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08)
0108 ———————————————-
암천향(暗天鄕)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갑판으로 나갔다. 동이 트기 직전의 갑판은 시원하고 알 수 없는 경건함이 감돌고 있었다. 코끝에 바다냄새가 실려오기에 나는 멍하니 바다를 주시했다.
‘ 자연과 시인(詩人)은 어울릴 수 없다고 하던가.’
흔히들 시에서 자연을 표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시인은 뛰어난 산수(山水)를 묘사하는 게 업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자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것이 시인이든 천재든간에 그저 압도될 뿐, 시상같은 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자연은 그렇게 가벼운 존재도 아니었고, 풍광을 묘사하는 걸로 족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외경(畏敬)할 무언가일 뿐이다.
시가 표현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人間)이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을 즐길 수는 있어도 거기에 매몰될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명시(名詩)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사를 적나라하고 우아하게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시는 인간을 초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가 보았던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의 역자가 뒷받침했던 말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환영(幻影)이 보인다.
무언가의 인영(人影)이 어두운 갑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는 백의(白衣)의 그 인영에게서 알 수 없는 서기(瑞氣)를 느꼈고, 이내 청량한 기운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 환영은 나를 향해 말했다.
[ 천둔(天遁)이란 하늘에서 스스로를 감춘다는 걸 의미한다.]촤르륵
환영의 면전에 환상처럼 검(劍)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 검은 딱히 손에 들려있지 않은데도 허공에 홀로 고고히 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검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검극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뿜어져나오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 리(裏)의 의미는 다르다. 감추어버린 본질을 이용해서 허용되지 않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둔(遁)이다.]“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 너도 짐작하겠지만 나는 검선(劍仙) 여동빈의 검령(劍靈)이다.]검령!
지고한 신선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술법의 극치였다. 신선이 직접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마치 물에 비친 달처럼 투영시키는 술수였다. 자신의 검령을 매개체로 검선 여동빈이 간접적으로 내게 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여동빈의 검령이 말을 이었다.
[ 이 주변을 바라보아라. 여명이 동터올 때인데도 해수면에 짙은 안개가 한없이 흐르고 있다. 강대한 존재가 그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말대로, 단순히 해가 밝아오기 전의 새벽어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게다가 운해(雲海) 마냥 뭉클거리는 안개 때문에 시정도 여의치 않았다.
여동빈의 검령이 말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절박한 위기인 듯 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익혀 보죠. 하지만 초식부터 배우려면 좀 시간이…”
[ 천둔검법은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초식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초식이 없는 무공이라니, 그런게 어디 있는가!
초절정고수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 의념(意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도달하면 초식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고는 들었지만, 시작부터 초식이 없는 무공은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경지와 무공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여동빈의 검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 잘 들어라. 천둔검법에는 초식 대신 요결(要決)이 존재한다. 그 요결을 실천해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다음 요결로 넘어가는 식이다.] “요결이라…”[ 첫 요결은 신(信)이다. 너는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
그 순간, 여동빈의 검령에게서 검(劍)이 발출되었다. 마치 어검술(御劍術)처럼 발출된 검은 내가 막을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 검은 정확하게 내 심장을 꿰뚫었지만 고통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고, 그 대신에 머릿속에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청량감이 터져나오는 듯 했다.
이건 뭐지?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 같다.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느끼고 생각하던 범위가 더욱 넓어지면서 생각의 폭이 뒤바뀌어버린다. 아득한 현기 때문에 내가 비틀거리고 있을 때 검령의 마지막 말이 귀에 새겨졌다.
[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그것이 천둔검법에 입문하는 방법이다.]사아앗
내가 그 말을 고민할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주변의 공간이 격하게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숨소리조차도 느릿하게 움직였던 공간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아마도 여동빈의 신기가 느리게 만들었던 시간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리라.
쿠구구구…
느긋하게 해풍을 타고 나아가던 배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개의 기운은 더더욱 짙어지더니 종래에는 어둡고 몽환적인 안개가 배 주변을 가득 둘러쌀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명백한 이상현상이었기에, 배의 위에서 경계를 서던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큰일이다!!”
땡 땡 땡 땡….
