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고해 (1)
파수자의 등대에서 뿜어져 나온 안온한 빛이 밤을 추방하고 질서를 되찾아왔다.
이미 얼어붙어 죽은 풀과 나무가 되살아나진 않았지만, 더 이상 망령도 흘러 녹아내리고 섞이는 세계도 없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폭풍 속에서 빠져나와 단단한 땅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있어야 할, 있고 싶은 세계였다.
그리고 이솔데가 있었다.
빛의 법전의 이단심문관.
아이작은 사후세계가 범람했을 때 흘러나온 촉수들을 아직 몸 안에 다 집어넣지도 못한 상태였다. 다시 집어넣고는 있지만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는 않았다. 이솔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 아이작을 베어야겠다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 님!”
순간 뛰쳐나온 헤사벨이 재빨리 아이작과 이솔데 사이를 가로막았다. 뽑아 든 단검과 단창이 이솔데를 단숨에 찌를 듯 겨냥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이솔데대로 갑자기 나타난 낯선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에게 당황하고 있었다.
헤사벨이 그 짧은 시간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했는지는 명료했다. 서늘한 살기가 드리워졌다.
헤사벨이 이솔데를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 아이작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아, 아이작 님…….”
아이작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극심한 공복감이 아이작을 덮쳐 왔다. 격렬한 전투 탓인지, 아니면 사후세계의 범람이 원인인지 그의 몸은 원래 상태를 수복하기 위해 거의 모든 ‘고기’를 소비한 상태였다.
“화로 장인은 확보했나?”
“예, 예! 지, 아니, 벡스터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돌아가자…….”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오랜만이군.”
아이작은 눈을 떴다. 주변은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명, 빛의 법전 성기사 갑옷을 입은 한 남자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가지고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둥근 후광이 몸을 비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이작은 남자를 보자마자 이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면 그 남자는 지금 있을 수도, 있을 리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꿈이 아니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가깝지.”
성기사, 아니, 칼센 밀터가 아이작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아이작이 포식해 집어삼킨 칼센 밀터가 눈앞에 있었다.
기억보다 훨씬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지만, 그래도 칼센임은 분명했다.
‘이건 또 이상한 꿈이군.’
아이작은 왜 하필이면 자신의 꿈에 칼센이 나왔나 싶었다. 이솔데에게 정체를 들킨 데다 화로 장인까지 도착한, 한시가 급한 상황에 잠이나 잘 때가 아닌데.
“걱정 마라. 너는 지금 수도원에 돌아와서 요양 중이야. 헤사벨이 천장에 달라붙어서 너를 지키고 있고, 지힐렛이 문을 지키고 있지. 화로 장인과 소금 의회의 사공도 무사히 돌아왔고, 이솔데는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군.”
아이작은 칼센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의식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 바깥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거지? 그냥 예상하고 있는 건가?
“‘벽 속의 쥐’ 능력이 있잖아. 멍청한 놈. 내가 보고 듣기 싫어도 그 감각은 깨어서 네 몸에 정보를 들이밀고 있다.”
순간 아이작은 소름이 돋았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더듬더듬 검을 찾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애시당초 아이작의 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어둠, 이 공간 자체가 아이작이었다. 아이작은 온 사방에서 칼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게 아이작의 몸속에 들어온 것처럼.
“비슷해. 여기는 네 뱃속 같은 곳이다.”
그럼 이때까지 내가 먹어 치운 것들이 전부 이 안에 있는 건가?
“일부는. 나약한 것들, 자의식이 약한 것들은 금방 녹아내리더군. 헤인켈 굴마르가 잠깐 있었다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골루와루라는 고대신이 조각나서 한참을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사라졌다. 아, 놀랍게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잠시 머무르더군…… 물론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나도 잘 모르니까.”
반면 칼센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마치 구도 중인 수도승 같은 모습이었다. 과연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던 성기사답다고 할까. 은은한 후광 하며, 도무지 타락했다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칼센이 나타난 거지? 소화불량 같은 건가?
“아마 최근에 일어난 일들 때문이겠지.”
최근에 일어난 일? 불사 교단과 충돌한 것 말인가?
“아니. 네가 경전을 만든 것 말이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떠올렸다.
깊은 고민 없이 이름 없는 혼돈이 그저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경전.
칼센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네 신앙이 사후세계…… 우르반수스와 연결되었다. 그게 최근 네게 일어난 모든 변화와 악몽의 시작이지.”
사후세계.
아이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신앙에서 사후세계는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사후세계를 설명하고 납득하기 위해 신앙이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모든 신앙에는 저마다 자신들만의 사후세계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사후세계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공포를 대변하는 천국과 지옥이다.
