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
9화. 성체(聖體) (1)
고개를 들어 올리자 비에 홀딱 젖은 게벨이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빨이 다 나간 낡은 검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검광이 그 검신에 은은하게 감돌다가 사그라들었다.
게벨의 손목 안쪽에 초승달과 검이 교차한 문신이 보였다.
게벨은 아이작이 놀라서 대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건지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아이작의 얼굴을 더듬더니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눈 두 개, 귀 두 개, 팔다리 각각 두 개. 잠깐. 코는 왜 하나밖에 없냐?”
아이작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코를 움켜쥐자 게벨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사람 같았는데.’
아이작도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게벨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게벨이 성기사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로서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이작은, 이 세계에서 성기사의 검술은 게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은 그가 쓰던 검술을 꼭 배우기로 했다.
***
그날 도망친 아이들은 바로 수도사들에게 달려갔다.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아이작의 위기에 대해 알렸고, 곧바로 게벨이 수도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늦게 아이작과 멧돼지의 흔적을 뒤쫓았지만, 다음 날 새벽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다들 아이작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벨은 결국 아이작을 데려왔고, 수도원 사람들이 전부 모여 신의 기적을 찬양했다.
물론 거기에 빛의 법전이 행한 기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겸손하게 빛의 법전을 찬미했다.
수도사들은 함부로 행동한 아이작을 혼내야 할지, 혹은 영웅적으로 행동했다며 칭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아이작은 저녁 금식이라는 벌을 받았다.
어차피 ‘포식’을 할 수 있는 아이작에게는 문제가 되는 형벌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도원 전체적으로 아이작에 대해 크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번져서, 아이작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거의 대부분 들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미안하다.”
다음 날, 바로 한스가 찾아와 사과했다. 아이작은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게 아닌가 했지만 한스에게는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어. 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렇게 말하는 한스는 오히려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미 은연중에 아이작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아이작을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무리해서 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아예 격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자, 경쟁심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공포의 대상에게 굴복하면, 그다음은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았다.
“요르한한테나 사과해. 이젠 도망칠 생각이 없어졌나 보지?”
“이미 사과하고 왔어. 앞으론 도망칠 일 없을 거야. 나처럼 멍청한 소리 하는 놈 있으면 내가 단단히 타이를게.”
그렇게 말하는 한스는 존경의 눈빛까지 보였다. 아이작은 그 눈빛이 거북했지만, 어린애라 그런 모양이라며 넘겼다.
힘세면 다 좋은 줄 아는 나이다. 그리고 한스는 아이들 중 가장 나이 많고 힘이 센 녀석이다. 녀석이 고분고분해진다면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을 맞닥뜨리니 인정하는 건 빠르네. 보기보다 멍청한 건 아닌 모양이군.’
애초에 도주 계획도 단순히 아이작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짰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작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그냥저냥 무난하게 17살까지 지냈을 것이다.
한스는 사과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한스는 화해했다고 생각한 건지 환하게 웃었다.
***
“너 엄청 세더라. 게벨 씨한테서 배운 거야?”
“응? 어어, 뭐 그렇지?”
전생의 기억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슬쩍 둘러댔다. 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여명군(黎明軍)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때 한스가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작은 익숙한 단어가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군.
그게 뭔지는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메인 퀘스트이자 뼈대가 되는 스토리 라인이다.
저 먼 동방에는 빛의 법전이 처음 쓰인 곳이라고 알려진 ‘성지’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성지는 불사교단의 ‘불사황제’ 베셰크가 신으로 재탄생한 땅이기도 했다.
여명군은 바로 그 성지를 다시 수복하기 위해 빛의 법전 교단이 결성한 연합군대였다.
성지는 어떤 때는 빛의 법전을 국교로 삼은 백제국이, 어떤 때는 불사교단이 지배하는 흑제국이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은 흑제국이 성지를 지배해 왔다. 그리고 가장 최근 여명군이 결성된 것은 15년 전, 12차 여명군이었다.
“가장 최근의 여명군이 15년 전 일이니까 우리가 어른이 될 때쯤에는 또 조직될 거야. 성지는 반드시 탈환해야 하잖아.”
한스는 언젠가 반드시 또 빛의 법전 교단에서 여명군을 결성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이작은 정확히 그 시기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의 일이다.
‘확실히 성기사로서 정점을 찍으려면 여명군 참전만 한 커리어가 없기는 하지.’
딱히 성기사가 아니라도 이 게임을 하는 이상 이 여명군 퀘스트는 진행할 수밖에 없다. 전 대륙 전체가 말려 들어가는 전쟁이니 당연하다.
요컨대 ‘13차 여명군 원정’은 ‘네임리스 카오스’의 메인 스토리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
여명군이 결성되면 불사교단 측에서도 월식군(月蝕軍)을 결성해서 뜻이 맞는 교단끼리 손을 잡고 여명군에 대항한다.
즉, 아이작은 이미 13차 여명군 원정을 여덟 번이나 성공시킨 고인물이라는 뜻이다.
아이작은 자신의 목적을 되새겼다.