그가 경계용 징을 크게 울려댔다. 그러자 잠시 후 선원들은 물론 함께 탄 상단호위무사들과 대룡상회주, 서궁표국주도 안에서 뛰쳐나왔다. 경계용 징을 이토록 빠르고 강하게 울리는 경우는 굉장히 큰 위급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룡상회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선원은 정말로 놀랐는지 그의 말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선장에게 뭔가를 빠르게 말하는 듯 했다. 선장은 한참동안 듣고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대룡상회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큰일입니다. 무풍(無風)지대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뭐라고? 무풍지대?”
“네… 이 안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현재 바람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대룡상회주가 벌컥 화를 냈다.
“선장, 나를 바보로 아는가? 나 또한 수십년간 이 무역업을 하면서 해양지식과 경험을 쌓았어! 내가 무풍지대가 멀리 대양(大洋)의 특수한 몇몇 지역에서만 생긴다는 걸 모를 줄 아는가? 고금 이래로 황해바다에 무풍지대가 생긴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여기는 무풍지대가 생길만한 항로가 절대 아니라는 말이야!”
대룡상회주는 단순히 체격이 뚱뚱한 돼지가 아니었다. 이 무역업에 있어서 굉장한 전문가였으며 선장에 버금가는 지식과 경험의 소유자인 것이다. 선장도 그 사실을 알고있으며 논리정연한 말이었기에 딱히 반박을 못했다.
“그, 그렇습니다만… 절대 생길 수가 없습니다만…”
선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뭐라 설명드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현재 바람이 완전히 멈춘 건 사실입니다.”
“으으… 그리고 이 안개는 또 뭐란 말인가?”
“해무(海霧)가 일어난 것 같은데 정말 묘한 일이군요.”
“뭐가 묘하다는 말인가?”
선장은 눈치를 보다가 설명했다.
“해무는 따뜻한 기류와 차가운 기류가 교차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해무가 생긴다는 건 당연히 해풍(海風)이 불만한 여건이 된다는 것 또한 의미하죠. 해무가 생기는 지역에서는 바람이 당연히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궁표국주가 침음성을 흘렸다. 선장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으음… 해무와 무풍지대는 공존할 수 없다는 거군.”
“네. 무풍지대에서 생존한 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지역은 해무는 커녕 수평선이 똑똑히 보일 정도로 쾌청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그 모순(矛盾)이 일어나 버렸으니…”
“……”
우두머리들은 다들 침묵한 채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혼란스러워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무풍지대라는 게 왜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배가 거의 나아가지 않는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하루종일 100장도 못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을수록 식량이 떨어져서 종래에는 처참하게 전멸할 가능성이 있었다.
선장이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동이 터 오면 해무가 조금 걷힐지도 모릅니다. 우선은 선원들을 대기시키고 유사시를 대비하겠습니다.”
“그러지. 우리도 갑판에서 상황을 보고받겠네.”
“네.”
아침새벽인데도 사람들이 침묵의 안개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새 내게 다가온 서문혜가 말을 걸어왔다.
“소협.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소.”
내공을 끌어올려서 뇌운장이나 펑펑 쏴대면 안개가 조금 떨쳐지긴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배 자체가 안 움직이는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크게 내 내공으로 장력을 쏘아내서 그 반동으로 배가 움직이게 할 수는 있다. 아마 그게 무풍지대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그 방법을 진언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건 이유가 있었다.
여동빈의 검령이 굳이 내 앞에 현신해서 경고를 했다.
그리고 천둔검법으로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이 무풍지대와 해무는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나를 노린 함정인 것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큰일 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굳은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자 서문혜가 말했다.
“소협. 저는 언니들과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게 좋겠소. 잘 부탁드리겠소.”
“네.”
서문혜가 선실 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다시 한 번 여동빈의 검령이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 보았다.
‘ 믿으라고?’
다짜고짜 믿으라고 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안개의 갑판 위에서 경계를 하면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선실에 들어가면 대응이 늦을 것 같았다.
……
그렇게 안개 속에서 약 한 시진이 흘렀다. 벌써 해가 떠오를 시간은 훨씬 지났건만, 여전히 사위가 불분명한 어둠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안개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도 한 줌 느껴지지 않아서 불길한 적막감이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이렇게 음산한 바다는 처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선원들의 눈에도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보였다. 선원들은 자연현상 하나하나에 목숨을 위협받기 때문에 지금같은 이변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개 중 몇몇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욕지기를 흘리기도 했다.
