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5)
95화. 해방주교 (3)
검기는 엘릴 교단의 가장 대표적인 기적이었다.
스스로 초월자의 자리에 올라선 엘릴을 숭배하는 자들답게 엘릴 교단은 명예와 승부에 돌아 버린 무인들만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검기는 그들 중 선택받은 최상위 전사들에게만 허락된 기적이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아이작의 번뜩이는 눈빛이 알 두아자드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 눈빛에서 야수가 사냥감을 핥는 듯한 섬뜩함을 느낀 알 두아자드는 반사적으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몸을 사로잡던 냉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제 냉기는 시각적인 형체를 갖추고 아이작에게 매달렸다. 몸 곳곳에 파란 손자국과 서리가 맺히고 피부마저 퍼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듀라한의 움직임까지 사로잡을까 싶어서 자제하던 강도의 기적이었다.
알 두아자드는 극도의 집중력을 통해 세 개의 기적을 동시에 발휘하고 있었다. 명계의 한기를 불러내고, 망령들을 이용해 속박하며, 단숨에 아이작의 심장을 쥐어 터뜨릴 또 다른 즉사 기도문을 준비했다.
‘제발 이 정도로 끝내야……!’
그러나 그 순간, 아이작이 왼손을 거칠게 휘둘러 망령들을 뿌리쳤다. 그런다고 망령들이 떨어져 나갈 리가 없지만, 그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알 두아자드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니, 무슨?!”
아이작의 팔에 붙어있던 망령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쥐어 뜯어낸 것처럼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마치 신성한 기적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망령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알 두아자드는 뒤늦게 아이작의 왼손에서 불길하게 진동하는 신성을 느꼈다.
‘왼손에 기적이? 아니, 저게 기적이 맞나?’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길고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흐느적거리는 무언가였다. 거기에는 깊고 어두운 힘이 느껴졌지만, 신성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골루와루처럼 영적인 존재를 상대할 때에는 촉수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촉수는 이제 마침내 ‘기적답게’ 신성을 품고 망령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제 촉수에도 신성력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알 두아자드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빛의 법전 성기사로 알려진 자가 엘릴의 기적을 쓰는가 하면, 뭐가 뭔지 모를 불길한 기적까지. 하지만 다행히 아이작은 여전히 냉기에 사로잡혀 제대로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죽어 쓰러져 있던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튕겨 나가듯 아이작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알 두아자드는 다시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팬텀 스티드? 그건 또 어디서……!”
쩌어어억.
아이작이 블러드 나이트를 처치하고 얻어 낸 팬텀 스티드는 불길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블러드 나이트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때 붉은 살덩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형태였듯이, 아이작에게 조종당하는 팬텀 스티드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불완전한 부정형 신경조직이 어설프게 말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일반인은 그 형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 두아자드는 침착하게 마지막 기적을 완성시켰다.
“……하여 마침내 당신께서 성배를 그 피를 바닥에 쏟아부었으니!”
사방에서 좁혀 오는 심장을 쥐어 터뜨리는 즉사 저주.
이것은 아까처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죽음의 기세는 물리적인 형상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돌진하는 아이작의 주변으로 둥글게 풀과 나무들이 시커멓게 죽고, 단숨에 아이작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작의 몸이 붉은 안개로 변했다.
붉은 안개로 변한 아이작과 팬텀 스티드는 허무하리만치 즉사 저주를 통과해 지나갔다. 알 두아자드는 그것이 붉은 성배 클럽의 기적인 붉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빠각. 붉은 안개가 다시 아이작의 형체를 갖추는 순간, 루앗딘 열쇠가 그의 목뼈를 경쾌하게 쳤다.
***
알 두아자드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몸은 어떻게 됐는지 보이지 않고 두개골만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더 끔찍한 상태에서도 되살아난 바 있었다. 몸을 잃어버린 것도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몸 대부분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머리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골밖에 없는 주제에 기절도 하네요.”
