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161)
1158====================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망량의 말에 잠시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외신? [기어오는 혼돈]?
‘역시…. 낙양에 봉인된 건 그 놈이었어.’
신투지존의 인생을 농락한 자.
항우의 인생을 농락한 자.
아니…. 이 세계 전체를 농락한 궁극의 절대악(絶對惡)!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수십 번이나 전생하면서 그 정도 하나 유추하지 못할 리는 없다. 삼황오제보다 더한 잠재력을 지닌 듯한 망량선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봉인하려 하는 존재가 보통 거물이 아니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망량의 입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일 뿐이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왜 그 놈의 봉인이 1년 후에 풀린다는 거요? 아무런 전조도 없었는데 너무 갑작스럽잖소.”
“…….”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망량이 말했다.
“외신을 상대할 방법을 말해 주시오. 그것이 이번 99층의 시련이오.”
“망량, 당신 정말….”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망량을 바라보았다. 설마했는데 그는 진짜로 내게 외신 [기어오는 혼돈]을 상대할 방법을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99층을 통과시켜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제길.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지금도 그걸 찾으려고 여행중인데!’
아니 망량이라면 최근까지 내 흑요석을 받아들여서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 당연히 뛰어난 지력의 소유자인 망량은 현 시점에서 방법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내게 저런 불가능한 시련을 통과할 방법을 말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일단 냉정하게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그걸 말하기 전에 일단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내가 99층에 올라온 이상 98층에서 항우가 아군들과 드잡이질 하는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오. 여와와 소통하고 있다면 그녀에게 항우를 멈춰달라고 해 주시오.”
“…일리있는 말이군. 이리 된 이상 백웅의 힘을 더 시험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는 충분히 자신을 증명했소.”
마치 망량은 누군가에게 호소하듯 허공에 외쳤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허락받았소. 기다리시오.”
우웅
망량의 몸 주위에 떠 있던 명계의 유물들 중 하나가 거대한 파장을 내뿜었다. 그러자 잠시 후 파장이 허공으로 휩쓸려서 사라졌고, 망량이 그 허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여와는 항우의 폭주를 멈추었소. 지금은 소강상태겠군.”
“나머지 동료들도 99층으로 올라오도록 해 주시오.”
“아니될 말. 99층에 자력으로 올라온 건 당신 뿐이며, 내 시련에 대응할 자격이 있는 건 당신 백웅 뿐이오.”
“…….”
“어차피 사람이 몰려있다 해서 이 지혜의 시련을 해결하기 쉬워지는 것도 아닐 터….”
칼같이 내 부탁을 끊어버린 망량이 다시금 백우선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대답하시오. 1년 후 봉인에서 풀려날 [기어오는 혼돈]을 어찌 상대할 생각이오?”
“큭.”
제길…. 정말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하려니까 죽을 맛이구만!
하지만 이런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나는 일단 퉁명스럽게 망량에게 대꾸했다.
“그걸 대답하기에 앞서서 먼저 상황부터 알려줘야하지 않겠소? 지혜의 시련이라면서 앞뒤 다 자르고 질문만 하는 게 말이 되오?”
“어떤 상황을 말해 달란 것이오.”
“아까 처음부터 물어봤잖소. 왜 1년 후에 봉인이 풀리는 건지 말해주시오. 지금까지 망량선사가 결계와 동화하면서까지 버티려 했는데 갑자기 어찌된 일인지.”
“그렇군. 결국 그걸 말해줄 수밖에 없겠군….”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망량이 말했다.
“백웅.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터인데 정신을 집중해 주시오.”
“물론이오.”
“그간 전생하면서 우리가 제일 애매하게 여겼던 게 있지 않소? 바로 여와와 태허천존의 관계 말이오.”
“…그들은 협력관계라는 걸로 알고 있었소만.”
“그렇소. 종말 전까지는 그러했지.”
망량이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와는 복희가 봉인된 시점에서부터 쭉 소극적인 태도였소. 여와는 이 세계를 구하겠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복희를 보호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소. 그런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 아슬아슬한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그걸 위해서는 강압적으로 약한 자들을 짓누르려 했지. 그런 여와의 태도가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이었던 홍균도인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고대에 삼청이 죽거나 봉인되는 참사의 원인이 되었소.”
“…….”
“허나 홍균도인이라 했던 그 존재는 어찌된 일인지 오랫동안 존속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허천존]이라는 존재로 바뀌었소. 그 때 여와는 큰 혼란을 겪은 거였지.”
