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시체들의 밤 (3)
아이작은 왜 불사 교단이 왜 자꾸 자신을 죽이는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왜 그 노란 옷을 입은 노인이 되어있는지도.
‘이제 와서 이름 없는 혼돈이 나를 엿 먹이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아이작은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떠올렸다. 그것을 만든 순간 아이작은 뭔가 다른 세계와 한순간이나마 이어졌고, 그 여파가 아이작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나이트 스토커가 그랬던 것처럼 쳐들어오면 베든가 먹어 치우든가 할 수 있을 텐데, 악몽만 꾸니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맘 편하게 상담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속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은 아직 검푸른 새벽이었다.
아이작은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이사크레아 영지는 조용했다. 변화하기 시작한 영지의 모습이 아이작의 마음을 그나마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한가로운 새벽 산책을 방해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도와줄까?”
아이작은 성벽 끝에 매달려 있는 에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배기사님. 반갑습니다.”
에이단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을 붙잡아 힘껏 끌어올렸다. 모처럼 온 소금 의회의 사절을 추락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째서 이 새벽에 성벽을 기어오르던 거지? 내가 필요한 건 화로 장인과의 연결이지 소금 의회의 시체가 아닌데.”
“이 정도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이작 님과 갑자기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했을 뿐이지. 그리고 이 시간대에는 경비가 느슨해서…… 사실 아이작 님을 다시 은밀하게 찾아뵈려 했을 뿐입니다.”
“은밀하게?”
“화로 장인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으시다더군요.”
“조건이라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영지에 머무는 동안 화로 장인님을 보호해달라는 것이죠.”
아이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단 말대로 당연한 요구였다.
화로 장인의 엄청난 능력 때문에 노리는 사람이나 세력은 수없이 많다. 특히 대륙으로 들어온 화로 장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작도 기껏 손안에 들어온 화로 장인을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 당연히 보호할 생각이었지만, 과연 누가 화로 장인을 노리느냐에 따라 값싼 조건일 수도, 값비싼 조건이 될 수도 있었다.
“누가 화로 장인을 쫓고 있지?”
“조건을 듣고 거절할 생각이시라면 곤란합니다. 저도 쫓기는 입장이라 편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에이단의 얼굴에는 피곤이 드리워져 있었다. 새벽부터 성벽을 기어오르더라니, 아무래도 그를 추적하는 사람을 피해 움직이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화로 장인과 에이단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은 센 척하지만 당장 아이작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처지라는 것도.
“빛의 법전과 대적해야 하는 거라면 곤란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아이작에게도 곤란한 일이었다. 백제국에서 빛의 법전을 적으로 돌리고 살아갈 순 없으니까. 에이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의 법전은 아닙니다.”
“흠, 화로 장인이라면 보호를 부탁할 사람들이 많을 텐데 왜 나지?”
“아이작 님의 명성과 신망을 믿어서…… 아닐까요?”
에이단은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작은 에이단의 내심을 읽어 냈다.
소금 의회 신도답게 아이작의 명성과 신망을 믿어서, 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일부였을 뿐이다. 그보다는 아이작이 보여 준 열린 태도와 숭고한 성배기사에 대한 소문, 그리고 천사와도 맞서 싸웠던 실력을 높이 친 것이라고 보았다.
‘천사와 맞서 싸울 정도의 힘이 필요한 건가? 대체 누구에게 쫓기고 있길래?’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발동시켜 에이단의 내심을 들여다보려 했다. 하지만 소금 의회 신도는 거짓말을 못 하는 대신 깊은 내심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다른 이들은 속아 넘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만은 그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백골, 한기.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찾아온 한기에 손끝이 아려왔다.
돌변한 아이작의 기세에 에이단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작은 화로 장인을 추적하는 자들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대체 게르토니아 제국까지 놈들이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보았다.
“좋아. 화로 장인을 모셔와라.”
아이작의 관심은 화로 장인에서 그를 노리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진득한 살기를 곁들여서.
***
‘오늘로 약속했던 한 달째인가.’
저녁 무렵, 이솔데는 아이작을 찾아 중앙홀로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말은 ‘왜 약속한 대로 기적을 안 보여 주냐’가 아니라 기간을 늘려도 좋다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은 무제한으로 둘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솔데는 아이작이 영지를 운영하는 것도 기적의 일종처럼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현상 유지만 해도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아이작에게 영주의 그릇을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지, 행정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는 날이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작이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이 엄청나다는 뜻이 아니다.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 자체만을 두고 보자면 농지에 관해서는 르하르트가 낫고, 상업이나 물류에 관해서라면 캐틀린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압도하는 것은 아이작의 안목과 사람을 선동하는 능력, 그리고 교단 같은 상류층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보적인 태도였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솔데는 한 발짝 물러서서 영지의 변화를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영지 안의 모든 사람들은 거의 홀린 듯이 아이작을 추종하며 따르고 있었다. 영지가 극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이 압도적인 카리스마 때문이기도 했다.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과 성기사들조차도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사를 퇴치할 정도의 실력자라지만 그들의 깊은 믿음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이작이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
이성적인 매력이나 외모와는 다르다.