“영혼이 순간적으로 몸에서 빠져나가서 그래.”
어딘가에서 아이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알 두아자드는 그의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예. 그래서 저희들은 의외로 그런 이유로 걸핏하면 기절합니다. 몸과 영의 속박이 헐거운 부작용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번처럼 여러분들은 죽을 부상도 기절로 끝나기도 합니다만.”
그 말에 뒤에 있던 여자가 몸을 숙여 알 두아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 역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굴마르 가의 아가씨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널 모르겠는데. 해골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골격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의외로 그런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저벅. 알 두아자드가 수다를 길게 떨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앞으로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작이었다.
그에게도 여유를 보이려던 알 두아자드는 어째선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언데드는 성대를 진동시키는 것도 아니고 정신파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인데도.
아이작 역시 말없이 물끄러미 알 두아자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알 두아자드와 완전히 다른 이유임이 분명했다.
알 두아자드는 자신이 왜 아직 살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개골만 남은 상태에서도 기도문도 외우고, 하다못해 물어 뜯기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알 두아자드는 그중 어떤 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작에게 그 모든 시도가 통할지, 아니, 눈앞에 있는 아이작이 인간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자는 팔다리 달려 있고 멀쩡하게 눈코입 있는 인간인데, 알 두아자드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빛의 법전에서 괴물이라도 키우는 건가? 아니면 인간의 육신을 빌린 천사인가?’
그 무감정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알 두아자드는 오한이 일었다.
그는 아이작 몰래 불사 교단의 기적, ‘명부’를 펼쳤다. 산 자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기적은 그 영혼의 질적 상태를 통해 상대의 수명은 물론, 순수함, 감정 상태, 힘과 영혼을 비호하는 신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명부를 통해 아이작을 들여다본 알 두아자드는 한층 더 섬찟함을 느꼈다.
도저히 아이작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물론 누구든 어떤 강력한 신이나 천사가 보호하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넘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포식’하고 있었다.
힘이든, 기술이든, 심지어 정보마저도.
그러나 알 두아자드를 떨게 만든 것은 아이작의 감정 상태였다.
‘그렇게 격한 전투를 치르고도 어떤 고양감이나 흥분, 분노조차 느껴지질 않는다.’
수준 높은 전사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들었지만, 신앙이 다른 자와 마주할 때, 혹은 곧 싸울 자와 마주하면서 느끼는 경멸이나 혐오, 사소한 언짢음 정도는 존재할 법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알 두아자드가 아이작의 시선에 섬찟함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아이작은 그를 불사 교단의 주교나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른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경험치 계산식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거 영 쓸모가 없는데.’
[이 대상은 포식 대상으로 가치가 없습니다.]아이작은 이미 알 두아자드의 육신을 포식한 상태였다. 촉수는 뼈다귀뿐인 몸을 재미없다는 듯이 으적거리면서 씹어 삼켰지만 별 영양이 없다는 메시지뿐이었다.
‘리치는 포식 가치가 없다고? 뼈다귀는 영양가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언데드에게는 특수한 룰이 적용되는 건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 두아자드를 해치우면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보상이 들어올 것이고, 그 외에 알 두아자드의 영대를 획득한 것도 큰 성과였다. 영대가 꽤 값어치 있는 성물이었던 것이다.
아이작이 침묵하고 있자 지루해진 헤사벨이 입을 열었다.
“고문해서 입을 열까요?”
“이놈들은 통각이 없어. 고문해도 소용없지.”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이없다는 듯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는 불사 교단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왈라이카 왕국은 흑제국 영역이잖아.”
“그냥 정치적으로 뜻이 맞는 거지 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거든요?”
사실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붉은 성배 클럽과 불사 교단, 둘 다 죽음을 거부하는 집단이긴 하다. 하지만 붉은 성배 클럽은 육체적 쾌락을 포기 못 한 탐미주의자들인 반면, 불사 교단은 육체의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등 사회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뜻이 맞을 리가 없다.
