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이름 없는 벌레의 책 (4)
이미 아이작은 촉수만 쳐도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아이작은 촉수로 고대신을 먹어 치우고 천사를 물리치고 성기사들과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렸다. 아이작이 스스로 단련한 것도 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을 통해 얻은 밑바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더 강하게 끌어낼 수 있다면?
다른 교단처럼 의식을 치르고, 신도들을 모아 성가를 합창하고, 성물로 무장한 군대를 꾸리기 시작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지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도.
‘그래.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이작은 순간 ‘우리’라는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라니?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만한 사람이 있던가?
헤사벨이나 자클렛 같은 자들을 신도로 들이긴 했지만, 고용인과 피고용인에 가깝지 ‘우리’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니다.
아이작은 섬찟한 기분에 무명 석판에서 손을 뗐다. 순간 머리가 개이듯 석판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뭐야, 제기랄.”
아이작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 냈다.
무명 석판은 사용하기 전까지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명 석판은 ‘사용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석판이라는 아주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밖으로 뛰쳐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건가? 아니야. 그건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니었어.’
무명 성서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누군가 저 너머에서 아이작이 꺼내 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작적으로 촉수를 꺼내 내리꽂았다.
같은 두께의 철판도 관통할 만한 일격이었지만 무명 성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패로 써도 될 정도의 강도였다.
그리고 촉수와 접촉한 순간 일련의 속삭임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발 다시…….’
순간 아이작의 눈에 이상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벌거벗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무리들, 아기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그 상처에서 촉수 괴물을 탄생시키는 남자…… 섬뜩하고 구역질 나는 장면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뭐?’
아이작은 맥락을 알 수 없는 경고에 의아해하는 사이, 섬뜩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하고 역한 냄새가 성역 안을 메웠다. 생전 맡아 본 적 없는 기이한 냄새였다. 아이작은 냄새가 무명 성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무명 성서에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회색 구더기였다.
구더기는 무명 성서를 갉아먹은 것처럼 파고 나와 촉수 위로 올라탔다. 이내 무명 성서 위로 무수한 구더기 떼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더기는 순식간에 고치를 틀고, 변태하고, 우화했다.
“이게 무슨…….”
그와 동시에, 성역의 모퉁이 자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지면서 부풀기 시작했다.
‘환각? 아니야. 진짜 공간이 일그러지는 건가?’
그 울렁거리는 공간 속에 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벌레가 지구는 물론 세상 어디서도 존재한 적 없는 기이한 형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이작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 속에서.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는 괴물들 중에서 나이트 스토커라고 불리는 괴물이었다.
성역의 크기는 불과 20평방미터 남짓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듯 놈들의 모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회수해서 놈들과 맞서려 했다.
쩌어억.
하지만 촉수는 회수되는 대신 날카로운 이빨과 가시를 드러내어 단숨에 무명 성서에 박아넣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촉수를 보면서 당황했지만 곧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명 성서는 들썩이면서 마치 종이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촉수는 무명 성서가 ‘펼쳐지지 않도록’ 봉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석판이나 다름없던 성서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런 사실에 놀랄 틈 따위는 없었다. 아이작은 한 손이 봉인된 상태로 검을 뽑아 들었다.
부우우우웅!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면서 나이트 스토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m에 이르는 나이트 스토커가 셋이나 나타나자 숲에 둘러싸인 기분마저 들었다.
바아아아아! 네 장의 벌레 날개 아래로 말미잘 같은 몸뚱이가 돋아나 있었다. 그 아래로는 아이작의 촉수와 같은 이빨과 눈알이 돋은 촉수들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촉수들은 아이작의 촉수와 정확히 같은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개…….”
휘리리릭! 촉수 수십 가닥이 아이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적의를 가진 그 움직임에 아이작은 급히 검을 휘둘렀다. 루앗딘 열쇠가 적의에 반응하듯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불타는 검이 촉수 몇 가닥을 손쉽게 베었다. 다행히 나이트 스토커의 촉수는 아이작의 촉수만큼 질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트 스토커들은 흘러나온 보랏빛 선혈에 분노하듯 더 거칠게 날갯짓했다.
비좁았던 성역은 어느새 광활한 황무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일종의 주술적 공간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나이트 스토커들은 원래 한밤중에 지나가는 먹잇감을 낚아채 허공에서 자기 뱃속으로 구겨 넣는 식으로 사냥한다. 이렇게 탁 트인 광활한 공간은 나이트 스토커에게 유리한 사냥터였다.
대신 아이작은 이 괴물들을 상대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즉시 그의 손에서 저 너머의 색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먹물 같은, 어딘가는 악몽 같은 어둠이 번져갔지만, 그 어둠이 허공을 채울 때까지 기다릴 시간 따윈 없었다. 아이작은 제 팔을 감쌀 만큼의 색채가 번져 나가기 무섭게, 심연의 손아귀를 발동시켰다.
