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2)
82화. 탁란 (3)
아이작은 델리아에게도 접근해서 후안 때와 비슷한 논리로 이야기했다.
“후안 주교가 이곳에 사제 3명과 성기사 5명을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슬슬 이사크레아령을 떠날 준비를 하던 델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실제로 기적을 쓸 수 있는 사제들은 그 위상과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중에서도 후안 주교가 보내는 사제라면 정말 제대로 된 기적을 쓸 수 있는 사제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로 했으니 사제나 성기사를 보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보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거의 쇠르 정도 되는 대도시에나 파견할 법한 숫자인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많이? 여기 또 천사가 찾아온답디까?”
“이곳이 수도원 영지임을 확고히 해두고 싶은 것이겠지요.”
델리아는 인상을 팍 쓰고 속으로 후안에 대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빛의 법전에 대한 신앙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게 곧 사제 계급에 대한 경의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델리아에게 후안이 벌이는 짓은 빤해 보였다.
‘성배기사는 곧 숭고한 여정을 떠날 테니 그사이에 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해두겠다? 아이작을 따돌리고? 그 탐욕스러운 노인네가 할만한 짓이군.’
델리아는 상황을 이대로 두고 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작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당장 황제 파벌에 들어올지 어떨지는 몰라도, 나중이라도 황제의 세력에 들어온다면 그에게 영지가 있고 없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이사크레아 경, 혹시 영지에 필요한 게 있소? 신생 영지에는 필요한 것들이 많을 텐데.”
델리아는 물론 신생 영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충분한 융자를 지원해줄 수 있소. 아주 좋은 조건으로.”
황제의 그늘 아래서, 델리아는 많은 부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그냥 돈을 쥐여 줄 생각은 없었다. 돈을 주면 그냥 끝나 버리지만, 빚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걸 명목으로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델리아는 설령 아이작이 돈을 갚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그늘 아래에만 두면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갚지 못하기를 기대했다.
“융자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잘 아는 아이작은 일찌감치 거절했다. 수도원을 재건할 돈 외에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델리아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능숙한 상인처럼 말했다.
“그보다는 이사크레아 령이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당분간 세금을 면제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영지의 힘으로 자생할 수 있습니다.”
제국의 모든 영토는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 세금이라는 것은 세리가 주민들을 통해 거두어 영주에게 넘기면, 영주는 다시 또 자신의 상급자에게로 일정 몫을 떼서 넘기고, 그 상급자도 다시 자신의 상급자에게 넘기는 식이었다. 영지마다 세율도 제멋대로고 규칙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작은 현재 델리아 리옹 후작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은 셈이므로, 세금을 거둘 권한은 델리아에게 있었다. 세금을 면제해 달라는 아이작의 말에 델리아는 한 방 맞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성배기사에게서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말이군.’
아이작이 신선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니다. 세금 내려 달라, 면제해 달라 징징대는 소리는 대영주인 델리아도 자주 듣는 소리였으니까. 다만 그 발언을 한 장본인이 소영주나 상인이 아니라 성배기사였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었다.
보통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빛의 법전 교단은 황실 못지않은 부를 누리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들어가는 필수적인 지출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교단이 원하는 것은 보통 돈 그 자체지, 낼 일도 없는 세금에는 관심이 없었다.
델리아는 아이작이 세금 운운하는 것에서 그가 이미 준비된 영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사크레아령은 입지가 애매하니 일반적인 세율 규정을 적용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세금을 완전히 면해주는 것은 불가능하오. 이건 제국 신민의 의무니까.”
“수도원 영지인데도 그렇습니까?”
“통치 주체가 수도원일 뿐, 엄연히 황제 폐하의 대리인인 내게서 받은 영지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광물세와 교역세라도 당분간 면제해주십시오. 이것들은 이사크레아 령의 주 수입원이니 이것만 면제해주셔도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델리아는 다시 한번 아이작이 준비된 통치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이작에게 사제와 성기사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양보해 주긴 해야 했다. 하지만 세금을 아예 면제해 버리면 이 땅이 교단 영토임을 명시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의 주 수입원은 탄광업이니, 그에 대한 광물세와 교역세만 면제해 주면 이 땅이 제국의 소유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아이작은 자연스럽게 델리아에게 명분을 챙겨 주면서 자기 몫의 실리도 찾아간 셈이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소. 어디 보자, 향후 3년간 관련 세금을 면제해주는 걸로 하겠소. 나머지 조건은 추후 조정하는 것으로 합시다.”
어차피 2년 뒤에 여명군이 결성된다. 그때면 종교적 광기가 기승을 부릴 테니 아이작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거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내 서기를 보내 내용을 문서로 정리하도록 하겠소.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지.”
양쪽이 모두 만족스러운 거래를 하고, 델리아는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델리아는 말 고삐를 쥐고 출발하려던 중, 문득 아이작에게 물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19살입니다.”
아이작은 일부러 나이를 높여서 말했다.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허, 보기보다 나이가 많군. 혹시 만나는 사람 있소?”
아이작은 델리아의 말에 잠시 얼어붙었다. 그의 표정에 델리아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엉뚱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군. 경이 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애인 삼을 생각은 없소. 나이 먹고 주책 부릴 필요 있겠소? 하지만 내 딸들은 그대 얼굴을 보면 좋아라 할 것 같군.”
그녀는 찡긋 눈인사를 하면서 말을 출발시켰다.
“나중에 중앙으로 한번 오시오! 날 닮아 귀여운 딸들이 혼기가 꽉 찬 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뒤따르는 기사들 속에서도 덩치가 밀리지 않는 델리아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할 뿐이었다.
***
‘좋아. 생각 이상으로 순조롭게 허락받았다.’