촉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숭고한 성기사가 되어야 하고, 그 정점에서 성지를 탈환한다.
‘그때가 되면 게임상으로는 엔딩이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허무하게 ‘The end’가 뜨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결말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아이작은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언젠가 반드시 여명군에 들어가야 했다.
“여명군이 될 생각이라면 왜 게벨 씨를 따라다니지 않은 건데?”
아이작의 말에 한스가 얼굴을 붉혔다.
“예전에 따라다닌 적 있었는데 너무 힘들고 더러운 일을 많이 시켜서…… 무섭기도 하고.”
쫓아다니다가 나가떨어졌다는 뜻이었다. 한스는 말을 돌리려는 듯 급히 말했다.
“그, 그런데 게벨 씨 안 무서워?”
“별로? 보기보다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는 사람이던데.”
“그래도 게벨 씨는 탈영병이라는 말도 있잖아. 탈영병들은 막 도망치면서 약탈하고 같은 신도들까지도 죽이고…….”
이 시대에 탈영병이란 거의 산적 떼와 동의어다. 전쟁 한번 치르기 위해서 각지에서 제대로 된 보급조차 없이 징집병을 끌어모은 탓이다.
전투 한 번 치르고 나면 탈영병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그 탈영병은 다시 또 지역 각지에서 말썽을 일으킨다.
“그리고 손목에 문신 봤어? 초승달과 칼이 겹쳐있는 문신 말야. 그거 보면 어쩌면 흑제국 병사였을지도 몰라. 우리나라로 몰래 숨어들어온 거지.”
아이작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상상력은 대단하다만 손목에 나 첩자요 하는 문신을 박아놨을까. 게다가 흑제국의 병사라면 언데드다. 뻔뻔하게 살가죽을 입고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아이작도 그 문신을 본 적 있었다. 초승달은 흑제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요르한이 불안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하긴, 나도 게벨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니까……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봐야겠군.’
***
아이작은 게벨로부터 어떻게 해야 검술을 배울 수 있을지 매일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몸은 만들고 있지만, 검술을 배우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특히 그가 성기사가 되기 위해 가야 할 행보를 생각하면 더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게벨은 동료들을 잃었다. 그에게 다시 검을 쥐여주고, 후대를 키우게 만들려면 적절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 뿐, 어디 소속이었으며 어떤 사정으로 여기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아이작은 도서관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이미 단서는 나와 있었다.
그렇게 뒤지기를 며칠, 책들을 샅샅이 훑어보던 아이작은 어느 날 옆에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잡아챘다. 두터운 가죽 양장에 묵직한 양피지로 이루어져, 하마터면 놓칠 뻔할 정도로 무거운 책이었다.
그는 책장에 꽂으려던 책 제목을 다시 읽었다.
‘12차 여명군 기록.’
15년 전 벌어졌던 바로 그 여명군에 관한 기록이었다. 아이작은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12차 여명군이 시작된 이유, 참전국, 경로, 인원, 부딪친 적대 세력과 어디서 어떤 식으로 보급했는지…… 성실하지만 단조롭게 기록된, 말 그대로 기록서였다. 재미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참가 단체’ 부분에서 멈췄다.
초승달과 겹친 칼의 문장.
게벨의 손목에 있던 문신을 깃발로 쓰던 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그 조직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Avalanche holy knights).
‘……그렇지, 여기였군.’
게벨은 바로 그 12차 여명군에 참전한 성기사였다.
아이작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에 대해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대략 120여 명 정도의 규모로, 동부 지역에서는 꽤 큰 기사단에 속했다. 게다가 불사교단과의 접경지에 붙어있어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작은 기사단원들의 명단에서 눈길을 멈췄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부단장 게벨 크랙톤.
‘부단장…… 생각보다 거물이었잖아?’
아이작은 어이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성기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거물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니?
성기사들은 개인의 무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의 기적까지 행사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우위로 쳐준다. 교단 안에서도 높은 신분을 보장하니 영주나 왕도 어떻게든 모셔오려고 하는데, 성기사들이 돈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다 보니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들었다.
이 정도 신분이었다면 적당한 권력자의 도움을 받아 어딘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살아남았을 때 탈주라도 한 건가? 배교라든가?’
확실히 아이작은 게벨이 경전을 읽기는커녕 기도를 올리는 모습조차 한번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배교를 했다면 굳이 빛의 법전 수도원에 몸을 의탁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그때 그의 생각에 맞장구를 쳐주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을 종복으로 삼길 바랍니다.]“……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름 없는 혼돈이 목표를 하향 조정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을 먹잇감으로 삼길 바랍니다.]“아니, 날 대체 뭘로 보고 있는 거냐고. 사람이 쥐새끼랑 같아?”
[이름 없는 혼돈이 목표를 더 하향 조정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에게서 티끌만 한 승리라도 거두기를 바랍니다.]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고작 14살짜리 아이에게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기사단 부단장이었던 사람을 굴복시키라고? 게벨이 성기사라는 걸 알자 이름 없는 혼돈이 알 수 없는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어처구니없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다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리고 아이작은 어차피 게벨에게 도박수를 한 번 던져 볼 생각이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