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
8화. 더 큰 먹이 (3)
아이작은 산비탈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네발짐승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에 약하다.
멧돼지 역시 광포해진 상태였지만, 다리가 부러지지 않으려는 본능은 있는 듯 주춤거리며 내려왔다. 덕분에 아이작은 금방 따라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유인해서…….’
아이작은 멧돼지가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무 앞에서 있는 힘껏 뛰어올라 가지에 매달렸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촉수는 손에서 튀어나와 나무에 매달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쾅! 멧돼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를 들이받았다. 아이작은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흔들렸지만 촉수 덕분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지금!’
아이작은 멧돼지가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재빨리 아래에 있는 놈을 향해 뛰어내렸다.
촉수가 날카로운 창처럼 돌변하며 찔러 들어갔다.
쥐를 잡을 때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촉수는 멧돼지의 두터운 두개골을 뚫지 못하고 대신 가죽을 찢었다. 멧돼지는 촉수가 몸을 휘감는 고통에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와득, 와드득!
촉수는 두개골을 뚫지는 못해도 마치 빨판이나 이빨이라도 달린 것처럼 멧돼지의 가죽을 떼어냈다.
순식간에 멧돼지의 얼굴에 뼈가 드러났다.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고 날뛰었다.
쩍. 결국 촉수는 멧돼지의 얼굴 가죽 일부를 뜯어낸 채 떨어져 나갔다. 멧돼지는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떨어진 촉수를 물어뜯었다.
‘질긴 놈이군.’
그러나 아이작에게 느껴진 것은 간지러운 감촉뿐이었다.
잘근잘근 씹히던 촉수가 이상행동을 취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씹히던 촉수는 오히려 멧돼지의 이빨을 부러뜨리고 혀를 물어뜯으며 입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성하지 않은 정신으로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뒤늦게 몸부림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야, 잠깐. 야……!”
동시에 촉수에 매달린 아이작의 몸도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촉수를 회수할까 했지만 이를 악물고 꽉 붙들었다.
놈은 잡은 사냥감이다.
뿐만 아니라 상처 입고 흉포해진 놈이 어딜 가서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 아이작은 멧돼지를 끝장내기 위해 촉수를 더더욱 안쪽 깊숙한 곳까지 뻗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작의 몸이 붕 떠올랐다.
아찔한 감각이 스쳤다. 동시에 쾅 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큭……!”
충격도 잠시, 아이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멍 뚫린 천장이 보였다.
그다지 높지 않은 수직동굴이었다. 위에서 멧돼지와 함께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크륵, 크르르륵…….”
어둠 속에서 멧돼지가 흉포한 소리를 내며 절뚝거렸다. 아이작은 촉수가 회수되는 것을 느꼈다. 회수되는 촉수에는 멧돼지의 아래턱 부분이 매달려 있었다.
‘역시 괴물 새끼라니까. 멧돼지한테 씹히고도 오히려 턱을 떼 가지고 돌아오네?’
아이작은 어이없으면서도 어째선지 한결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괴물 새끼긴 하지만 그래도 내 괴물 새끼다.
지금은 어지간한 칼보다는 촉수가 더 든든했다.
멧돼지는 충격 때문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멧돼지를 쿠션 삼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은 아이작은 멧돼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쿵, 쿵. 멧돼지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털고 머리로 벽을 들이받았다. 이미 병에 걸린 멧돼지는 낙하의 충격과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리하려면 지금 빨리 처리해야 해.’
아이작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대신 재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척을 느낀 멧돼지가 고개를 돌렸다.
“야!”
어린 목소리지만 동굴 안에서 메아리친 소리는 멧돼지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했다. 멧돼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아이작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게벨이 얼마 전에 선물로 준 광휘석 목걸이였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광휘석 목걸이를 돌에 내려쳤다.
따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동굴을 가득 메우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뀌이이이이익!”
