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어부지리 (2)
“아이작 경에게, 뭐라고?”
후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봉토를 회수하시고, 그걸 아이작 님께 하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성배기사님의 업적을 기리는 수도원을 지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채무도 제가 알아서 해결하지요.”
델리아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후안은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렸다. 교단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채무도 제국에서 해결하고, 수도원도 짓는 데다, 아이작에게 든든한 기반이 될 땅까지 주겠다고?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황제가 아이작에게 영지를 하사한다는 것은, 그에게 작위를 준다는 뜻이다.
즉, 아이작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 무슨……!”
“그러고 보니 아이작 님을 성인으로 추대할 것이란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후안은 입을 콱 다물었다. 델리아는 기죽지 않고 후안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설마 황제 폐하께 충성 맹세한 귀족이라는 이유로 성인 추대를 취소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델리아가 의도한 게 이것이었다.
아이작이 천사를 퇴치한 것이 분명한 이상, 후안은 아이작을 성인으로 추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황제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귀족이 되어버리면, 교단 입장에선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된다. 안 그래도 힘의 균형이 팽팽한 상태에서 제 손으로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다.
결국 후안은 이를 악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 추대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세. 나 혼자서 결론 내릴 수도 없는 것이고, 업적 평가도 더 정밀하게 이뤄져야 하지.”
사실상 아이작의 성인 추대를 취소한다는 말이었다.
사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이라는 이유로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경우가 더 많을 뿐이었다.
아이작이 제국의 귀족이 된다고 그의 업적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성인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후안은 델리아의 논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해 보았지만, 애당초 헨드락 영지의 처분권은 카일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카일의 영지를 처분할 권리가 있는 채무자들, 그중에서도 가장 돈을 많이 투자한 중앙 귀족들의 의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후안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차라리 델리아의 제안대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아이작이 신실한 성배기사임은 분명하다. 장래가 밝은 성배기사를 교단의 새로운 얼굴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상징성에 불과한 것. 실리를 따지자면 이 자리에 교단의 새로운 영토가 생긴다고 볼 수도 있지.’
후안은 은근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같은 훌륭한 성배기사가 영지에 눌러앉아 다스리거나 하진 않을 테고, 대신할 수도원장을 파견해 달라 요청할 것이다. 즉, 약간 편법적으로 교단 영토가 생기는 셈이다. 교단은 늘 후원금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이런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는 수도원 영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영지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교단의 입김이 강한 영주가 될 수밖에 없다.
‘저것 봐라.’
아이작은 후안과 눈이 마주치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꿰뚫어 보았다.
분명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데? 명분만 포기하면 실리는 얻게 되는 거잖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물론 아이작이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정반대였다.
아이작은 이 영지를 통해 빛의 법전에 빨대를 꽂을 생각이었다.
“……우리 성배기사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 아이작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윽고 공이 아이작에게 넘어왔다. 욕심 없고 청렴한, 그리고 신실함으로 빛나는 성배기사.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이든, 빛의 법전 사제들이든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훌륭한 회색 지대였다.
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사양과 겸손, 겸양 끝에 결국 아이작은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했다.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신의 의지가 이 땅에 고스란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
“이제 귀족이 되었군. 축하하오.”
아이작이 성벽 위에서 새롭게 자신의 영지가 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델리아가 찾아왔다. 델리아는 처음 봤을 때보다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이작은 영지가 생겼기 때문에 이제 공식적으로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할 수는 없으므로, 후작인 델리아가 대신하여 영지를 하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황제가 제국 안에 사는 수천 명의 귀족들에게 일일이 충성 맹세를 받을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대행은 흔하게 이루어지곤 했다.
그렇게 아이작에게 주어진 직위는 남작(Baron)이었다.
“제 주제에 귀족이라니, 분에 넘치는 작위군요.”
“무슨 소리. 자네 말고 이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소?”
방탕한 영주를 몰아내고, 이웃 영주의 병사들을 학살한 기사의 반란을 단신으로 제압했으며, 이교의 천사를 몰아내고, 그 천사의 저주까지 물리친 성배기사.
영웅담에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 누구도 아이작이 이 영지를 갖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었다.
