…….”
쿵. 그때 성을 흔들리게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지? 나가서 확인해 봐라.”
델리아가 말하기도 전에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나간 그들 앞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튀어 올랐다. 굉음과 함께 식당 안까지 돌덩어리가 굴러들어온 순간 귀족들 머리에 스친 것은 ‘공성전’이라는 단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칼을 빼 들며 나가려던 그들에게 앞서 나간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트롤입니다!”
***
아이작은 헤사벨에게서 전해지는 의지에 작게 긍정의 메시지를 보냈다. 성벽을 타고 올라온 트롤들은 귀족들과 사제들이 모인 식당 입구를 향해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내던졌다.
‘역시 말을 잘 듣는군.’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헤사벨이 붉은 성배로부터 받은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트롤들은 붉은 성배 클럽에서 키우는 파수견 같은 존재였고, 헤사벨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헤사벨이 붉은 성배 클럽에서 배교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쾅! 돌덩어리에 맞을 뻔한 성기사는 잇소리를 내며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오는 성기사를 향해 트롤이 돌덩이를 던졌다. 하지만 돌과 맞닿는 순간 성기사가 내뿜는 오러가 더욱 강해졌다. 돌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를 노린 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텅, 터텅!
연달아 던져진 돌덩이에 성기사가 휘청거리다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바로 그 곁을 스치며 아이작이 뛰어 올라갔다. 성기사를 노렸던 돌덩이가 아이작의 정면을 향해 떨어졌다. 아니, 사실 아이작이 돌덩이를 향해 뛰어든 것에 더 가까웠다.
까드드득, 쾅!
아이작은 갑옷의 어깨 부분으로 돌덩이를 스쳐 보냈다. 성기사처럼 갑옷을 감싼 오러는 없었지만, 내부를 감싼 촉수들이 충격을 경감시켜 주었다.
‘역시 점령한 성역 안에서는 갑옷 자체의 방어력도 올라가는군.’
순식간에 성벽 위에 다다른 아이작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까드드득! 그러나 검은 불쾌한 소리를 내며 트롤의 피부를 거칠게 긁어냈다. 트롤은 피가 튀어 오르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의 결전으로 기적이 마모된 심판의 검은 더 이상 삿된 것들을 불태우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 상처는 트롤에게 긁힌 정도의 흉터밖에 남기지 못할 것이다.
[퇴각시키겠습니다.]“우우우! 아아아!”
트롤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올라왔을 때처럼 성벽을 타고 내려갔다. 뒤늦게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왔던 성기사는 허탈하게 도망치는 트롤들을 내려다보았다. 뛰어내려서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산속에서 고립된 상태로 다수의 트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성기사라 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트롤들이 헤집고 지나간 성벽과 안쪽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제들과 귀족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오?”
한 귀족의 말에 아이작은 시치미를 뚝 떼며 입을 열었다.
“트롤은 붉은 성배의 개라지요. 아마 저주에 이끌려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사제들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괴물들이 이끌릴 정도라면 상당히 강한 저주라는 것인데…….”
“게다가 트롤이라면 저주의 영향권이 상당히 넓을 수도 있겠군요.”
빛의 법전이 가진 기적의 힘과 트롤의 재생 능력은 상극인 탓에 대부분의 트롤들은 깊은 산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헨드락 영지 자체가 산골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사제들의 착각이었다.
이미 일대에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호위 병력을 겸해 모아 놓은 트롤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정작 놈들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당할 때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개중 몇몇은 헤사벨의 개가 된 상태였다.
“이 상태로는 성인 지정이 어려울 것 같군요.”
델리아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후안 주교를 향해 말했다. 후안 주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천사 퇴치는 물론 훌륭한 위업이다. 하지만 정작 퇴치한 장소에 강력한 저주가 남아서 영지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땅이 황폐화된다면 온전한 업적을 이루었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비웃음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일로 이 땅에 저주가 남아 주민들의 삶이 고되게 된다면, 저는 그 어떤 영광도 누릴 생각이 없습니다.”
어린 사제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아이작이 말을 끊고 선언했다. 숭고한 성배기사다운 말이었지만 결국 성인 지정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구구절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사제들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후안 주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주를 물리치도록 하지.”
후안 주교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아이작과 델리아는 약간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후안 주교는 주름투성이 얼굴을 움직이며 똑바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남아 저주를 물리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그러니…….”
그는 주름진 손을 들어 아이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은 이 땅에 찾아든 불청객들을 퇴치하라. 신도들이 고통받는 길이 없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