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0)
80화. 탁란 (1)
“감시받는 게 꺼려지십니까, 아이작 경?”
그런 와중에 이솔데의 고백은 아이작을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감시받는 게 즐거운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감시하고 싶다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꺼지라고 하겠습니까?”
아이작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심하고 싶다면 의심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이솔데 씨가 왜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는 것이죠. 암만 제가 이솔데 씨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비밀스럽게 감시하면 될 일 아닙니까?”
“첫 번째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성배기사를 속이는 것이 꺼려진다고 해두죠.”
“두 번째는?”
“명성 높은 성배기사를 속이고 바로 곁에서 관찰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죠. 제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은 이미 아이작 경도 압니다. 어떻게 감시 목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들킬 바에 처음부터 털어놓고 가겠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작 입장에서는 이렇게 대놓고 나오는 것이 더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이 속내를 숨기고 감시하면 모르는 척 속여넘기면 되는데, 대놓고 감시하겠다며 따라오면 숨길 수 있는 패가 많이 사라지니까.
“제가 머리 위에 후광을 띄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하셨나 봅니다?”
“파수자의 등대 말씀이시지요? 강력한 기적이죠. 하지만 제 상관은 그게 마땅한 증거가 못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전에 그 기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저지른 자가 있었거든요.”
아이작은 내심 뜨끔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단심문관들은 역시 촉이 좋군.’
후안을 비롯한 사제들은 찰떡같이 믿는 것 같았는데, 이단심문관은 내사를 계속해서 이어갈 생각인 듯했다. 천사 퇴치조차도 그들에게는 의심할 이유가 된다니.
빛의 법전 기적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로서도 걸리는 점 중 하나였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성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기적 사용이 미숙하다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기사가 강한 이유는 검술에 곁들여 기적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술만으로 싸운다면 성기사나 보통 기사나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제국 기사단이었던 벡스터는 어지간한 일류 성기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즉, 기적을 쓰지 못한다면 천사를 물리칠 정도의 힘을 설명할 수 없다.
‘뭐…… 이건 어쩔 수 없군.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긴 했지.’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솔데가 감시로 붙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혹시 세 번째도 있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아이작 경을 속이거나 비밀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솔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 경도 그래 주실 수 있겠지요?”
양심의 가책을 이용한 공격이라니.
아이작은 의외의 날카로운 공격에 뜨끔했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기적을 발휘하면 되는 문제일까요?”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가 반색했다.
“쓰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증명하기 위해 경망되게 신의 힘을 끌어다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한 달.”
“예?”
“한 달 동안 저를 지켜보시죠. 그 사이 제가 기적을 쓰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솔데 님이 제게서 이단의 증거를 찾아내시건, 기적의 증명을 발견하시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이솔데 씨에게 좀 낯선 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
영지를 빼앗긴, 아니, 헌납하고 골방에 유폐된 카일에 대한 처분은 아이작에게 맡겨졌다.
채무에 관한 문제는 모두 불만족스럽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선 안에서 해결되었다. 가장 많이 얻은 것은 아이작이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바로 카일 헨드락이었다.
골방 앞에서 아이작과 르하르트는 카일에 대한 처분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카일 헨드락에 관한 처분은 어떻게 됩니까?”
“제국법으로는 어느 정도 처벌 된 셈이긴 합니다만…… .”
아이작의 질문을 받은 르하르트는 고심했다.
카일에 대한 이단 혐의점은 이단심문관이 조사해 본바 희박한 것으로 밝혀졌고, 영주로서의 책임은 영지와 작위를 모두 상실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제국법에서 귀족은 영지를 소유하거나,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수여받은 명예 귀족만으로 한정한다. 작위 역시 영지에 따라붙어 오는 형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카일 헨드락은 이제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르하르트 입장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죽인 원수 같은 놈이지만, 다른 존재도 아니고 천사에게 조종당했다고 하니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묻죠. 죄를 지어 작위와 영지를 박탈당한 귀족은 보통 어떻게 됩니까?”
“처벌을 받았다면 관습적으로 성은 유지하되, 외진 곳에 유폐합니다. 다만 이단이나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공을 세워 작위를 다시 획득할 기회를 주지요.”
아무래도 귀족에 대해서는 관대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심심하면 전쟁과 싸움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나름 영향력과 무력을 가진 귀족은 유사시 끌어다 쓸 수 있는 전력이기 때문이다. 아이작 입장에서도 이사크레아 영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헨드락의 이름이 필요하긴 했다.
‘카일은 쓰레기라지만 그 전대 영주는 나름 명망 높았다고 하니.’
아이작은 원하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카일 헨드락은 이곳, 이사크레아 수도원에 유폐하는 것으로 하죠. 이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죄 사함을 받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카일에게는 제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르하르트 백작님은 영지 행정구조 재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도원 영지라고는 해도 행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요.”
“예.”
르하르트는 일이 끝난 뒤에도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소수의 호위기사들만 대동한 채 남았다. 나머지 병력들은 르하르트 영지로 돌려보내고 파종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리곤 마치 아이작의 충실한 추종자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일을 보조했다.
아이작은 그것을 낯설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겼다. 이미 그의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더 강하게 물들어가고 있군.’
