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2)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는 표면적으로 메이저한 플레이어 교단을 ‘아홉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고, 작중 NPC들도 아홉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고대의 야만이 물러나고,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된 이래, 세상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규율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덟 신앙이다.
왜냐면 아홉 번째 신앙이었던 무언가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신도들을 전부 죽여 버리는 역병을 퍼뜨리고는 스스로 자멸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름 없는 혼돈, 내 몸에 기생해 있는 그것 말이지…….’
전 세계인의 1/3이 죽은 이 끔찍한 역병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번졌고, 그 토양에서 아홉 신앙 가운데 가장 어린 신앙인 불사 교단이 태어났다.
그렇게 이름 없는 혼돈은 오직 지성 없는 괴물만이 섬기는 몬스터 신앙이 되었다.
칼센은 아마도 그 이름뿐인 아홉 번째 신앙을 자신이 차지하려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이 되는 데 실패했고, 13차 여명군의 계기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아이작은 불현듯 다시 ‘고대신 경험치설’을 떠올렸다.
‘어라? 혹시 고대신을 떠먹여 주려던 게…… 칼센인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칼센은 이미 배교한 상황이지만 단독으로 돌아다니면 헤사벨이나 아이작이 그런 것처럼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일일이 감지하기 어렵다. 고대신을 적극적으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 칼센의 협력자인 붉은 성배와 불사 교단이니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이러면 내가 칼센의 행보를 따라가고 있는 셈인데?’
아이작은 당혹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칼센도 혹시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았던 것일까?
하지만 게임의 내용을 떠올려 봐도 칼센은 촉수를 쓰거나 혼돈의 힘을 다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사 교단의 최종 보스가 된 칼센은 데스나이트에 가까웠다.
물론 신으로 승천하는 데 실패한 뒤 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칼센이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이작이 이 몸에 빙의했을 때 촉수가 칼센을 집어삼키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칼센이 이 영지에서 새로운 신앙을 탄생시키려고 했다면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 다른 신앙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있을 테고. 화로 장인을 만나면 물어볼 게 더 생겼군.’
아이작은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큰 판을 벌여 보기로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미 그는 다른 신앙들을 이 판에 끼워 넣고 있었다.
판이 복잡하고 커질수록 조커의 힘은 강해진다.
아직 누구도 이름 없는 혼돈의 개입을 모르는 상황이니, 아이작은 조커 패가 되어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은 편지를 받아 들고 당황했다.
편지 배달인이 다름 아닌 이솔데였기 때문이었다.
이단심문관이 자신에게 전해 줄 편지가 있다고 했을 때에는 바싹 긴장해 얼어붙었다.
아무리 중립 신앙이라 해도 이교도인 그녀에게 이단심문관은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단심문관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난 이솔데는 산뜻하고 발랄한 스무 살 미녀였다.
하지만 안심하던 것도 잠시, 편지를 본 그녀는 다시 얼어붙었다.
“아이작 성배기사님이 편지를요?”
“이제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이 되셨습니다. 헨드락 영지를 승계하셨거든요.”
“허, 그새 그렇게까지…….”
캐틀린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그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린 성배기사가 갑자기 영주가 되었다는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음? 아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하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 헨드락 영지를 새로 승계받은 사람은 멍청이로 이미 소문났는데, 실례. 혹시 귀족 모욕이 기분 나쁘셨다면…….”
“저는 이단심문관입니다. 귀족 모독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어쨌든 듣기로는 그 귀족 나으리 덕분에 영지 경영상태가 오락가락한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천사 퇴치라는 사건과 제가 아는 성배기사님의 수완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군요.”
캐틀린은 천사 퇴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그에 대해선 이미 쇠르의 온 도시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의 도시에서 준엄한 꾸짖음으로 타락을 징벌하고 상인들을 구제한 바로 그 성배기사가 이젠 천사까지 물리치다니.
아이작의 명성은 이제 성인에 버금갈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교단에서 괜히 성인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캐틀린은 이미 거기서 놀랄 만큼 놀랐기 때문에 아이작이 영주가 되었다는 것 정도로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이 세운 업적에 비하면 귀족이 되는 것 정도는 소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가지고도 귀족이 된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아이작은 오직 아이작만이 할 수 있는 업적을 세웠으니까.
‘다만 이렇게 빠른 성공이라면…… 순수한 신앙심과 운만으로는 이룬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로어커스 사태 당시 그녀가 볼 뻔했던 끔찍한 손해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 아이작이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황금우상 상단 쇠르 지부의 기둥뿌리가 뽑힐 뻔했다.
‘역시 그때 일은 우연이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이제 와서 억울하다거나 손해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작에게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아이작은 크게 될 사람이었다.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야망과 운, 교활함까지 갖추고 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어떤 위치까지 올라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으로서, 채무관계로라도 인연을 터놓는 것이 좋았다.
돈으로 묶인 이상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편지는 안 읽어보십니까?”
“응? 아아, 예. 읽어봐야지요.”
캐틀린의 생각이 길어지자 이솔데가 채근했다. 캐틀린은 편지를 읽기 전에 이솔데를 배웅하려다가 여전히 앉아 있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캐틀린은 뒤늦게서야 이솔데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 제가 편지 읽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그보다는 편지 내용이 궁금하군요.”
