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어부지리 (1)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감히!”
델리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성기사 하나가 발끈하며 나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귀족들과 기사들도 우르르 나섰다. 그들은 안 그래도 델리아가 빚을 받아 내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헨드락 영지를 멋대로 교단이 처분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고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작도 주교에 비해 끗발이 밀리지는 않는다.
“제국의 봉토를 어디 함부로 건드리려 하는가!”
“아무리 교단이라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이, 이놈들이……!”
다른 사제들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차피 교단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니 큰 욕심은 없었지만, 교단의 체면이 망가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황제파 귀족들 앞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실제로, 이득도 만만치 않았다. 수도원이 생긴다면 그들 중 누군가가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교단 경비의 대부분은 기부금으로 운영되지만, 수도원은 지역이나 정책에 따라 영주 못지않은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귀족인 헨드락의 영지라는 점이다.
즉, 황제가 봉신에게 하사한 영토다.
비록 문제가 많긴 하지만 교단에서 멋대로 접수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이윽고 벌어진 난장판이 벌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한없이 높아질지 기대했다.
“그만!”
그때 후안 주교가 준엄하게 일갈했다. 델리아 후작도 의견이 격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들을 말리고 있었다.
“수도원은 예를 든 것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올라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미 성배기사께서 저주를 물리친 이상 사악한 기운의 실체가 확인된 바도 없는데…….”
“바로 그 성배기사가 기운을 눌러달라고 요청했다. 게다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타천사를 이용할 생각으로 이곳을 점령하려 한 것이라면,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후안은 델리아를 언짢은 눈으로 바라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쳐보지. 그러면 이 영지를 어떻게 할 건가? 자네들 중 누가 이 영지를 관리할 건가? 아니면 팔아먹을 건가? 천사에게 저주받은 영지를?”
귀족들은 조용해졌다. 그들은 영지를 어떻게든 처분하거나 갈라 먹어서라도 빚을 받으러 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주받은 게 사실인 데다 교단도 손 놓고 떠날 정도의 불길한 무언가가 있다면, 대체 영지를 누구에게 팔아먹을 것인가? 만약 팔더라도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델리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의 봉토입니다. 교단이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은 쓸데없는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황제께서 고작 이런 일로 교단과 갈등을 빚으시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교단은 고작 이런 일로 황제 폐하와 갈등을 빚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무엄한…….”
“자, 잠시만요.”
슬슬 감정싸움이 되기 직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중앙 귀족들과 함께 온 상인, 에이단이었다.
“지금 저희는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의견을 빼놓고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
델리아는 에이단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가 문득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가 오늘 저주 퇴치를 위해 외출하기 직전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무언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던 이야기.
그때 아이작은 델리아에게 분명 무언가를 암시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성배기사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뻔했군. 이 영지를 수복한 것도 성배기사님이고, 저주를 퇴치한 것도 성배기사님이지요. 가장 중요한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안 되지.”
사실 가장 큰 발언권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델리아는 아이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발언권을 넘겼다. 그러나 아이작이 입을 열기 전에 에이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말했다.
“아뇨. 성배기사님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구요?”
“카일 헨드락. 이 영지의 현재 소유주요.”
***
카일 헨드락은 이미 지난 며칠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이제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아니, 아이작이 회복시켰다.
카일의 넋을 일부러 빼놓고 있던 것은 아이작이었으니까.
카일이 성기사들 손에 질질 끌려오다시피 해서 홀에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족들은 다소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카일 헨드락은 큰 죄인이었지만, 그 혐의는 대부분 이단 그리고 배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교의 천사와 접촉한 죄, 성배기사를 공격한 죄, 그리고 방금 타천사를 숨긴 죄가 추가되었다.
르하르트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공격한 죄목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라엘라와 오언에게 씌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언의 반란 이전에 일어난 범죄들은 꼼짝없이 카일의 잘못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카일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교단에 싹싹 빌면서 영지를 바친다거나 하면 귀족들 입장은 붕 떠버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 헨드락.”
쿵. 성기사들이 카일을 홀 바닥에 무릎 꿇렸다. 후안은 카일을 주름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멍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
“공식 재판이 아니니 죄목들을 읊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지. 다만 이 자리를 빌어 고해성사를 통해 숨겨진 죄가 있는지 낱낱이 밝혀보게.”
“예…….”
카일은 힘없이 대답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죄를 고백합니다…….”
카일은 스스로의 죄목을 읊기 시작했다.
“저는 영지의 자금을 횡령하여 투기 행위를 저질렀으며, 신의에 성실하지 못했고, 영지를 불성실하게 다스려 황제 폐하께서 맡긴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예배에 불성실하게 참석했고…….”
“잠깐.”
후안이 언짢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잘한 것들은 생략하도록 하지. 자네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 텐데.”
카일은 멍하니 후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교의 천사와 접촉한 것, 성배기사를 공격하고 타천사를 은닉한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사제 하나가 성난 듯 옆에서 다그쳤다. 그 말에 카일은 눈을 크게 뜨고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교의 천사라니, 저는 그런 것과 만난 적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후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이솔데를 비롯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뭐?”
