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6)
96화. 해방주교 (4)
아이작은 게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아발란체 성기사단 전멸의 배후에 등하맹인 중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칼센은 이번에 천사가 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명천사가 될 것까지도 기대받던 자였다. 그런데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변방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전멸당하고 배교자로 찍힌 지 몇 년 안 되어 칼센도 배교자가 되었다. 이게 우연일까?
게벨의 경고이자 당부였던 그 말들.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이 계획의 희생양이었나?’
만약 비어 있는 아홉 번째 신앙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앙숙이나 다름없는 두 교단이 협력하고 있다면, 그 시도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을 확률이 높다. 게벨이 소속되어있던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거기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 습격당했던 마을처럼.
‘물론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마냥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왜 빛의 법전 성기사가 불사 교단의 도움을 받아 신이 되어야 하는지, 한쪽에서만 진행하면 안 되는지 등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걸 왜 내게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아아, 성배기사님. 당신이 빛의 법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의 숨겨진 힘을, 그리고 야망을. 당신은 절대로 평범한 성배기사의 영광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지요.”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안쪽에서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번뜩이며 아이작을 응시했다.
“계획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받는다면 말입니다.”
“불사 교단이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
아이작의 말에 알 두아자드는 그가 흔들린다고 느낀 듯 반갑게 말했다.
“불사 황제께서는 현재 유일하게 이 땅을 거니는 신이시자 스스로 신이 되는 의식을 치르고 승천하신 분입니다. 적어도 이 의식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교단만이 유일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불사 교단의 신이자 지배자인 불사황제 베셰크는 가장 최근에 신이 된 자다. 죽지 않는 언데드들의 신답게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며 다른 신들과 달리 그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입증했다.
‘적어도 불사 교단은 불사황제까지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 입증되는군.’
그렇다면 빛의 법전은 어디까지 개입했을까? 교황? 황제? 이쪽도 신이 개입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빛의 법전은 비인격신이지만 이름 없는 혼돈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세워진다면 누가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빛의 법전은 빛과 지혜, 질서를 상징한다. 이름 없는 혼돈과는 상극이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이름 없는 혼돈은 모든 신앙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머리 깨지겠는데.’
눈앞의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이 자신들의 계획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아이작이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신만 탄생시키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아니, 사실 그렇게라도 꼬시지 않으면 본인이 산산조각 날 위기이니 뭐라도 말해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하는군…….’
만약 알게 된다면 절대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작은 신이 되어 달라는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솔직히 성기사가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자는 생각까지는 해 봤지만 신은 너무 갔다는 생각만 들었다.
애당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아이작의 정체를 안다면 당장 모두가 씹어먹으려 들 테니까.
“어떤 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봐.”
***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에게 운을 띄우는 동시에 혼돈의 눈을 발동했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 그리고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화제를 던졌을 때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장 읽기가 쉽기 때문에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알 두아자드는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 전에 당신이 숭배하는 신이 뭔지부터…… 잠깐.”
알 두아자드에게서 일말의 의심이 피어오른 순간, 어둠 속에서 아이작의 녹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알 두아자드의 의식이 급히 닫히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한 아이작은 더욱 강하게 능력을 발동시켰다.
“잠깐, 이건 무슨, 아니, 설마?”
충격, 공포, 경악, 혼란.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에게서 짧게 피어오르는 감정의 단말마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는 걸 다 말해!”
공포는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든다. 아이작은 헤인켈 굴마르를 통해서 그 사실을 배웠다. 알 두아자드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쓰기 위해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극도로 끌어 썼다.
“너, 으, 어억, 어.”
아이작의 눈에 핏줄이 강하게 서면서 피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속에 도사린 영혼이 경련하듯 요동쳤다. 급기야 아이작의 눈에서 핏줄을 넘어 실가닥 같은 촉수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촉수들은 단순히 흘러나오는 것을 넘어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안쪽으로 침식하듯 파고 들어갔다. 이때까지 들킬까 봐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강도였다.
알 두아자드는 주교급 사제답게 의식을 폐쇄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하지만 아예 이렇게 신체적, 물리적으로 침식해 들어오는 것에는 그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기억이 파편화되어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촉수는 마치 뿌리가 탐욕스럽게 지하의 물을 착즙하는 형태로 정보를 쥐어 짜냈다.
그러나 알 두아자드 역시 괜히 주교의 자리에 오른 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반사적으로 행동할 만큼.
“────.”
찌이이이잉. 아이작은 순간 귀가 아파 올 정도의 이명을 느꼈다. 알 두아자드에게서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언기도(方言祈禱)였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무의식, 혹은 천사가 임했을 때 터져 나오는 기도.
“아이작 님!”