쇠르에서 바르바리들과 헤사벨이 그랬던 것처럼, 르하르트와 그의 기사들은 아이작을 신봉하고 있었다.
아니, 숭배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들에게 어떤 전도나 설득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이작이 하는 말과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이 아이작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작이 교리를 전도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은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직 그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아무리 빛의 법전의 교리인 척 꾸민 것이긴 해도 이단심문관 코앞에서 일을 벌일 배짱은 없었다.
아이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솔데마저도 물들이는 것이었다.
‘그러기엔 좀 더 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지…….’
이솔데가 아무리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 해도 개인적인 호감과 교리의 이질성은 별개의 문제다. 확실하게 물들이려면 그 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만 했다.
아이작은 르하르트가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골방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이번에 아이작이 영지를 차지하는 데 사실상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카일 헨드락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카일은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작은 카일과 마주 앉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카일.”
“어렵지 않았습니다.”
카일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대답했다.
***
헨드락 성채 공성전 당시.
지힐렛이 맡은 임무는 단순하면서도 어려웠다.
성 안에 먼저 잠입하여 동태를 파악하고 내부 구조를 전달할 것.
그리고 카일 헨드락을 발견 시 포획할 것.
아이작이 라엘라를 상대할 때 목격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입막음을 해도 되지만 카일은 살려두는 편이 이로웠다. 다행히 오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일을 비롯한 사용인들을 전부 가둬 두었기 때문에 목격자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지힐렛은 카일을 발견한 뒤 보호를 겸한 구속 조치를 해 두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때문에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카일이 지힐렛을 본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단순히 말해, 백치가 되어 버렸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돌아온 아이작은 난감해했다. 지힐렛이 실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카일의 정신이 나약했을 뿐이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촉수나 하수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신적인 상처를 입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솔직히 아이작은 산 채로 사람을 씹어먹고 정신을 조종하는 천사가 날뛰는 세계인데, 촉수 괴물 정도로 그렇게 정신적 상처를 받을 것까지 있나 싶었다. 이런 과도한 반응에는 약간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이름 없는 혼돈 특유의 권능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카일을 이대로 바보로 둘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영지를 차지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기생충을 심어 그 내부를 차지하게 지시했다.
지힐렛이 카일의 가죽을 입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이단심문관이 그를 심문할 것을 생각하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기생충은 들키기에 작고 미약한 데다, 설령 들키더라도 버림패로 써도 괜찮았다.
다행히 기생충은 들키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기능을 복구시켜, 정상적으로 말도 하고 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게 ‘카일’은 아니었지만.
멍청하게 군 죄의 대가치고는 가혹하긴 했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서 벌을 받았으면 길고 느린 파멸만 남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아이작은 이 땅을 차지할 생각이었으니까.
여튼 카일은 이제 아이작의 충실하고 가치 있는 하인이었다.
‘한동안은 계속 내 신앙을 빨아먹긴 하겠지만, 영지를 비운 사이 다스릴 사람으로선 이보다 나을 수 없겠지…….’
무능하든 어리석든, 어쨌든 간에 영지민들에게 익숙한 지도자는 중요하다. 선대 영주는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영지민들이 동요하지 않게 만들려면 익숙한 얼굴이 필요했다.
아이작은 카일에게 혼돈의 눈을 발동해 보았다.
[카일 헨드락(C)] [직업: 무직] [능력: 혼돈의 손길]등급은 하찮았지만 어차피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파수견이다.
쓸데없이 똘똘할 필요도 없다.
아이작은 이제부터 이 영지를 이름 없는 혼돈의 본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카일.”
“예, 말씀하십시오.”
“너는 이제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집사(執事)가 된다.”
아이작은 과거 이 땅의 영주였던 카일에게 말을 이었다.
“이 영지를 최선을 다해 보존하고 다스리면서, 내 가르침을 퍼뜨린다. 앞으로 이곳을 찾아올 수도사든, 사제든, 성기사에게든, 모두.”
“예. 알겠습니다.”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이 될 것이다. 아직은 아이작의 세력이 미약하니까.
“그건 그렇고, 선대 영주인 리스헨 헨드락에 대해서는 뭔가 기억을 떠올린 게 있나?”
카일로서 능숙하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기생충은 당연히 카일의 기억도 흡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완전하지는 못해서 오래된 기억일수록 전후관계가 중구난방이거나 흐린 편이었다. 카일이 원래부터 멍청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었지만, 아이작은 선대 영주가 숨긴 비밀이 궁금했다.
“너무 오래전 기억은 필요 없어. 광산 폐쇄 이후 기억이면 된다.”
“여전히 완전하지는 못합니다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일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있긴 했습니다.”
“뭐지?”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눈을 이상하게 굴렸다. 눈알이 따로 노는 기괴한 모습에 아이작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눈꺼풀 아래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면서 작은 촉수 하나가 기어 나왔다. 카일의 뇌를 장악한 기생충이었다.
아이작은 그 촉수에 왼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순간, 플래시백 되듯 아이작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겪은 적 없는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고 말았다. 적지 않은 분량의 기억이었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에 불과한, 말 그대로 아이작 스스로가 겪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체험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 아이작은 카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새로 얻은 기억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칼센 밀터? 이놈은 또 여기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