그의 말투, 어휘, 태도, 모든 것에서 믿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흘러나왔다.
갓 성인이 된 성기사에게 어떻게 이런 면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어 보였고, 불가사의한 능력과 매력이 그 신념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솔데조차 그를 추종하고 싶은 충동에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충동으로부터 그녀를 붙들어두는 것은 이단심문관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아이작이 가끔 내뱉는 반 교단적인 언행들이었다.
‘아이작이 교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하지만 교단이 곧 빛의 법전은 아니니…… 아직 이단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아이작은 가끔 색다른 교리 해석을 내놓기도 해서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교리 해석이란 게 자칫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쉬운 일이라 걱정이 적지 않았지만, 그 해석에 선의와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는 애써 악의적인 해석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온전한 이단심문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를 이단심문관으로 만드신 걸까?’
이솔데는 자신의 부친을 떠올렸다. 자상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냉혈한도 아닌 아버지.
그는 이솔데를 이단심문관 자리에 반쯤 강제로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유지하도록 가르쳤다.
덕분에 이솔데는 광신에 물들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출세와는 거리가 먼 행보였지만, 이솔데는 어렴풋이 아버지의 의도를 읽어냈다.
역설적이게도 부패한 교단의 늙은이들에게 대들만한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이단심문관일 확률이 높으니까.
***
“서둘러!”
“기름은? 끓인 물과 붕대도 준비해!”
중앙홀은 예상치 못한 소란으로 가득했다. 이솔데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다. 이미 성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관료들이 모여 술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솔데는 동요하는 관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관료는 이솔데를 보고 기겁했다. 그녀는 관료의 반응에 의아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관료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성기사 베르너가 밀렵꾼들을 찾아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영주님 사유지까지 침범하지 않도록 화전민 마을로 경고하러 갔는데, 주민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혈흔만 발견했다는군요.”
“혈흔이요?”
“예.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듯한 대량의 혈흔인데, 시체는 하나도 없다고…….”
관료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닫고 이솔데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습격. 대량의 혈흔. 시체가 없는 마을. 변방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흑제국의 ‘징집’.
관료가 왜 자신을 보고 기겁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백제국의 변방이긴 하지만 흑제국과 제법 떨어진, 게르토니아 제국 영토다. 이런 곳에서 불사 교단의 징집이 일어났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아이작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고를 받고 곧장 무장을 차려입은 듯, 머리를 제외하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자클렛 용병대장에게 즉시 영지 주변을 정찰하라고 전해라. 순찰대 숫자는 최소 10명 이상으로 하고, 성기사들을 반드시 대동하도록. 사제님들은 성벽에 축성(祝聖)을 부탁드립니다.”
그 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과 수성을 위한 전략 등, 아이작은 필요한 지시들을 구체적으로 하달했다. 하지만 지시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이작은 눈을 치켜뜨며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이솔데와 사제, 성기사들도 그가 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반인인 관료들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기운에 당황했을 뿐이었지만,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달랐다. 이 찌르는 듯한 한기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솔데는 강력한 기운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주교급……?’
일부러 한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은 선전포고 내지는 알아서 물러나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특히 아이작은 오히려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투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중앙 홀로 뛰어 들어왔다.
“영주님! 다리 쪽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이 마을로 오던 상단을 습격했습니다! 상인들이 즉시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알겠다. 바로…….”
아이작은 곧바로 움직이려다가 멈춰 섰다. 뒤늦게 성기사들도 방금 들은 보고 내용을 되새겨 보고 당황했다.
“다리라면 남동쪽 아닙니까? 거기는…….”
강력한 한기가 느껴지는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아이작과 이솔데는 이 한기를 보낸 자의 숨겨진 메시지를 깨달았다. 깨지고 싶지 않으면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기를 보낸 자의 힘이 작지 않은바, 만약 아이작이 수도원을 비우고 상인들을 구하러 가면 영지가 습격당할 수도 있었다.
난처한 순간, 이솔데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다리 쪽으로 가지요. 성배기사님께서는 주민들을 지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