“후안에게서는 어떤 정신 오염이나 약물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영주성 안에 있는 물품들도 샅샅이 조사해 보았는데, 카일 헨드락이 붉은 성배에 물들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약간의 무례와 고통을 수반한 방법을 쓰면 거의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무모한 방식으로 이단의 증거를 추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정말 찾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천사와의 직접적인 접촉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은 카일의 신념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카일이 무능에 의해 조종당한 정황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성배기사나 르하르트 백작을 공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후안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델리아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죄목들을 라엘라에게 덮어씌운다면 공은 귀족들에게 넘어온다.
노인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카일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후안 주교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입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놈!”
후안이 버럭 화를 냈지만 그를 보호하듯 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후안 주교님,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식 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변호의 기회는 주셔야지요.”
후안은 이를 갈려고 했지만 이빨이 얼마 없어서 잇몸끼리 부딪칠 뿐이었다.
델리아는 그 모습이 자못 즐거웠다.
“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게.”
교단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했다. 물론 카일이 영지를 보존한다 해도 그다음 영지를 물어뜯는 것은 귀족파가 될 것이다. 그래도 목숨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후안의 허락은 없었지만 카일이 변호를 시작했다.
“저는 라엘라에게 조종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황제 폐하에게 하사받은 봉토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도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모든 신뢰에 성실하게 행동하고, 굳건한 믿음을 지켜왔다면 감히 이교의 천사가 제게 접촉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특히 성에서 오랫동안 카일을 모시면서 일을 돕던 신하들, 하인들의 표정이 더더욱 그랬다.
카일이 원래 저렇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던 사람이었나?
“무능을 이유로 자기 죄를 변호하려는 것이라면…….”
“아니오.”
후안이 다그치려 할 때 카일이 입을 뗐다.
“이 모든 무능은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저는 모든 작위와 봉토를 내려놓고 남은 생을 뉘우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이 영지를 신께서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즐겁게 후안의 반응을 지켜보던 델리아는 마지막 말에 경악하며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다.
봉토를 포기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다. 어차피 쥐고 있어 봤자 귀족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테니까. 순순히 내려놓는다면 여생은 배곯지 않으며 살도록 봐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렇게 빠진단 말인가?
놀란 것은 후안도 마찬가지였다.
“영지를 빛의 법전에 헌납한단 말인가?”
“아니오.”
카일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죄를 지은 분, 제게 뉘우칠 기회를 주고 깨달음을 주신 아이작 성배기사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
카일의 말에 홀 안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이작에게 영지를 바친다는 것은 빛의 법전에게 바친다는 뜻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방랑하는 성배기사일 뿐, 특정한 기사단이나 교구에 속해 있지 않다.
“성배기사가 영토를 가질 수 있나?”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지요.”
과거 성배기사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괴물을 퇴치하고 큰 공을 세우곤 했다. 그렇게 괴물을 퇴치한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주지거나 척박한 곳인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 해당 지역의 영주나 토호에 의해 찬사의 의미로 성배기사에게 기증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싸한 영지 하나가 통째로 주어진 경우는 없었다.
“헨드락 영지를 아이작에게 통째로 넘기겠다고?”
“예. 이교의 천사를 몰아내고 저주를 물리친 분이시니, 이곳의 주민들도 납득할 수 있는 가장 어울리시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아이작 님께서 수도원을 세워 이곳의 사악한 기운을 누른다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나쁘지 않군.”
후안은 빛의 법전이 아닌 아이작 개인에게 준다는 말이 거슬렸지만, 명목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작은 성배기사 아닌가. 게다가 성인으로 추대할 예정이었으니, 그 성인이 소유한 수도원이라면 누가 봐도 빛의 법전 영토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머리가 팽팽 돌아가던 델리아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요. 아직 문제가 있습니다. 카일에게는 거액의 채무가 있습니다. 그 채무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이 영지를 처분할 수 없습니다.”
“채무라면 교단에서 해결해주도록 하지.”
“헨드락 영지가 진 채무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카일의 빚은 이번에 로어커스 사태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갚아야 할 것은 우리 빚만이 아닙니다.”
후안은 카일의 빚이 얼마인지 확인하라고 사제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교단이 카일에게 꿔 준 빚과 아이작의 업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사제가 창백한 안색으로 헨드락 영지의 장부를 가져왔다.
그 액수를 본 후안은 장부로 카일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후안이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물론 아이작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후안이 정치적, 재정적 생명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저주받았다고 소문난 영지를 처분한다고 제값에 팔릴 리도 없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결국 팽팽한 기싸움 속에 다시 이야기가 방황하려던 찰나, 델리아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영지를 누가 가지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제국이 채무를 해결하겠습니다. 대신.”
델리아가 선택한 것은 헨드락 영지를 회색 지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작 성배기사님이 황제 폐하로부터 봉토를 하사받는 것으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