아이작이 델리아에게서 광물세와 교역세를 면제받은 것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함도 있지만, 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이작은 탄광을 재개발하면서 타천사의 일부를 빼돌려 팔 생각이었다. 타천사 조각이라면 기적의 힘을 담는 귀한 장비를 만들 수 있으니 눈 뒤집혀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영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세금 장부는 그런 면에서 추측하고 들여다보기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FBI가 마약 조직을 수사할 때 괜히 세금 장부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지…….’
아직 이 세계에 그 정도의 수사 테크닉은 없을 것 같지만, 영지 밖으로 나가는 물건의 유동량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상하게 여길 여지는 충분했다.
이걸로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에 베일을 두를 기초적인 준비를 마쳤다.
그다음 할 일은 쇠르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는 거죠?”
이단심문관, 이솔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저를 감시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여기 남아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야지, 편지 심부름이나 할 이유가 있나요?”
아이작은 씩 웃으며 두 통의 편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먼저 설명하자면, 이 편지는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황금우상 상단이 비록 빛의 법전에 우호적이고 충실한 기부자이기는 하지만, 다른 신앙의 숭배자들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죠. 그런 자들에게 제가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이나 상대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신경 쓰이네요.”
이솔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이작에게 이단 혐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체류하는 것이므로, 그가 이교와 접촉한다면 확인하는 게 옳았다. 아이작은 두 번째 편지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건 쇠르에서 만난 망나니, 자클렛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바르바리 깡패집단 우두머리에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예?”
“……지금은 갱생해서 바른 생활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녀가 배교자였던 바르바리 출신에, 지금도 다른 바르바리들을 이끄는 집단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한테 편지를 보내는 거죠. 신경 쓰이지 않나요?”
“크윽…… 신경 쓰여요.”
“자, 그러면 제 옆에서 별 볼 일 없는 행정업무나 하는 걸 지켜보겠습니까, 아니면 의심스러운 성기사의 의심스러운 행보를 감시하고 확인하겠습니까?”
아이작의 논리가 완벽했기 때문에, 이솔데는 고분고분 편지 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야 당장 검열하더라도 결국 쇠르에 가서 상대들을 확인하고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솔데는 떠나기 전 아이작에게 물었다.
“편지를 제가 읽어봐도 되나요?”
“이단심문관이 편지를 검열하겠다는데 빛의 법전의 하인인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다만 예의를 아신다면, 편지를 받는 당사자의 허락을 받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읽어도 상관없지만, 수치스러운 행동임을 알라는 말로 선택권을 맡겼다.
이솔데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평범한 수사 과정이라면 허락 따위는 받지 않고 그냥 훔쳐서 읽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아이작이 숨기거나 빼돌린 게 아니라, 이솔데에게 직접 맡긴 것이다.
이 점이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만날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에게 묻지요. 하지만 거절해도 읽어볼 겁니다.”
이솔데의 말에도 아이작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솔데가 가는 길에 편지를 뜯어봐도 상관없었다. 내용을 들키면 위험한 편지라면 애초에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빨리 갔다 오겠지. 일주일 정도 걸리려나?’
아이작은 쇠르에서 이사크레아 영지까지 오기까지 열흘 가까이 걸렸다. 여러 명이 움직이기도 했고, 도중에 트롤 습격 같은 방해도 받았다. 하지만 이솔데는 단신이고 서두를 이유도 있으니,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들켜도 상관없는 내용이라면, 괜히 지힐렛이나 헤사벨을 시켜서 의심받는 것보다 그냥 맘 놓고 검열할 수 있게 던져 주는 편이 나았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으니 그사이에 일이 터지겠지?’
이솔데를 보낸 마지막 이유.
아이작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 본인은 그녀의 눈을 피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지만, 기다리는 누군가는 그렇지 못할 확률이 컸다. 분명 이단심문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릴 것이다.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어떻게 굴릴지 고민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
밤.
한 사내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의 흔적을 보고 흠칫했지만, 잔해를 넘어 동굴로 향했다.
동굴은 그대로 폐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는 빛의 법전 사제들이 봉인한 타천사 앞에 섰다.
하지만 수많은 봉인구와 금줄이 쳐진 모습에 사내는 한탄하듯 신음을 흘렸다. 벽 속에 박제된 타천사의 모습은, 마치 금줄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줄에 접근해 보려 해도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흠칫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중앙 귀족들 무리에 끼어서 온 사람 중 이교도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때 동굴 어둠 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화들짝 놀라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엉성하게 잡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허겁지겁 검을 줍는 사내의 머리 위로 비웃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이단 베어베크라고 했나? 북부 상단 상인이라던.”
회색 머리카락에 수염을 가진 사내, 에이단 베어베크는 초조한 눈빛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델리아와 후안이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그대로 마을에 체류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후안이 남기고 간 사제와 성기사들, 이솔데, 에이단이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교단과 황제의 권력 다툼보다 돈, 아니 영지를 받아 내야 한다고 가장 목소리 높이던 남자였다.
그러나 상인이라기엔 학자 같은 분위기가 풍겼으며,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학식과 깊이가 느껴졌었다. 몇몇 날카로운 발언들을 남겨 아이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여긴 왜 온 거지? 빌려준 돈을 다 받지 못해서 타천사라도 떼어 가기로 한 건가?”
아이작은 그의 목적을 짐짓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에이단은 그 미끼를 덥썩 물었다.
“……타천사 조각이라면 손해를 충분히 메울 수 있으니까…….”
“아니지, 아니야.”
아이작은 바로 부정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미소가 하얗게 두드러졌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에이단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이작이 꺼낸 것은 리스헨 헨드락이 만들고 칼센 밀터가 검토했던 바로 그 하얀 석판이었다.
“네가 찾고 있는 게 혹시 이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