어둠 속에서 폭발하는 섬광에 눈이 멀어버린 멧돼지가 광분하며 날뛰었다. 아이작은 섬광탄과 비슷한 효과에 만족했다. 게벨이 경고했던 대로 빛이 강하게 터진 대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반년밖에 안 남았다던 광휘석의 수명이 이제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멧돼지는 아이작을 스쳐 지나가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들이받았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찢어진 얼굴이 한층 더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뀍, 뀌익!”
돼지 멱따는 소리가 끔찍했다. 아이작은 놈의 등 위로 달려들었다. 또 놈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꽉 매달린 순간, 왼손에서 촉수가 빠르게 솟구쳐 나왔다.
휘리리릭! 아이작이 다시 한번 공격한 순간, 채찍이 공기를 찢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촉수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무수한 송곳니들이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처럼 촉수들이 멧돼지의 살갗을 뚫고 파고들었다.
“뒈져!”
와드드득!
뼈를 부수고 부러뜨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멧돼지는 크게 날뛰었지만 아이작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 것은 아이작이다.
멧돼지는 머리고 등이고 마구 벽에 부딪치며 난동을 부렸다. 아이작은 몇 번이나 아찔한 충격에 의식을 놓을 뻔했다. 뼈 어딘가 부러지는 느낌도 들었다. 이러다 손을 놓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순간, 아이작은 몸 안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뚜둑.
전조도 없이 아이작의 가슴팍 상처가 갈라졌다.
또? 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둑이 무너진 제방처럼 순식간에 아이작의 가슴이 쩍 입을 벌리면서 수천 가닥의 혀를 토해냈다. 촉수 무리는 아이작의 몸보다도 더 큰 멧돼지를 단숨에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멧돼지의 비명보다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가닥가닥 찢겨나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그리고 짧았다. 멧돼지는 촉수 안에서 분해당하며 이빨보다 큰 부위 한쪽도 남기지 못했다.
촉수들은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날름거리며 핥은 뒤, 주변에 다른 생명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아이작의 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역병멧돼지(C)’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짐승의 완력(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질긴 가죽’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임시 특전은 소화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혼돈의 대리인’ 재사용 대기 시간 30일]“……하아.”
아이작은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새로 포식한 먹이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살점 저장고(A) / 포식한 상대를 소화시킬 때까지 재생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이계의 청소부(B) / 이제 양손에서 촉수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저 너머의 기생충(A) / 촉수에 닿은 상대의 살갗 아래 짧은 수명을 가진 기생충을 낳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대상은 지속적인 고통을 입습니다.]‘포상?’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이 제시했던 임무를 성공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불길한 문양을 가진 타로 카드들이 나타났다. 불길한 그림체에, 촉수 무늬 테두리로 둘러싸인 카드였다. 카드는 경전과 달리 불길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살점 저장고, 이계의 청소부, 저 너머의 기생충이라…… 또 혼돈 속성 몬스터 스킬이군.’
아이작은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처럼, 또 혼돈 속성 몬스터 스킬이 나온 것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쁨 반, 착잡함 반이었다.
‘혼돈’ 속성 몬스터들은 최소 상급에서 최상급으로 분류된다. 오죽하면 최상급 혼돈 속성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지역은 미개발 지역이라 일부러 막아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몬스터들도 몬스터들 나름의 스킬을 사용해서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는데, 몬스터 스킬을 딱히 캐릭터 간 밸런스를 고려해서 만들어 뒀을 리가 없다. 당연히 캐릭터가 갖게 된다면 말도 안 되게 강한 스킬뿐이다.
‘문제라면 정작 이 스킬들은 사람들 앞에서 쓸 수 없다는 거겠지.’
찜찜하긴 했지만, 기껏 주어진 특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게 강력한 혼돈 속성 몬스터의 것이라면…….
‘살점 저장고는 체력 회복, 이계의 청소부는 공격 횟수 증가, 저 너머의 기생충은 도트 데미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아이작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제일 현명한 선택을 짜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론은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여기서 이놈의 촉수를 더 늘린다고? 말도 안 되지. 사람 앞에서 촉수를 꺼내서 살갗 아래 고문용 기생충을 심기? 지금 이 수도원에서 이걸 어디에 쓸 것이며, 쓴다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
게다가 지금 당장은 아이작 본인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가 고른 것은 첫 번째 선택지였다.