나는 그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바뀌었다고?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정말 처음 듣는 얘기다. 망량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와 본인에게 들은 이야기요. 본디 여와는 홍균도인에게 천계 지배자의 자리를 주고 공동관리하려 들었으나 홍균도인은 하루아침에 소멸되고 그 대신에 태허천존이라는 존재가 하루아침에 나타나 있었지. 문제는 태허천존은 홍균도인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었고 별개의 인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성]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심지어 기억을 공유하지도 않아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텅 비어있었지.”
“뭐, 뭐라고….”
“그 탓에 홍균도인의 빈 자리에 임시로 삼황오제의 일인인 요순이 직접 화신을 보내어 옥황상제란 이름으로 관리하게끔 된 거였소. 태허천존은 잠재력은 막강했으나 도저히 지배자의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천계 고대의 진실이오.”
나는 망량에게 외쳤다.
“[각성]이라고? 태허천존이 각성하면 홍균도인처럼 고대에 삼청을 소멸시킨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이 된다는 말인 거요?”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오.”
“대체 그 놈의 정체는….”
“화신으로 각성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본질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며, 점차 깨어나는 상태인 존재…. 백웅 당신은 외우주에서 이미 그런 존재를 마주친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오.”
“……!!”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가면]!!태허천존이 [기어오는 혼돈]의 가면이라고 한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물론 이건 지금까지도 우리가 대충 예측하고 있었던 가능성이었으므로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진짜 소름이 끼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이… 이해가 가지 않아. 홍균도인이 가면에서 화신으로 격상했다면, 그 압도적인 힘으로 삼청(三淸)을 소멸시켰다면…. 어째서 굳이 소멸했다가 태허천존이라는 가면으로 모습을 바꾼 거요? 이미 이긴 싸움에서 대체 왜….”
“…….”
망량은 그 순간 참혹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저 재미 때문…이겠지.”
“뭐?”
“…어찌되었든 그리하여 여와는 태허천존이라는 존재를 방치한 채 서왕모라는 이름으로 천계를 경영하기 시작했소. 홍균도인을 계승한 것 같지만 인격도 성향도 다른 존재에게 섣불리 가까이 갈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 여와는 그런 식으로 되든 안 되든 종말까지 불안정한 세계를 버티어가려 했으나, 당신도 알다시피 흉신(凶神)의 저주가 500년전 덮쳐오면서 상황이 달라졌소.”
“여와도 그 때 큰 피해를 입지 않았소? 어째서 지금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마냥 설쳐대는 것이오.”
“그 저주는 [혼돈] 성향을 지닌 오제(五帝)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질서]에 가까운 삼황에게는 피해가 반감되었소. 여와도 복희도 신농도 상당한 피해는 입었지만 치명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지. 처음부터 그런 저주였던 것이오.”
“……?”
나는 망량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흉신은 삼황오제를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하지 않았소? 왜 그런 애매한 저주를 발휘한 것이오.”
“삼황은 이미 종말에 발휘하는 영향력이 별로 없기에 딱히 흉신의 적수가 아니니까…. 복희가 봉인된 시점에서부터 흉신은 삼황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소. 진짜 적수는 황제 공손헌원 하나뿐이었기 때문일 거요.”
“황제 하나라고? 그럼 황제에게만 저주를 집중시키면 될 텐데 왜 오제에게….”
“그건….”
망량은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여와는 그 때 피해를 입었으나 치명적이진 않았소. 충분히 종말 전까지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정도였지.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크게 다친 척 구천현녀에게 천계의 실권을 넘겨줘버렸소. 왜냐하면 천계와 인간계를 차단시킨다는 발상이 여와에게 좋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소.”
“왜?”
“종말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길함만 감도는 인간계와 붙어있을 경우 여와는 복희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오. 차라리 거리를 떨어뜨리고 태허천존을 인간계에서 격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천마(天魔)의 출현 이후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을 거요.”
“…….”
“그렇게 오백여 년이 지났으나…. 얼마 전부터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오.”
망량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바로 당신이 산하사직도에서 귀환한 직후부터.”
“…뭐?”
“그 때까지 천계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고 있던 태허천존이 당신이 귀환한 바로 그 날, 서왕모를 찾아와서 의사를 밝혔던 거요.”
이어진 말에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앞으로 낙양의 결계를 탈출하겠다고…. 그리고 그 말이 끝난 즉시 태허천존은 천계에서 실종되었소.”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지금 태허천존이 어딨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요.”