‘ 사기가 떨어진다.’
선원 뿐만이 아니라 한켠에 모여 있던 선장, 대룡상회주, 서궁표국주의 얼굴에도 짜증과 불안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해가 뜨지 않는다면 슬슬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법이라고 해도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이 큰 배를 노를 저어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가만히 멈춰있으면 식량이 떨어진다. 보통 상선에 비축되는 식량은 딱 상행을 끝마칠 정도의 식량에서 7일 분을 더 넣어두는 게 보통이었다. 즉, 앞으로 7주야가 지나면 우리는 끝장나버린다는 뜻이었다. 선상반란이 일어나서 인육을 먹으려고 선원들이 날뛸 가능성도 있었다.
대룡상회주가 말했다.
“영문을 모르겠어… 이 항로는 늘 지나다니는 곳이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지.”
그 때였다.
쿠오오오 –
어둠의 저편에서 마치 거대한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선명하면서도 강렬하게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린 듯 했다. 나는 또 마물(魔物)이 나타났나 싶어서 바로 창을 꺼내들었는데,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으, 으으…”
“으아아아…!!”
털썩 거리며 선원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저마다 공포에 질린 안색으로 헛소리를 하거나, 바닥을 쾅쾅 쳐 대거나, 혹은 머리를 감싸쥐고 구석에 박히기 시작했다. 내가 옆을 보자 선장이나 대룡상회주 서궁표국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은 이미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어윽, 억, 억…”
“히익… 안돼… 다 죽을거야…”
“으아아아…”
몇몇은 비명을 지르다가 구토를 해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황당해서 대룡상회주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십쇼! 갑자기 왜 그래?!”
“히익… 아… 아냐… 제발… 으 머리가…”
아까 전까지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견명하게 앞일을 생각하고 있던 대룡상회주였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은 마치 술을 몇 병이나 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된 고주망태급이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가슴이 덜썩거리는 걸 결코 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한 순간에 배가 마비상태가 되었다!
나는 급히 다른 배 쪽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그 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용없어. 보통 인간은 이 마기(魔氣)를 이겨내지 못해.”
“너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어제 저녁에 내 앞에 나타나서 난데없이 욕설을 퍼붓고는 고급술법으로 사라졌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까딱 하고 안개 쪽을 가리켰다.
“봐. 안개 자체가 술법이야. 인간의 미혹(米惑)을 강화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는 안개의 술(術)이지. 거기에 방금 울음소리를 내뿜은 놈의 마(魔)가 워낙 강렬해서, 인간이 버티는 게 이상한 일이야.”
“…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흐응. 그런데 너는 정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구나. 순수요괴조차도 너처럼 태연할 수는 없는데 대단하구나. 과연 이번 시련에는 의미가 있겠구나.”
뭔가 혼잣말을 하던 여자아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나는 미호(美狐)라고 해. 잘 부탁해 백웅.”
“……!!”
나는 깜짝 놀랐다.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예전에 즐겨 둔갑하던 때와 닮은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미호라고 칭하며, 고급술법을 시전하는 존재, 그것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미호오오오!!”
“에에엑?!”
나는 미호를 거세게 껴안았다. 그리고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
“미안, 미안해…”
미호는 난데없이 내가 달려들어서 울며불며 껴안자 당황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통 인간은 그녀를 수상하게 여겨서 경계해야 정상일 텐데 이렇게 껴안는 건 예상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미호는 함께 모험했던 동료이며, 나를 구해주기도 한 은인이기도 하며, 마지막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줬던 존재였다. 나는 아직도 그 상황을 혼자 힘으로 타개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분노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런 미호가 전생(轉生)을 거쳐 내 앞에 다시 살아서 서 있다.
이 기쁨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인간. 떨어져라.”
쉬리릭
당황해하던 미호는 전이술로 벗어나서 일 장 밖에 나타났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정녕 미친 놈인 게냐? 이 상황에 내게 무방비로 달려들어서 울다니, 정말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냐?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약간이지만 미호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미안…”
“본녀는 네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만 해라.”
미호가 정색을 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넌 혹시 서왕모의 시련때문에 온 것이냐?”
“흐흥, 역시 뭔가 짐작가는게 있나 보군. 그럼 내 정체도 알고 있겠구나.”