[살점 저장고(A)]이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픽하면 죽기 십상이다. 무사히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재생 특전은 귀중했다.
무엇보다 살점 저장고는 갖은 동물과 괴물들을 포식하며 성장해야 하는 아이작에게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카드를 집은 순간 다른 카드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며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아이작이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동굴 위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할 때였다. 기지개를 켜려던 아이작은 온몸이 통증으로 비명을 지를 것을 예상하며 움찔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몸이 개운하게 느껴졌다.
‘분명 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것 같았는데?’
아이작은 몸을 살펴보았다. 뼈는 물론이고 상처도 없었다.
‘아, 아까 골랐던 포상 때문인가?’
아이작의 의문에 응답하듯이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살점 저장고’ 특전을 부여했습니다.] [포식한 상대를 소화시킬 때까지 재생 속도를 대폭 증가시킵니다.]아이작은 그 커다란 멧돼지를 통째로 포식했으니 상처가 회복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회복 효과는 체력과 정신력에도 해당하는 건지, 피곤함도 싹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약간 탁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 수도원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혼돈의 대리인인지 뭔지 그걸 발동한 후유증인가?’
아이작은 자신이 이 수도원에 왔을 때 한 달 동안 몽롱한 상태에서 보냈던 것이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촉수 무리를 불러낸 후유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면 몸에서 튀어나오는 촉수 무리는 확실히 강력하다. 하지만 그때 아이작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자신의 손, 아니 촉수로 멧돼지를 죽일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크게 상처 입은 것도 아니니 칼센에게 당했을 때처럼 정말 위험했던 것도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튀어나와 주변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려는 건…… 조금 곤란하긴 하군.’
게다가 한번 발동하면 맹렬한 수면욕 때문에 아이작은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메시지대로라면 30일 동안은 또 그 혼돈의 대리인인지 뭔지가 튀어나오지 않을 테니, 완전히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도망칠 기회마저 잃을 수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일단 빨리 돌아가야겠어.’
지금쯤이면 수도사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잡아먹혔다고 생각할 수도.
해가 떠올라도 동굴 안은 캄캄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희끄무레한 동굴을 살펴보고 이 동굴이 자연적으로 생긴 형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통로는 고르게 다져져 있었고, 토굴이 무너지지 않게 만든 받침대나 횃불을 꽂는 고정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방치된 듯 사용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어온 구멍은 우연히 지반이 무너져 생긴 연결된 것 같았다.
‘위치를 기억해두는 게 좋겠군.’
수도원 밖에 숨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이작은 빛의 법전 수도사들에게 켕기는 점이 많았으니까.
아이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했다.
덤불을 헤치고 빠져나오자 차가운 가을비가 뺨을 적셨다.
‘또 엉뚱한 짐승이랑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때 아이작은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아이작의 몸이 멈췄다.
비에 젖은 잎사귀 사이에서 더 큰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작이 죽였던 놈보다 덩치가 훨씬 큰 놈이었다.
‘이건 뭔…… 아, 설마 이 굴을 집으로 쓰고 있던 놈들인가?’
녀석은 아이작이 죽인 놈이랑 다르게 건강한 듯 경계하며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에게서는 같은 동족의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긴장하면서 촉수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멧돼지 포식 특전으로 힘이 강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더 쉽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멧돼지는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듯 이내 거칠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촉수를 꺼내려던 순간, 누군가 그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면에서 달려드는 멧돼지를 향해 침착하게 검을 들어 내려쳤다. 순간 어두컴컴하던 숲 안에 눈이 아플 정도로 섬광이 번뜩였다. 가을비 때문에 햇빛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아이작의 바로 앞에 몸이 절반으로 쪼개진 멧돼지가 보였다.
“꼬맹이, 괜찮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