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8)
98화. 고해 (2)
‘저는 빛을 섬기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솔데는 문 앞에 서서 짧은 기도를 외웠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헤사벨이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지혜와 인내를 주시고 삶이 빛으로 충만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당신을 섬기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그녀는 단단히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창백한 안색의 아이작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작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지난밤에 본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솔데는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까 하다가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부터 묻기로 했다.
“얼굴에 밀가루는 왜 바르셨습니까?”
그 말에 아이작은 헤사벨을 노려보았다. 그는 거칠게 뺨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이단심문관이 이런 속임수에 속겠냐고.”
“이때까지 다 속았는데…….”
뺨을 닦아내자 창백해 보였던 혈색이 다시 돌아왔다. 이솔데는 아이작이 아픈 척을 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아이작 님은 이미 병약해 보이는 인상입니다.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군요.”
헤사벨이 이솔데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동정표를 사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분위기를 푸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웃는 것을 보니 당장 ‘이 촉수 괴물 놈!’ 하면서 달려들 것 같진 않았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향해 턱짓했다.
“잠깐 나가 있어.”
“아이작 님…….”
“네가 있으면 오해가 더 깊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물러나 있어. 설마 뭔 일이 생겨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걸 네가 막을 수 있을까.”
헤사벨은 투덜거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물러났다. 그녀는 물러나기 전 자기 눈을 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다시 이솔데를 가리키면서 경고했다.
물론 이솔데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헤사벨이 나간 뒤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했는데 고분고분한 걸 보니 역시 아이작 님의 통제를 받고 있군요.”
“예. 제가 기절한 사이 혹시 실례를 범한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의식을 잃기 직전 헤사벨은 이솔데와 싸우기 직전이었다. 헤사벨이 허당 같은 모습을 자주 보이긴 해도 왈라이카 공작의 후계자다.
죽인 사람의 숫자도, 가지고 있는 힘도 이솔데와 비교가 안 된다. 만약 그대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솔데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이다.
“좀 신경 사납게 굴긴 했어도 고분고분하더군요. 아이작 님을 수습하면서…….”
이솔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려다가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른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아이작은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때 많이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일단 교단에 고발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먼저, 그때 그건 어떻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작은 어떻게 변명을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이솔데의 태도를 보고 솔직하게 털어놔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목숨값인지 뭔지 몰라도 이솔데는 아이작을 판단하는 것을 미룬 상태다.
그렇다면 설득의 여지도 있을 터.
“보신바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역시 불사 교단의 사특한 저주에 당해 신체가 변질당하는 중이었던 거군요!”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황급히 이솔데의 눈을 보아하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자신이 이솔데 앞에 촉수를 드러냈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알 두아자드가 열어젖힌 저승문 문턱에서 손이며 눈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기이한 풍경과 함께 흐느적대던 모습.
‘오해할 수도 있으려나?’
아이작은 섣불리 그 말에 맞장구치며 거짓말하는 대신 침묵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솔데의 상상력을 키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거짓말보다 스스로의 상상에 더 잘 속는다.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솔데의 내면을 읽어 버렸다.
그녀는 속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니, 속기를 원한다.
그때 본 그의 모습이 사악한 사제의 저주에 의해 보인 환각에 불과하며, 눈앞의 당신은 온전하고 경건한 성배기사라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녀가 그렇게 믿게 둘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뇨. 그게 제 비밀입니다.”
이솔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영원히 숨길 수 있는가?
아이작은 이번 사태로 자신이 대비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사태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나 사후 세계에서 찾아온 그 노란 옷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솔데를 죽이는 것도 방법이지만, 몇 번이나 생각했음에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이작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솔데가 아이작을 고발하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저는 저주받은 게 아닙니다. 이단심문관님.”
***
아이작은 솔직하게 말했다.
수도원에서부터 이미 촉수가 발현되었으며, 작은 짐승들을 먹이며 성장시켰고, 촉수가 먹은 것 또한 자신의 성장과 생존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계곡에서도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을 막을 때에도 촉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도.
다만, 전부 다 말하지는 않았다. 선택적인 고백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거나, 칼센이나 헤인켈을 먹어버린 일…… 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솔직히 아이작이 포식한 상대 중에는 거리낄만한 상대는 없었다. 모두 짐승 아니면 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인간이면 잡범조차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저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불사 교단의 주교를 퇴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체 모를 신격(神格)의 힘을 빌린 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촉수를 들킨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지만, 이름 없는 혼돈이나 불쾌감을 줄 만한 포식 행위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 없는 혼돈이 쌓은 부정적인 인식은 아이작과 상관없기도 했으니까.
아이작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서만 책임지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그는 이기적인 동기로 행동했으나 악행을 저지른 바는 없었다.
이솔데는 아이작의 고백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해성사를 듣는 사제가 아니다. 오히려 강도 높은 압박을 통해 진실을 쥐어 짜내는 쪽에 가까웠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이 순순한 고백에 낯섦을 느꼈다.