태허천존의 행방을 물어도 애매한 대답밖에 하지 않길래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날 현허궁주인 내게 서왕모가 즉시 접촉했었소. 나와 당신이 밀접한 관계인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여와가 상황의 대처법을 주문했고, 나는 모든 지혜를 짜내어 서왕모와 거래를 했소. 그리하여 나는 99층에 미리 시련관으로 내정된 것이고 당신이 여기에 올 때까지 암중에서 흐름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된 거요.”
“무, 무슨 그런.”
나는 황당해서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게 말해줘야 했을 거 아니오! 중간에 내가 급작스럽게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던 거요? 중간에 죽었으면 바로 29번째 삶이 시작됐을 건데 아무것도 모르고 죽을 뻔 했잖소!”
지금까지 죽을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소한 세네 번은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온 건 실력이라기보다 운에 가깝다.
그런데도 망량이 내게 속을 털어놓지 않고 이렇게 음흉한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자 망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오. 허나 여와는 모든 걸 비밀로 하길 원했고, 그 보상으로 내건 조건이 너무 막대했소. 나로서는 당신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와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소….”
“미친… 대체 무슨 보상이길래.”
“그건 당신이 99층의 시련, 천계의 탑을 깨는 즉시 얻게 되는 보상. 아직 말해줄 순 없소….”
“망량. 실망이오. 당신이 이렇게 나를 배신할 줄은.”
나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망량이 절대 내게 뭔가 숨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끝까지 신뢰하며 왔는데 이럴 수가?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몰아치듯 외쳤다.
“99층까지 정찰가겠다고 했던 건 이런 뜻이었소? 당신이 99층의 시련관이니까 그 전까지는 다 돌아볼 수 있다는 뜻이었던 거요?”
“…그렇소. 그럴 권한이 있었으니.”
“99층에 [옛 지배자]가 출현할 거란 건 또 무슨 헛소리였소! 처음부터 다 알면서 날 농락했던 게 아니오!!”
“그 전까지 지상최강급 존재들이 계속 출현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긴장감을 주려 했소. 여와는 이번 시련에 모든 걸 걸고 있으니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 거라 여겼소. 실제로도 무한의 힘을 지닌 항우같은 게 나와버렸지 않소.”
“빌어먹을!! 죄다 변명이오! 그런 걸로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그런다고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거요?!”
내가 울부짖자 망량은 움찔하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할 말이 없소. 허나 이것만은 약속하겠소. 이 시련을 뚫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최소한의 가능성을 얻게 될 거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대꾸했다.
“당신의 약속을 믿기 힘드오.”
“…….”
“차라리… 이러느니 도중에 죽는 게 나을 뻔 했군.”
진심이다. 망량에게 이토록 배신당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다음 생부터도 망량에게 내 모든 목숨과 신뢰를 맡겨야 할 텐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망량조차도 손이득에 따라 내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느껴버렸으니 신뢰를 갖기 힘들어져버렸다.
내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자 망량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질문하겠소. 태허천존이 예고한 [기어오는 혼돈]의 탈출시간은 정확히 일 년이 남았소. 만일 외신이 탈출한다면 어떻게 그 자를 막겠소?”
“…….”
대답하기 싫다.
하지만 저건 시련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이 생을 살아가는 한 대답해야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회피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망량선사가 최선을 다해도 막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오?”
“그렇소. 현재의 태허천존은 모종의 이유로 [화신]으로 각성한 상태가 분명하오. 과거 삼청을 멸하던 홍균도인의 위력을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바깥에서부터 결계의 파괴를 이끌게 되면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소.”
아마 그럴 것이다. 그저 종말이 가까워져가는 것만으로도 망량선사가 전력을 다해서 결계를 유지하는 상황인데 화신이 바깥에서 호응해서 결계를 부수려 하면 답이 없으리라.
“기간 내에 칠요를 다 모아서 황제에게 소원을 비는 방법도 안되오?”
지금의 전력이라면 칠요를 석 달 내에 다 모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 말에 망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당신은 산하사직도에서 보아서 알고 있을 것이오…. 가재는 게 편 아니오?”
“아.”
“또한 설령 다른 편이라 하더라도 황제조차도 그 존재에 비하면 격하의 존재에 불과하오. 하위존재가 어찌 상위존재의 발걸음을 막겠소? 그저 동조하며 세상의 멸망에 순응하게 될 뿐이오.”
“…그렇겠군.”
“지금부터는 ‘혹시나’ 하고 제시하는 방법은 듣지 않겠소. 단 한 번만 내게 [기어오는 혼돈]을 막을 해법을 제시해 주시오.”