이솔데는 당당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편지 내용을 알려 달라고 하는 말에 캐틀린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솔데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애당초 이단심문관은 개인의 사생활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허락을 구할 게 아니라 진작에 뜯어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틀린은 그런 이솔데의 모습이 제법 신선하게 느껴졌다.
‘요즘 젊은 애들은 옛날처럼 음험하지 않은 모양이군.’
“음…… 그럼 제가 읽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읽으신 뒤 원문도 보고 싶군요.”
캐틀린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작도 이단심문관을 편지 배달부로 부려 먹은 시점에서 그 정도는 예상했겠지 싶었다.
캐틀린은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편지 내용은 별 수사 없이 담백했고 명료했기 때문에 읽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소 사무적이고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지만, 캐틀린에게는 그런 숫자들이 더 익숙했다. 성배기사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건조한 내용이었다.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음. 별 내용 없습니다. 저희 상단에 아이작 님의 계좌가 트여 있는데, 몇몇 물건을 구입해 보낼 것. 또 금화를 조금 인출해서 보내야 하고, 그 외는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하시는 내용이군요.”
“사업이요?”
“예. 전임자와는 다르게 제대로 영주 노릇을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캐틀린은 이솔데에게 편지를 넘겨주면서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이솔데는 설명을 듣고 편지도 봤지만 정말 말 그대로 건조한 사업 제안뿐이었다.
비밀을 숨기거나 의미심장한 암시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캐틀린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서둘러 일어났다. 이솔데는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약속이 있으십니까?”
“아뇨.”
캐틀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상인에게는 약속보다 사업이 더 중요하지요. 역대급 제안을 받았으니 좀 서두르고 싶군요.”
***
이솔데가 다음 만난 사람은 자클렛이었다.
하지만 근방 바르바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자클렛은 이단심문관이 찾는다는 것을 알자마자 기겁해서 달아나 버렸다. 잡으러 온 게 아니라고 전해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빛의 법전의 교리를 위협하는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단심문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바르바리들은 어차피 구심점도 없고, 기적도 쓰고 천사를 부리는 신앙끼리의 대립이 훨씬 더 위협적이니까.
결국 이솔데는 점잖은 자리에서 만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 은신처에 숨어 쪽잠을 자던 자클렛은 깼을 때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이솔데를 발견했다. 애당초 일개 갱단 두목에 불과한 자클렛이 진심을 다하는 이단심문관을 따돌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편지 내용을 전달했지만, 자클렛이 받은 내용은 캐틀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비대원으로 고용하고 싶다고?”
“예. 재주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용도 책임지겠다고 하시는군요.”
자클렛은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무릎 꿇으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편지 내용을 낱낱이 설명했다. 너무 자세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딱히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데.’
캐틀린은 황금우상 신앙을 믿고 있지만,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에서 금과 물류로 도움을 준다. 하지만 바르바리는? 신앙인인 이솔데 눈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도의적인 입장에서 사람 취급은 해주지만, 솔직한 말로는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진 않은 사람들이었다.
신분이 천해서라거나 위험해서라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앙이 없는 자들은,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이라고 믿는 미치광이, 오래전에 몰락한 고대신을 포기 못 한 야만인, 듣도 보도 못한 잡신을 섬기는 사교도, 혹은 어느 신앙에서도 안 받아줄 대죄를 저지르고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평생 사후세계를 포기한 범죄자…….
바르바리 태반이 이런 사람들이니 신앙인들이 바르바리를 멀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아이작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바르바리들은 더 그런 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겠지만, 이솔데의 생각이 이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굳이 바르바리들을 끌어들인다는 건 무슨 의미지?’
아이작이 정말로 건전하고 숭고한 성배기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버림받고 방치된 바르바리들을 모아 참된 가르침을 주고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부족한 영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솔데는 자신조차도 그 가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이작은 그렇게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이 아니다.
정말 전도가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수가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솔데는 자클렛에게 물었다.
“그러면 갈 건가?”
“예? 어, 음. 당연하죠. 바르바리들이야 용병 아니면 강도질로 떠도는 게 일상인데 어디 한군데 눌러앉아 먹고 살 방법만 마련해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요.”
이솔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아이작이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누가 보채지 않아도 아이작은 그 해답을 보이겠지.
이솔데는 아이작이 어떤 기적을 보여 주려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이솔데에게 어떤 식으로 약을 팔아야 하려나…….’
솔직히 이솔데에게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한 것은 시간 벌기였다.
어떻게 약을 팔지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촉수를 보여 줄 수는 없다. 촉수에 후광을 두르고 리본을 감아 주고 예쁜 곰인형을 안겨 줘도, 촉수는…… 촉수다.
촉수를 본 이솔데가 어떤 표정을 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솔데가 거슬리니까 죽여 버리자! 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이건 넘어야 할 관문이다. 교단 안에서 갑자기 부각되는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이단심문관이 내사에 들어간다. 더군다나 그게 성자 후보라면.
이 관문을 넘어서더라도 의심의 눈이 떨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 될 것이다.
‘다행히 이솔데는 좋은 사람이라는 거지.’
물론 지금의 이단심문관들은 광신도라기보다 냉철한 수사조직에 가깝지만, 교조적인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정의를 믿어야 이단심문관이라는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솔데는 브란트 공작가라는 배경 덕분인지 광신적인 분위기에 물들지 않았다. 교단도 쉽게 압박하긴 힘든 듯했고, 아직도 순진한 걸 보아하니 정신적으로 힘든 수사는 맡기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그 점이 아이작이 공략할 포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