헤사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 주변으로 새하얗게 서리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아까 공격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고 강한 한기였다. 아이작은 서둘러 혼돈의 눈을 취소하고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의식은 너무 깊게 알 두아자드와 연결되어 있었다.
알 두아자드가 생각하고 말하는 바는 곧 아이작이 생각하고 말하는 바와 같은 수준이었다.
때문에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가 무의식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 두아자드는 사후세계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빠득, 빠드득.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을 부숴서라도 기도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대기도 전에 이미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을 발동시킨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은 스스로 부서져 나갔다. 덜덜거리는 이빨 조각 몇 개만이 방언기도의 메아리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전부 당장 여기서 벗어나…….”
아이작은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쥐고 즉시 도망치려고 했지만, 휘청 무릎이 풀려 쓰러졌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당황했다.
왜?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가 찾아오는 것만으로 자신이 이렇게 취약해질 이유가 없다.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라고 해 봤자 강추위와 함께 망령과 언데드 대군 소환, 그 정도 수준일 것이다. 왜냐면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는 이미 지상에 있으니까.
사후세계를 강제로 지상에 끌어내린 이들이 바로 불사 교단의 정체다.
지금도 지면에서 망령들이 넘실거리며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망령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를 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불사 교단 때문에 약해진 것이 아니다.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
하늘은 무너질 듯 기울어진 채 울렁였고, 그 사이로 검붉은 손가락들이 구름을 어린아이처럼 휘저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지만 도무지 바람 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 저 소리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인가, 아니면 한밤중 불안해하는 양 떼의 울음소리인가? 지상을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와 가축들은 썩어 가는 냄새를 풍겼으며 그 다리는 전부 홀수였다. 모든 것이 불균형하고 위태로워 무너질 것 같은 비대칭 속에서.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작은 저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수없이 엔딩을 보고 데드씬을 보고 배드 엔딩을 보았지만, 저런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악몽이…… 왜 지금?’
주변은 알 두아자드가 열어젖힌 사후세계 덕분에 초토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는 그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저 불경하고 기괴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 역겹고 기이한 것들이 금방이라도 밤 중의 밀물처럼 아이작의 발목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이미 아이작의 현실감각은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이름 없는 혼돈은 환희인지 경고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알림음을 연신 보내왔다. 역설적이게도 아이작은 그 알림음 때문에 실낱만큼이나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이 세계에서 저 알림음은 아이작에게 작게나마 객관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세계는 게임에 지나지 않고, 너는 그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했다!
게임 따위에 과몰입하지 마라! 너는 내가 선택한 플레이어다!
‘고작 게임 따위.’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때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음산한 나팔과 피리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고, 아이작은 귓가에 들려오던 알림음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악몽이 범람해 오고 있었다.
‘아.’
아이작은 자신의 손이 기이하게 변형된 것을 보았다. 촉수가 통제되지 않는 형태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전신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풍선이 터질 듯이 몸 안에서 촉수가 꿈틀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잠들었었다고.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이게 끝인가?’
아이작은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때,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불균형해지고, 무너질 듯 어지러워지는 와중에.
홀로 또렷한 형체를 가지고 악몽을 헤치며 다가오는 형체가 있었다.
“아이작! 아이작 성배기사님!”
저승과 이승 사이, 악몽과 혼돈 사이, 그 속에서 그녀는 혼자 꼿꼿한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아득한 의식 속에서나마 그녀의 몸을 휘감은 휘광의 정체를 보았다.
아궁이 짐승. 빛의 법전. 질서의 추종자.
재 속에서 태어난 신수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꼿꼿한 무언가가 그녀를 이 혼돈 속에서 닻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게 하고 있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아이작은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이 혼돈에서 빠져나와 저 망설임 없는 질서와 선의를 향해 다가가고 싶었다. 이솔데는 성큼 다가왔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촉수 다발이 되어버린 왼손을.
이솔데는 그 손을 보고 흠칫했지만 이내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품에 저항 없이 안겼다. 동시에 아이작은 빛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안정된 질서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무너지고 얼어붙고 녹아내리던 세계의 풍경이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눈앞에 이솔데의 당혹감에 찬 얼굴이 보였다.
“이게 무슨 난리…….”
“설명은…… 나중에 합시다.”
아이작은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파수자의 등대를 발동시켰다.
빛의 법전 기적 중에서도 최상위의 기적. 빛이 닿는 일대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할 수 있는 질서의 정점.
아이작의 머리 위에서 떠오른 후광의 빛이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를, 그리고 아이작에게서 비롯된 혼돈의 영역을 단숨에 몰아냈다.
아이작은 찬란한 섬광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혼돈을 응시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다음에 다시 또 보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