망량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내게 제시하는 해법이 아니오. 여와 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
“당신은 전생자로서 그녀를 설득해야 하오. 본디 오만한 여와는 한 마디도 듣지 않을 테지만, 당신은 산하사직도에서 [굴레]를 바꾸어버림으로써 그녀에게 최소한의 믿음을 주었소. 지금이 마지막 기회요.”
그렇구나.
나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망량은 내가 여와에게 옳은 해답을 준다는 걸 믿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 자원한 건가.’
지금 내가 말하는 대상은 망량이 아니다. 망량을 통해서 여와에게 내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며, 망량은 그 매개체에 불과하다. 그리고 망량은 매개체로 서는 대가로 여와에게서 내게 도움이 될 뭔가를 약속받은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내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 자리로 끌고오려고 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망량에 대한 배신감은 아직 식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망량 뿐만 아니라 무수한 다른 동료들의 마음과 미래가 내 어깨에 달려있는 상황이다.
“…….”
나는 어찌해야할지 크게 고민하다가 일단 망량에게 질문해보기로 했다.
“망량. 질문 하나만 하겠소.”
“하시오.”
“여와는 진공가향을 원하지 않소?”
망량은 예상대로라는 표정을 지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복희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겐 큰 의미가 없는 문제요.”
“…그렇군.”
“당신이 구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따라서 여와의 대답도 달라지게 될 것이오.”
망량의 말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망량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서 결정지은 해답을 말했다.
“남은 1년 동안 [만신을 파괴하는 자]를 부활시키겠소. 그리고 그 자를 호법으로 세워 [진정한 진공가향(眞空家鄕)]을 달성하겠소.”
산하사직도 내에서 복희가 내게 제시했던 그 해답.
비록 모든 것이 멸한다는 게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외신이 부활하여 모든 것이 영겁의 고통 속에서 계속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리라.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는 가장 현명한 존재였던 복희의 이 대답보다 나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이번 삶의 해답은 복희의 것이어야 한다.
복희가 바로 이번 삶에서 가장 큰 변환점을 만들었으니까.
1년이라면 꽤나 시간이 촉박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 말에 망량은 미소를 짓는 듯 했다.
“…왠지, 그리 말할 것 같았소. 당신은… 달마와 닮았으니까.”
“옳은 대답이오?”
“그걸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오.”
망량이 스윽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다.
“전생자는 결정하였소. 남은 건 당신의 대답이오, 시조신 여와!!”
쿠구구궁!!
그 순간이었다. 99층의 모든 것이 깨지고 무너지더니 모든 것이 총천연색의 혼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공간이 무너지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마치 궁궐의 전당같았던 풍경이 완전히 무너져서 상하좌우가 존재치 않게 되었고, 나는 혼돈 속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스스스…
잠시 후 은빛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전방에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그 존재는 바로 시조신 여와였다.
여와는 내게 말했다.
[전생자여…. 네가 택한 것은 그저 멸망의 방법을 다르게 하는 것일 뿐…. 억조창생이 멸(滅)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을지언저. [만신(萬神)을 파괴하는 자]를 부활시킨다는 건 그런 의미이다.]“…….”
[너는 인간의 세상과 문명에 큰 애착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을 사랑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택하는데 망설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머릿속에 대웅제국의 무수한 인간들이 스쳐지나갔다.
500년 후의 세계에도 온갖 인간들이 존재했고, 그들만의 삶이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할 것이다.
내가 행하는 멸망이란 그들의 행복을 짓밟는 것 – 그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리라.
“…있어.”
머릿속에 미래의 백련교에서 수련하던 어린 수련생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미래도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여와에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된 삶 속에서 영원토록 농락당할 뿐이라면, 차라리 이 세상을 죽여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해답이다!”
[…….]“설령 진공가향을 달성할 수 없을지라도, 그 존재라면 [기어오는 혼돈]에게 대항할 최소한의 힘은 갖출 수 있을 거야!”
달마의 뜻을 이어받은 지금의 내게 망설임은 없다!
아직은 준비가 부족한 감도 있지만, [진정한 진공가향]을 달성하기만 한다면 그런 건 무의미해! 할 수 있다면 이번에 해 버리자!
[…과연…. 그래서 복희는 네게 염원을 걸었던 것인가…. 그 파격적인 생각….]여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그러더니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새로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너에게 도박을 걸 만 했구나….]뭐?
여와가 잠시 후 양 손을 뻗더니 말했다.
[그럼 그대를 초대하겠다…. 복희가 봉인된 태고의 꿈 속으로.]파아아앗!!
잠시 후, 나는 어디론가 순간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환한 빛 속에서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오랜만이군, 백웅.”
삼황(三皇) 복희가 인간의 모습을 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