빛의 법전은 찬란한 빛이 함께 하는 고상하고 우아한 천국을 가지지만, 동시에 들끓는 용암으로 가득 찬 지옥을 동반한다. 붉은 성배 클럽은 온갖 산해진미와 미남미녀가 즐비한 만찬장을 천국으로 가지지만, 동시에 그 만찬장의 메뉴로 ‘요리’되는 지옥을 가진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에게 어떤 사후세계가 있는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칼센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작에게 말했다.
“신도, 그 대리인도, 신자들조차 모르는 사후세계라. 그것참 볼만하겠군. 참으로 이름에 걸맞은 사후세계겠어.”
너는 뭘 알고 있지?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원래는 너를 무시하려고 했다. 아니, 네가 간절히 죽기를 바랐다. 이 안에서 널 어떻게 해코지할 수 없을까 고민도 많이 했지.”
하지만 칼센의 씁쓸한 표정에서 그 어떤 시도도 소용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는 검술도, 기적도, 의식도 통하지 않더군. 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저주받은 곳이야.”
그런데?
“방금 네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마음을 바꿔?
칼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바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천장을 보았다. 어디에나 아이작이 있고, 아이작의 시선이 존재했으므로 그는 아이작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일어날 시간이다. 답을 원하거든 소금 상인에게 물어봐. 네 상황에 대해서는 나보다 그가 더 잘 알 테니.”
***
아이작은 진짜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헤사벨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작 님! 정신이 드셨군요!”
그녀는 바로 천장에서 내려와 아이작의 상태를 살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는데도 그녀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걸 보면 이제 그녀를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잠에서 깼음에도 여전히 몸이 무겁고 힘이 빠진 것을 느꼈다.
마치 당 떨어진 노인처럼.
“헤사벨.”
“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돼지 한 마리 가져와. 익힐 필요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그렇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고서야 아이작은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이때까지 쌩쌩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체력이 ‘포식’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기운 없는 노인네 같은 체력이야말로 네피림 본연의 체력이었던 것이다. 실시간으로 쌩쌩한 성기사 마냥 활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고 마셔야만 했다.
‘단련한다고 단련했는데도 어지간히 저주받은 체력이군.’
다행히 아이작은 별다른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추가로 더 요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은 바로 관료들을 만나 영지의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화로 장인을 만나 보려 했지만 헤사벨은 약간 미루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왜?”
“지금 아이작 님을 찬양하고 열광하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거든요. 성기사들도 사제도 관료들도 영지민들도…….”
대충 헤사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영지민들은 아이작을 거의 지상에 강림한 천사처럼 떠받드는 분위기였다.
목숨을 위협하던 불사 교단의 위협에서 사상자 하나 없이 그들을 구원하고, 위기에 빠진 외부인까지 구출했으며, 무려 리치와 맞상대를 하다가 장렬한 전투 끝에 승리하였으니 가히 전설 속의 주인공이라 할만했다.
아이작은 그 이야기에 상당한 각색이 들어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투가 두 곳에서 일어났는데 서로가 못 본 전투에 대해 오해와 과장이 섞인 게 틀림없었다. 이야기가 부풀려지며 아이작은 거의 단신으로 수천의 언데드를 베고 불사 교단의 천사를 무찌른 반신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지금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니, 모두 밤새워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아이작은 그 오해를 당장 때려치우고 기도할 시간에 영지 복구 작업이나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헤사벨 말대로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의식을 잃은 사이 들어온 신앙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신앙심도 깊어져서 그런지 지금까지 모았던 양의 두 배 가까이가 더 들어온 상태였다. 이 정도면 사도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사도를 더 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며칠만 복귀를 미루면 신앙이 더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작은 조금만 더 다친 척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영지 복구 작업이 늦어지는 건 안 돼.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봄이란 말이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전하고, 맡은 직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의 모습이라고 전해라.”
“넵.”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어떻게 됐지?”
헤사벨은 이솔데를 떠올리자 입술을 샐쭉거리며 대답했다.
“일단은 살려뒀습니다. 아이작 님 말씀대로요. 입을 함부로 놀리면 혀를 뽑으려고 했는데, 다행히 헛소리를 떠들고 다니지는 않더군요. 지금은 불사 교단에 오염된 영지를 정화하는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아이작에 대한 열광적인 분위기로 영지가 들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부터.
만약 이단심문관인 이솔데가 아이작 몸에서 촉수가 나왔니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니 하는 소리를 떠들고 다녔으면 꽤나 찬물 뿌리는 소리가 됐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다행이긴 한데 왜 떠들고 다니지 않은 거지? 찬양받는 성배기사니까 조용히 심문한 뒤 암매장하겠다는 건가?’
꽤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교단 입장에서도 성자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던 성배기사가 사실 촉수 괴물이었습니다, 하면 체면을 망치는 셈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내심 그 추측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솔데가 아이작의 정체를 떠들지 않는 것은 아이작이 이솔데를 살려두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이단심문관을 불러줘.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