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5)
85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3)
이솔데도 이솔데지만, 소금 의회가 다시 접근하기 전까지 아이작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솔데, 소금 의회, 영지 경영. 어느 것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복잡한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 하나로 묶여 있었다.
가장 많이 드러난 문제이자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영지가 황폐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황폐라 함은, 굉장히 다각적으로 발생해 있었다.
카일 헨드락은 그동안 로어커스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영지를 경영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로어커스 거래 수익이 훨씬 더 크니 영지 경영에 관심이 있었을 리가 없다. 알아보니 적당히 돈을 더 크게 벌면 아예 영지를 비워 두고 수도로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영지는 황폐해지고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 일어난 일들로 분위기가 뒤숭숭해 얼마 안 되는 밭뙈기도 파종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식량이 곧 바닥난다고?”
“예, 예에…… 영주님.”
마을 촌장인 촌로는 아이작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작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지만, 계급으로든 신앙 때문이든 그는 감히 아이작과 눈을 맞출 수 없었다.
특히나 그는 아이작이 성벽 위에서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는 것을 보기까지 했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아이작을 신의 화신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굶주림은 일개 촌부가 감히 신의 화신에게 말을 걸게 만들었다.
“봄철이 주릴 시기이기는 하지.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나?”
“원래 이 영지는 먹을 것이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하거나 가공품을 영주성에 납품하고, 대신 전 영주께서 식량을 풀어 주셨는데 이제 사냥도 잘되지 않아서…….”
아이작은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 이 영지가 식량을 수급할 방법은 외부에서 사들이는 것뿐이다. 작은 농지와 산에서 나는 작물과 동물이 있긴 했지만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로어커스 사태, 카일의 방만한 경영, 전쟁, 심지어 천사의 등장까지 합쳐져 상인들이 기피하는 곳이 된 것이다.
황금우상 상단의 캐틀린이 오면 해결될 문제지만 당장 주민들의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앞으로 늘어날 인구까지 고려하면 심각한 문제였다.
‘어떤 형태로든 윗대가리들끼리 난리가 나면 제일 먼저 죽어 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지.’
아이작은 일단 영주성에 남아 있는 식량을 풀어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식솔이 대폭 줄었기 때문에 식량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 해를 버티기에는 부족했다.
다행히 이웃에 아이작의 충실한 신도가 되어 버린, 비옥한 영지를 가진 르하르트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기꺼이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르하르트의 신뢰는 아이작이 빛의 법전 성기사라고 믿는 데에서 나왔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의 숭배는 아이작 개인을 향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이작은 현재 이름 없는 혼돈 그 자체나 다름없으므로 서서히 르하르트의 신앙도 이름 없는 혼돈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급한 불은 르하르트의 도움으로 끌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영지에서 생길 잡스러운 일들은 두고두고 아이작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가 식량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입에 넣을 것을 구하고 나니, 행정과 사법의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의 행정, 사법 체계는 아이작의 상식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가끔 보이는 오버테크놀러지 수준의 기술이야 신에 의한 기적이라고 친다면, 이 세계의 기술 수준은 중세와 비슷하다.
하지만 행정은 그 이하였다.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건가 싶은 수준에 의문을 품을 때면, 당연하다는 듯 ‘그 말’이 등장한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기도하라.’
모든 빈틈을 메꿔 주는 만능의 언어였다.
결국 문제가 생겨도 사제들이 파견되어 기적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니 더 발달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헨드락 영지도 관료들의 임기응변과 땜빵식 대처로 얼레벌레 굴러가고 있었다.
중세 영지에 다짜고짜 21세기식 행정을 쑤셔 넣지 않을 정도로는 상식인인 아이작은 일단 이 세상에 매뉴얼이라는 게 있는지부터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매뉴얼은 존재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영주의 목표는 농지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고, 외적을 방어하며, 법을 공평하게 이행하고, 빛의 법전 이름 아래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니라.’
원론적인 이야기뿐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일단 아이작은 지도부터 펼쳤다. 영지에 사는 주민들은 산에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야 고작 500여 명 정도로 영지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카일이 돈놀이에 집중하느라 주민 관리에 무관심했던 탓이다.
한 사람의 노동력도 귀중한 시기였다. 아이작은 먼저 호구 조사를 지시하고 지도를 새롭게 고쳤다. 성역의 효과 덕분에 지도의 어디가 맞고 틀린 지는 성안에서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영지 남동쪽에 커다란 수원지가 있는데, 거기서 내려온 물이 계곡을 만들고, 영지를 지나 북쪽 바다까지 흘러갔다. 북쪽에는 타천사가 매장된 폐광이 있었고, 서쪽에는 중앙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산사태로 붕괴한 이후 방치되고 있었다.
영지 자체는 풍경이 아름답지만 최근의 사태들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황폐해진 농지들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지금은 부양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들일 예정이었다.
적어도 자급자족할 수준까지 만들지 않으면 곤란했다.
다만 영지 자체가 수량은 풍부하지만 평지가 많지 않아 작물을 키우기에는 불리했다.
아이작은 이런 지형에서 키우기 적당한 작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쪽 지방에서는 감자를 아직 안 먹던가.’
아이작이 수도원에서 지내던 당시 감자는 끼니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었다. 그런데 정작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감자는 식용으로 잘 쓰이지 않는 편이었다. 어두운 땅 밑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인 감자가 빛의 법전이 보기에는 불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작 아이작이 지내던 수도원에선 잘만 먹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괴한 논리였다. 하지만 변방의 수도원은 너무 궁핍하다. 그거라도 먹지 않았으면 수도사 절반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지내는 사제 놈들은 끼니때마다 식탁에 꼬박꼬박 흰 빵과 치즈, 고기가 올라오니 굳이 감자를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겠지…….’