그저 이들을 못 봐주는 백제국이라는 더 큰 적 앞에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대로 잡아먹어도 상관없겠지만 포식해도 영양가가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그냥 먹기에는 아쉬웠다.
알 두아자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굴마르 가의 후계자도 굴복시키고, 죽음의 저주조차 빗겨내며, 빛의 법전을 기만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시는 사교도기에 이 땅에 오셨습니까?”
“사교도 아니라고.”
알 두아자드는 포기한 듯 물었다.
“화로 장인을 왜 데려가려고 했는지 물으시려는 겁니까?”
“신을 하나 만드는 데 써먹으려다가 일이 꼬여서 데려가려고 한 거겠지. 관심 없어.”
알 두아자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표정은 지을 수 없지만, 그가 경악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질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네임리스 카오스의 스토리 라인을 모두 알고 있는 아이작에게는 알 두아자드가 왜 하필 여기서 어슬렁거렸는지 뻔히 보였다.
“고대신을 여기저기서 부활시키도록 사제를 파견하던 것도 너였겠지. 칼센 밀터를 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실종되는 바람에 뒷수습이 난처한 모양이군.”
알 두아자드는 얼마나 놀란 건지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렸다. 고대신 부활이야 어느 정도 눈치챈 사람은 있어도 신을 탄생시키려던 계획은 불사 교단 안에서도 극비리에 진행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신을 탄생시키려는 거야? 그걸 이해 못 하겠네.”
아이작은 네임리스 카오스를 여러 번 클리어했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인 ‘칼센 신 만들기 계획’이 왜 시작됐고 왜 실패했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원래라면 아이작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하필 자신이 거기에 발을 얹은 데다 불가피하게 그 행적을 따라가고 있는 상태라면 알아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백제국에 테러하고 싶은 거치곤 너무 거창하고 위험하잖아. 동맹을 만들고 싶은 거면 너네 땅 안에서 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데 왜 하필 백제국 영토 안에서 신을 만들려던 거야?”
헤사벨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이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건가 싶어서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만약 빛의 법전 천사가 보낸, 혹은 천사 본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고, 하다못해 교단 고위층만 되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작이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적들을 다 끌어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그 사실은 알 두아자드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세상에는 늘 아홉 개의 신앙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알 두아자드는 입을 열고 있었다.
“아홉 신앙? 그거야…….”
“야만적인 고대 신앙들을 물리치고 세상에는 빛의 법전 주도 아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불사 교단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고정시킬 아홉 개의 질서가 만들어진 거죠.”
빛의 법전, 엘릴, 세상의 화로, 황금 우상, 소금 의회, 올칸 규율, 붉은 성배, 불사 교단.
그리고 이름 없는 혼돈.
이 아홉 개의 종교를 아홉 신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에는 신처럼 교단 이름이 붙어있지 않다. 신도가 전멸하면서 교단 이름도 잊혔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느꼈다.
“여덟 신앙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은 여덟이지만, 아홉 번째 자리는 채워야만 합니다.”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예. 아니면 죽은 신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메우려 할지도 모르니까요.”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숭고하신 성배기사님. 당신의 신성한 직무가 지금 위대하신 신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죽은 혼돈은 언제 다시 범람해 이 세계를 침탈하려 할지 모릅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듣고서야 불사 교단의 음모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백제국을 엿먹이겠다는 생각으로 백제국 영토 안에서 칼센을 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어 있는 아홉 번째 권좌를 서둘러 메워,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이다.
바로 이름 없는 혼돈을.
“우리가 왜 백제국 안에 신을 탄생시키려 했느냐구요? 왜 하필 칼센이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그 질문에 대해서도 이제 스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빛의 법전 내부에 불사 교단과 협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대에 가장 신에 가까운 업적을 세운 인간과 신성이 가득 고인 영토를 빌려줌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