한참 뒤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빛의 법전을 믿지 않는 것인가요?”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에 가깝겠군요.”
신과 기적이 실존하는 세계에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우습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신을 찬양하고 숭배할 생각까지는 없다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수도원장님께서는 제게 믿음의 증명을 수행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믿음이라는 것이 신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행위로만 증명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믿음.
빛의 법전은 보편적 물리 규칙을 ‘빛의 법전’이라는 형태로 가르치고 고정하는 종교다. 말 그대로 보편적 질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 외 다른 모든 신앙들이 어떤 형태로든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질서를 따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보았다.
신앙하는 형태는 다르더라도, 모두 이 세계 자체가 지금 이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는 긍정하니까.
“그러면 기적도…….”
“예. 기적이라 한다면 이게 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이솔데 앞에서 대놓고 촉수를 보여 주었다. 왼손바닥을 가르고 나타난 검붉은 촉수는 손바닥 한마디 넘는 크기로 넘실거리며 드러났다. 이솔데는 생리적인 거부감에 숨을 들이켰지만 즉시 아이작을 불태우겠노라고 선포하진 않았다.
그녀는 거부감을 억누르며 오히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촉수에 닿았다.
촉수는 가볍게 손가락에 휘감겼다. 결코 흉포하지는 않게.
‘이놈도 영악하군.’
아이작은 촉수가 이빨이나 눈동자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잠시 어이가 없었다.
촉수는 이솔데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작의 의도를 따라 결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모습을 어느 정도 감추고 있었다.
이솔데는 잠시 뒤 손을 떼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생각이 복잡한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작도 그녀 입장이라면 적어도 반나절은 아무 말도 못 할 거라 생각하며 기다려 주었다.
다행히 이솔데는 반나절씩이나 걸리지 않았다.
“때때로 신의 기적은 놀라운 형태로 내려오지요.”
아이작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며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구해 고아원으로 보내는 용병, 가뭄으로 굶주리는 곳에 식량을 헐값으로 내놓는 상인,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어머니…… 저는 이 모든 것들 또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촉수도 기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적은 고난에 처한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 그 자체가 기적이기도 하지요. 루앗딘이 가장 낮은 곳을 전전하다 화형대에 올라서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촉수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투였다.
“당신은 이미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해받기 쉬운 ‘그것’과 기적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당신은 선을 베풀고 약자들을 옹호했습니다. 매일 같이 기적을 쥐어 짜내면서도 발밑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제들과 달리요!”
이번에는 아이작이 생각보다 과격한 이솔데의 말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이솔데의 눈은 아이작의 손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만이 아는 어떤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단심문관으로서 활동하면서 봐 왔던 것들.
아이작의 생각과 달리 이솔데의 머릿속은 꽃밭이 아니었다.
“당신이 입으로 빛의 법전을 신앙한다고 떠들어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놈들은 이미 많으니까요. 이미 당신은 지켜야 할 가치와 규율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그녀의 말에 아이작은 아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기적이 아니라 감성으로 때운다는 계획은 이미 그가 해 봤던 생각이지만 이렇게까지 감성 과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논리는 이단심문관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이 정신 나간 이단심문관한테서 발 빼야 하는 거 아냐?’
아이작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빛의 법전 안에서 성기사가 되어 잘 먹고 잘살기다. 지금 잘 되어가는 와중에 이솔데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솔데가 이렇게까지 과격분자였다니…….
“이단심문관님, 잠시 진정하시고…….”
그러나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더욱 강하게 덥석 쥐면서 말했다.
“아이작 님, 당신은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빛의 법전께서 보낸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
‘돌겠군.’
이솔데가 돌아간 뒤, 아이작은 그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솔데가 평범한 이단심문관으로서의 행보를 보이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게벨이 노골적으로 싫어할 정도로, 이단심문관의 악명은 높았다.
하지만 이솔데는 상당히 진솔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다지 이단심문관에게 어울리는 덕목은 아니다.
아이작은 그것을 그녀의 가문 때문에 ‘때 안 타는 일’만 시킨 이단심문관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솔데를 본 아이작은 생각이 달라졌다.
‘개혁파군. 그것도 상당한 급진개혁파.’
귀족들은 교단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있다.
그중 브란츠 공작가는 신심이 깊은 귀족 가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만의 의지일까?
아이작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다. 교단이 급진 개혁된다면 누가 이득을 볼까.
‘황제파 귀족들의 의중이 섞여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교단에 실망해서?
이솔데가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교단의 개혁을 바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솔데가 아이작을 고발하지 않고 믿기로 한 것처럼, 아이작도 그녀를 믿고 싶었다.
실용적인 이유로든, 개인적인 이유로든.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주문으로 사후세계가 범람해 오던 때를 떠올렸다.
세계가 무너지고 경계가 흐트러질 때.
그의 몸마저도 혼돈으로 가득 차 촉수가 흘러넘쳐 나올 때.
오로지 이솔데만이 무너지지 않고 그를 다시 질서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힌트가 되리라고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