하지만 척박한 산간지방에서 감자만큼 키우기 좋은 작물은 없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감자가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산 너머 밀렵꾼과 화전민들이 감자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보내 감자를 사 오고, 화전민들을 꼬드겨 영지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감자를 낯설어하는 주민들도 성배기사가 직접 키우고 먹는 것을 보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다.
‘클리셰긴 하지만, 있는데 안 써먹을 이유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지 안에는 주민들이 떠난 덕분에 빈 땅이 많았다.
아이작은 그 빈 땅에 모조리 감자를 심을 수 있었다.
***
그다음은 파손된 성과 성벽을 보수하고 망가진 길들을 고치는 작업이었다.
산사태로 완전히 막힌 서쪽 길은 하루 이틀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포기했지만, 성만큼은 고쳐야 했다. 당장 먹고살 일이 급한 와중에, 그것도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영주성을 고쳐야 한다는 말에 주민들 사이에 두려움과 분노가 번졌다.
아이작이 저주를 퇴치했다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물론 감히 천사도 때려잡은 성배기사에게 대드는 주민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농사일만큼이나 성벽 보수도 중요하게 여겼다. 붉은 성배든, 불사 교단이든, 혹시 모르지만 빛의 법전이든, 여기서 음모에 개입했다면 언제고 다시 관여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 아이작은 아슬아슬한 성벽 위에서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카일 헨드락이었다.
“저주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성을 보수해야 합니다. 만약 저주에 이끌린 몬스터가 쳐들어온다면 여러분들은 그 알량한 집 담벼락 뒤에 숨어 있을 겁니까? 성배기사님께서 다 무너져 가는 성안에서 지내도록 내버려 두다가 여러분이 필요할 때만 도와달라고 부를 겁니까?”
바로 그 무너져 가는 성을 만든 원인이 네 놈 아니냐고 카일에게 따지면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카일은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뇌를 세척당한 카일은 이후로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포대자루 같은 옷만 입고, 아이작이 배포하기 시작한 ‘감자’만을 먹으며, 성안의 기도실에서만 잠을 청했다. 오만방자하고 멍청하다고 소문났던 ‘영주님’이 그렇게 돌변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그가 정말 정신을 차렸다고, 성배기사님의 인도를 받아 성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길 정도였다.
“당장 먹고살 것은 성배기사님이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어려운 시기지만 사악한 이단의 신들이 우리의 삶을 계속 뒤흔들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성배기사님의 뜻을 따라 모두 이단 신앙에 맞섭시다!”
카일은 뻔뻔하게 그들을 선동하며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카일이 이런 처지가 된 것도, 영지가 피폐해진 것도 모두 ‘이단의 신’ 때문이다.
책임은 붉은 성배에게 모두 돌리면서 ‘우리’라는 결속력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아이작’이라는 거인의 그늘 아래 의지하도록 만드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영주였던 카일이 손수 돌을 나르며 복구 작업에 나서자, 사람들도 그의 말이 틀린 데가 없다고 여겨 작업에 동참했다. 영지 곳곳에 망가지고 방치됐던 임도(林道)들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카일이 기도를 올리는 대상은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인 아이작을 향한 것이며, 뇌 안에 거대한 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아이작은 순조롭게 공사와 농지 개척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법이군.’
당연히 카일의 행동은 아이작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까지는 일일이 지시할 수가 없었는데, 카일은 놀라울 정도로 잘 해냈다. 벌레의 지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원래 카일의 재능이 빛을 발할 기회가 없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크레아 영지는 빠르게 황폐한 누더기를 벗고 있었다. 하지만 복구라 부르기에는 아직 한참 먼 상태였다. 문제는 계속 터질 테고 결국 세부 지침에 아이작이 손대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하나 신경 쓸 수는 없어.’
아이작은 이 영지를 먹기로 했을 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중요한 사건의 시발점이 될 이 땅을 무방비하게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칼센을 자신이 흡수한 시점에서 아이작이 아는 미래는 빗나가고 있었다.
‘결국 여명군의 흐름 자체가 다르게 진행되겠지…… 그때까지 힘을 키워야 하는데 영지에 계속 발목을 잡힐 수는 없지.’
다행히 대략적인 구도는 잡아 둔 상태였다. 카일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캐틀린의 황금우상 상단이 보급을, 자클렛의 바르바리 용병들이 치안을 담당하면 어느 정도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사 교단은 반드시 뭔가 일을 저지를 테고, 빛의 법전은 계속 경계해야 하는 데다, 붉은 성배 또한 충분히 믿을 만한지 알 수 없으니까.
‘뒷배가 필요해.’
오직 아이작만을 위한 뒷배.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수도원 깊은 지하실.
거대한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에서 아이작은 무명 석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칼센 밀터가 신이 되기 위한 방아쇠로 삼았으며, 대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제작에 개입했을지 모를 물건.
하지만 그것은 이제 주인과 방향성을 잃은 채 아이작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무명 석판을 만지작거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고만 있었다.
‘함부로 쓰기에는…… 너무 위험해.’
칼센 밀터가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무명 성서를 사용해 자신이 신의 반열에 오른다거나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주 티끌만큼.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져서 떠오르자마자 기각한 아이디어였다.
칼센 밀터가 실패한 길을 자신이 굳이 갈 필요는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건 둘째 문제였다.
아이작은 위협받지 않으면서 평안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신이 되어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든가 복수를 꿈꾼다든가 하는 생각을 했다면 애초에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목표는 아이작의 꿈과 거리가 멀다.
크고 위대한 존재일수록 책임질 것도 많아진다는 꺼림칙함도 있었다.
‘다만…….’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더듬으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