사실 카스트 제도가 확립된 사회라면 이렇게 작위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귀족의 힘보다 교단의 힘이 더 크고,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급 이동이 생각보다 유연했다.
“솔직히 이 영지 자체는 별로 욕심이 안 나거든. 귀족들은 이런 골칫덩이 영지보다는 돈만 받아가면 그만이고, 교단은 원래부터 별생각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네에겐 그렇지 않겠지.”
델리아는 씩 웃으며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자네가 이 영지를 갖게 된 것은, 자네가 가장 이 영지를 원했기 때문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잡아떼기는. 이미 내게 의사를 보이지 않았소?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나와 교단의 입장 차를 이해하고 유도한 거 아니오? 성인 같은 허울보다는 영지와 귀족 작위라는 실리를 얻으려고.”
정확히는 성인이 되지 않으려고 영지를 얻은 것에 가깝다.
물론 설령 성인이 된다 하더라도 영지를 얻어 낼 생각이긴 했다. 다만 아이작은 그 의사를 숨기려 했다.
델리아는 그런 아이작의 욕망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경계할 필요 없소. 나는 야망 있고 욕심 넘치는 사람을 좋아해. 그 사람이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델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이작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가 성배기사 껍데기를 쓰고 있는 이유도 그거겠지.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성배기사야말로 가장 빠르게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자리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명성도 충분하고, 영지도 얻었겠다, 이번에 황제 폐하께 충성 맹세를 하면서 중앙으로 올 생각은 없소? 발트제메르 황제 폐하께선 무인이오. 강한 기사라면 옆에 두고 귀하게 쓸 게 분명하오.”
분명 그녀 말대로일 것이다. 발트제메르는 호시탐탐 성지 수복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성배기사라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칼센 밀터의 실종으로 전력에 공백이 생긴 상태라면 더더욱.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이룬 업적은 그의 힘만으로 일군 것이 아니다.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그의 힘을 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자네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분명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자인 게 분명한데, 왜 이런 기회를 마다하는 거요?”
“뭐, 더 큰 뜻이 있다고 해두지요.”
아이작의 대답에 델리아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황제 폐하께 불충한 뜻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욕심을 내고, 탐내고, 그리고 노리시오. 젊은이가 패기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성공하거든 중앙의 이 델리아 리옹을 잊지 말고.”
아이작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이번 일에는 그녀의 도움이 크기도 했으니 분명 빚을 갚을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로 지출이 크지 않으십니까?”
아이작의 말에 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제국이 갚겠다고는 했지만, 황제 폐하께 보고도 없이 진행할 수 없으니 내 사재를 털어야 했고…… 귀족들도 원금을 다 회수하지 못했소. 그래도 절반은 건진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델리아가 귀족들을 어떻게 압박하고 협박했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사실상 델리아가 자기 재산을 털어서 귀족들의 빚을 갚아 주는 셈인데, 불만을 토로하는 귀족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몽땅 털릴 뻔한 것을 절반이라도 건진 걸 감사히 여겨야지.
“그래도 아무것도 못 받고 빠진 교단보다는 낫지. 교단은 돌려받은 채무금 전액을 이곳에 수도원을 짓는 데 쓰기로 했소. 성을 개조하는 거니 돈이 많이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니.”
사실상 교단의 몫은 아이작에게 들어온 셈이었다. 결국 아이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손해를 크게 입고 빠진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델리아였다. 중앙 귀족들 중 가장 큰 황제 충성 파벌의 수장이라고는 들었지만 채무금을 돌려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큰 지출을 떠안았으니.
하지만 그녀는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의 성인 추대를 막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하기야, 황제의 권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밑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도 크니 그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지출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훌륭한 인재를 알아가서 다행이오. 더군다나 그 인재가 내게서 영지를 하사받았으니, 자네가 명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내 이름도 알려지지 않겠소?”
아이작은 웃고 말았다.
위로는 이미 떠오른 태양인 황제, 아래에는 떠오르기 시작한 샛별인 성배기사를 둔다 이건가.
확실히 그렇게 들으니 델리아의 생각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돈으로 권위를 산 셈이었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판단에 맞장구쳐 주기 위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 영지에도 새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혹시 델리아 님께서 지어주실 수 있을지요?”