콰두두두두!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튀어나온 몸통만 한 굵기의 촉수가 즉시 나이트 스토커 하나를 짓이겨 박살 냈다. 급히 불러낸 것이라 더 큰 것을 부를 수는 없었다.
놈들은 입인지 배인지 모를 부위로 뭐라고 소리쳤다.
“■■■ ■!”
난생 처음 듣는 기이한 언어였지만, 아이작은 이상하게도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배신자라고? 무슨 소리야?’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은 사실상의 대리인이었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는 이 괴물들이 반역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별로 부하로 들이고 싶은 외형은 아니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이 이 벌레들을 즉시 없애길 원합니다.]이름 없는 혼돈 역시 동조하듯 같은 의지를 표명했다.
아이작은 어딘가 복잡한 사정에 얽힌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백여 가닥 가까운 촉수들이 자신의 살점을 노리고 날아드는 상황에선 복잡한 고민을 하기 힘들었다. 나이트 스토커들은 아이작을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거대한 심연의 손아귀 아래 붙잡힌 놈들은 순식간에 짓이겨지고 뭉개졌다.
바아아아아!
나이트 스토커가 기묘한 날갯짓 소리를 냈다. 아이작은 그 날갯짓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주변에 내는 경고음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들은 정찰병에 불과했다.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지평선 너머에서, 하늘에서, 공간의 틈바귀에서, 모서리에서 섬뜩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바다가 넘치는 듯한 기세로 무언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저 황무지에 불과했던 공간 속에서 자갈이, 마른 풀잎이, 흘러가는 구름조차 기괴하게 비틀리고 있었다.
아이작의 눈이 무명 성서로 향했다.
‘어쩔 수 없군.’
아이작은 무명 성서를 움켜쥐고 있는 촉수를 향해 강한 의지를 보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이름 없는 혼돈이 마치 동의를 구하듯 아이작에게 알림을 한번 보내고는, 촉수 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이때까지 주섬주섬 끌어모았던 막대한 신성력이 촉수 끝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무명 성서에 아이작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무명 성서를 사용하긴 했지만 아이작은 칼센 밀터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신이 된다거나 실패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신에게는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신이 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빛의 법전에게서 여명 석판을 받아온 등대지기 루앗딘과 같은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 대리인이나 다름없으니…… 사실상 나는 혼돈 촉수 버전 루앗딘이지.’
콰드드득, 콰드득.
촉수가 거칠게 상흔을 남길 때마다 무명 성서가 거칠게 요동치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작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대해졌던 공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명 성서는 이미 어떤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게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과 접촉한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신이 되는 것과 관계있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무명 성서에는 아무런 주인도 없기 때문에 활짝 열려있는 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제 아이작이 열쇠지기가 되기로 한 것이다.
“■■■ ■■ ■■!”
달려오는 짐승 무리에게서 기괴한 방언이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에 아이작은 구역질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조금 특이한 괴물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다. 기괴하고 악의적인 취향을 가진 무언가가 뒤틀린 형상들을 쥐어 짜내어 만든 생태계가 파도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것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명 성서에 아이작의 서명이 완성되었다.
쩌어어억.
촉수가 마침내 풀린 순간, 무명 성서가 펄럭이면서 그 첫 장을 드러냈다.
무명 성서로 인해 열린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이제 아이작 마음대로였다.
아이작의 코앞까지 괴물들이 들이닥친 순간, 그는 첫 장에 적힐 신의 말씀을 옮겨 담았다.
“닫혀라.”
부풀어 올랐던 공간이 순식간에 줄어들면서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까드드드드득! 마치 광활한 지평선이 순식간에 좁아지고 벽이라도 세워진 것처럼 원래의 성역이 돌아왔다. 하지만 괴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괴물들은 좁아진 세계의 벽 안에서 압착되고 짓이겨지면서 소멸했다.
몇몇 성역 안에 뛰어드는 데 성공한 놈들도 벽에 겹치면서 토막 나 흩어졌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은 날개가 한 장만 잘린 나이트 스토커가 전부였다.
아이작은 빠르게 촉수를 휘둘러 나이트 스토커의 심장을 찔렀다. 날지도 못하고 비좁은 공간에 갇힌 나이트 스토커를 처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놈은 마지막까지 버둥거리면서 아이작을 향해 촉수를 허우적거렸다.
한밤중의 나이트 스토커 한 마리가 얼마나 악몽 같은지 알고 있는 아이작으로선 싱거운 결과였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미개발 지역으로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키퍼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의 괴물이었으니까.
‘장소 탓도 있긴 하지만…… 진짜 이름 없는 혼돈이 강하긴 하군.’
힘숨찐만 안 한다면 아이작은 성기사단 한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작은 마지막 남은 나이트 스토커가 촉수에 의해 착즙되어 바스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이트 스토커는 몸의 형체를 거의 잃은 와중에서 뭔가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 ■■■ ■…….”
괴물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외치던 말이었다. 세세한 어휘는 다르고 비난이거나 애원, 격정적인 포효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 의미는 다 같았다.
아이작은 이번에도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발 다시 돌아와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