“그래. 서왕모의 곁에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왔고 동영 땅에서 천황을 홀리고 있는 구미호(九尾狐)지.”
미호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웅. 설마 네가 서왕모께 내 일을 말씀드린 것이냐?”
“그래.”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구나.”
“나도 말해주고 싶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야할 게 있어. 네 시련이라는 게 혹시 나를 도와주는 건가?”
내 질문에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지금부터 10년 동안 너를 지키며 도와주는 게 나의 시련이다.”
“그리고 그 시련이 끝나면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거겠지.”
“흐흥… 너는 꽤 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그럼 됐어. 상황이 보다시피 그다지 좋지 않으니 나를 좀 도와줘. 이거 어떻게 하면 좋지?”
“그래, 그리 넉넉한 상황은 아니구나.”
중얼거리던 미호가 말했다.
“안개 너머에 술법의 근원인 주술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방금 울음소리를 토해낸 괴물놈이 한놈 다가오고 있다. 그 두 놈을 해치우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놈이라고?”
“시간이 없다. 반 식경 내에 어찌 할지 결정해야 한다. 너는 어떻게 대응하겠느냐?”
그렇게 묻는 미호의 눈에는 상당한 호기심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굉장히 이질적이고 독특한 인간일 것이고, 이 위기를 빌어서 나를 시험해보고 싶을 것이다. 평소에 제멋대로 파천황처럼 행동하던 미호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호. 네 실력이라면 안개 너머의 주술사를 없앨 수 있겠지?”
“그야 물론이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감넘치는 미호의 대답에 나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족의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격외의 존재가 아닌 이상, 미호는 크게 겁내지 않을 것이다. 요괴 또한 반마(半魔)라고 할 수 있기에 마기에 저항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호는 중원, 반도, 동영을 아우르는 대요괴급이었기에 저정도의 자신감은 되려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주술사를 없애 줘. 그 때까지 내가 이 배의 사람들을 괴물에게서 지키면서 보호하겠어.”
“괜찮겠느냐?”
“그래. 네가 주술사를 없애면 아마 괴물의 움직임이 굼떠지거나 소멸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알았다. 그럼 조심하거라.”
휘리릭!
미호는 공중제비를 넘더니, 갑자기 기이한 날틀을 소환해서 서서히 배 바깥으로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저걸 이용하면 공중을 부유하듯 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마니산에서 쫓길 때 저걸 소환하지 않은 이유는 별로 빠르지가 않아서 호법사자에게 따라잡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안에 있던 서문혜를 불러내었다. 서문혜는 나를 따라서 갑판에 나오자 마비상태가 된 배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나는 서문혜에게 말했다.
“빨리 사람들을 안에 집어넣고 대비해야겠소. 곧 거대한 괴물이 습격해 올 것이오.”
“괴물이라고요?”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알았어요.”
우리는 재빨리 갑판에 널부러져있던 사람들을 선실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갑판에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쿠우우…
어둠의 바다 속에서 무언가가 헤엄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굼실대며 일그러진 기운을 내뿜던 ‘그것’은 잠시 후 안개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었다.
“……!!!”
나는 안개 속에 윤곽이 드러난 ‘그것’을 보자 놀라서 검을 떨어뜨릴 뻔 했다.
“저… 저 놈은.”
반투명하고 거대한 무언가!
소보다 몇 배는 덩치가 거대한 괴물이 마치 도마뱀 비슷하게 투명한 몸뚱이를 늘어뜨리고는, 반투명한 날개같은 것을 퍼덕거리는 모습. 게다가 물에도 익숙한지 살짝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강장(飛腔腸)!!”
과거 금의위에서 칠요의 힘으로 소환했던 마물이자, 나를 죽였던 괴물이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이다.
비강장은 천천히 질척거리는 몸을 들어서 갑판 위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인 나와 서문혜가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치 진홍색으로 일렁이는 듯한 눈을 번득였다. 붕붕거리는 풍압이 비강장의 팔다리 같은 촉수 근처에서 맴돌았다. 결코 자연에서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끼루루룩
마치 갈매기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비강장이었으나 나는 골치아픔을 느꼈다.
‘ 빌어먹을…’
본능적으로 이 비강장은 과거에 상대했던 일개개체보다 훨씬 강력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경우 저 놈은 대부분의 물리력을 투과할 수 있기에 내 대부분의 공격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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