“응? 그야 성을 따서…… 아아, 그렇지. 성이 없다고 했지.”
고아 출신이 많은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성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성기사들은 자신의 성보다 출신 기사단, 출신 수도원을 더 가족처럼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성기사 출신 귀족은 자신이 자란 수도원에서 성을 따오기도 하지만, 아이작은 딱히 그럴 만큼 수도원에 애정이 있진 않았다.
“태어난 곳은 알고 있소?”
“여기서 먼 동쪽입니다.”
아이작은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게임 속 세계인만큼 정말 동쪽은 아니겠지만, 정서적으로 이곳은 유럽에 가까워 보였기에 아이작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델리아는 약간 다른 곳을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이름이 아이작(Issac)이니, 성은 동부식으로 읽은 이사크레아(Issacrea) 어떻소?”
‘그러면 내 이름은 아이작 아이작인가.’
아이작은 어처구니없는 네이밍 센스라고 생각했지만, 내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자신의 원래 이름인 ‘이삭’과 첫 어절의 어감이 비슷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 땅은 이제 이사크레아 영지군요.”
“다시 한번 축하하오, 아이작 이사크레아 남작.”
***
“조사 결과가 나왔나?”
“예. 일리야 도테 지부장님. 성배기사와 동행했던 성기사의 심문 결과, 아이작이 한 번도 기적을 쓰지 않았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헨드락, 이제는 이사크레아 령이 된 땅의 외곽 숲.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녀가 모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출한 차림새였지만 망토에 박힌 갈까마귀 브로치들이 그들의 신분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후안과 함께 파견된 이단심문관들이었다.
“기적을 쓰지 않는 성배기사라…….”
일리야 도테는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동부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가장 험난한 지역의 이단심문관이었다.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 클럽으로부터 인접한 지역인만큼 배교나 이교의 침입 같은 사건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으로서의 능력도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조금 특이했다. 일리야 도테는 아이작을 보자마자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샅샅이 성을 뒤지고 조사해 봐도 어디에서도 아이작에 대한 배교나 이단에 대한 혐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동굴에 들어갈 때에도 빛의 기적 대신 루앗딘 열쇠를 사용해서 주변을 밝혔다더군요. 동행한 성기사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데다, 성배기사에게 감명을 받은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긴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기적은 가장 기초적인 기적이다. 촛불에 불을 붙이는 기적 다음으로 먼저 배우는 것이기도 했다. 이단심문관들은 침묵하고 있는 다른 한 명을 바라보았다.
이솔데 브란트는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기억에도 기적을 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에는 성기사로서 이름을 날리기 이전이라 특이하다 느끼지는 못했지요.”
“평범한 성기사라면 자질 미숙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교의 천사까지 물리친 성배기사라는 점이 문제지.”
일리야는 두 이단심문관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성배기사가 후광을 띄웠다는 보고는 들은 적 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지.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기적을 쓰지 못하는 성기사가 천사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할까?”
“살아 돌아온 엘릴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정점을 찍을 정도로 극도로 단련한 존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언급된 바로 그 엘릴은 결국 신이 되었으니,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고 봐야 했다.
그때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가 성체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체라면 그 몸 자체가 기적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성체라는 눈에 두드러지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로군…….”
일리야는 명성을 날리는 성배기사를 감 때문에 함부로 몰아붙이거나 음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작이 보여준 모범적인 태도나 업적, 그 어디에도 악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뢰하되 단지 조금 더 조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솔데, 자네가 성배기사와 안면이 있다고 했지. 조금 더 가까이서 관찰해주게.”
“예.”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교단에서 성인으로까지 만들려고 했던 자다. 앞으로도 명성을 날리겠지.”
일리야는 말하면서 누군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두 번 다시 칼센 밀터 같은 경우를 만들어선 안 돼. 반드시 확인하게.”
“알겠습니다.”
***
“……그래서 제가 아이작 경과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은 이단심문관들과 나눈 대화를 고스란히 털어놓는 이솔데를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걸 왜 다 이야기합니까? 모르는 척하고 조용히 절 감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