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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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망량선사의 말에 니알라토텝은 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침묵하다가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나는 약간 당황했다.
“왜 나한테….”
“선택하기 싫어? 싫으면 내 맘대로 결정하지.”
“아니아니, 잠깐만!”
나는 아차싶어서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잠깐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큰 결정의 선택권이 내게 온 거니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장내에 있던 세 존재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했고 나는 약간 부담스러운 압박감에 시달렸다.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 손톱을 깨물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고는 망량선사에게 말했다.
“망량선사! 승천자 중 한 명을 해방한다는게 저 2명 중에 한 명을 해방하라는 말이냐?”
옥좌의 바로 앞에는 예전에 봤을 때처럼 두 명의 의문의 존재가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망량선사가 말한 승천자는 아마 저 두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야.”
[두 명이 아닐 수도 있지.]응?
뜻밖의 말에 내가 멍해있자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네 지혜로 이 거래를 따지려 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그 경중을 따질 수 없으며, 난마처럼 얽힌 인과율의 실타래를 일언에 풀어버릴 순 없으니.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감에 맡기는 것뿐이다.]“으윽….”
[네 생각처럼 정답이 정해진 거래는 아니라는 걸 말해두마. 단지 나는 승리했을 때의 보상을 더 높게 받기로 했을 뿐.]모호한 말투였다.
‘흐음…. 말하자면 도박판에서 판돈을 올렸다 이 말인가?’
나는 예전에 도박장에 가본 경험으로 더듬어서 망량선사의 말속 뜻을 유추해보았다. 그리고 판돈에 비유하자 상황이 얼추 맞는다는 걸 깨닫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니알라토텝에게 말했다.
“야! 만일 너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같냐?”
“후후후…. 그때그때 마음이 달라져서 모르겠군.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내 입장에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왜?”
니알라토텝이 자못 우아한 손짓을 하며 망량선사를 가리켰다.
“곧이어 종말의 계시가 이뤄지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도 나의 승리는 필연. 가만히 있어도 이기는데 뭐하러 저쪽의 승리보상을 올려 주지? 내 리스크만 늘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지.”
“아.”
“그래서 네게 선택을 맡긴 거다. 그게 더 재밌을 거 같았거든.”
“…….”
왠지 모르게 저 놈의 속내가 느껴진다. 자신의 변덕에 맡기고 선택하더라도 혼돈 그자체인 놈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그건 놈에게 있어 [작위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명백한 리스크를 재미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인다는 부자연성이 놈의 [재미]라는 미학에 반대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신의 관점으로 유불리를 판단할 수 없는 내게 그 선택을 떠맡기는 게 더 재밌으리라는 의미인가.
…….
어라…. 난 왜 저놈새끼의 심리를 이렇게 잘 꿰고 있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머리를 털고는 입을 열었다.
“안 받아들이겠어!”
“생각보다 가능성 낮은 답변을 골랐군.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될까?”
흥미로워하는 니알라토텝의 질문에 나는 망량선사를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망량선사! 이건 어차피 이기기 힘든 판이야. 불가능한 일에 모든 걸 걸지 마! 당신 자신을 건다는 건 결국 망량선사의 존재가 [큰 굴레]에서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걸 뜻하는 거 아니야?”
내 질문에 망량선사가 대답했다.
“웃기지 마! 그런 게 어딨어! 난 다음 생부터 어쩌라고!”
[묘한 얘기군. 어차피 진 판이라면서 다음 생이 어디 있지? 네 전생이 여기서 끝나는 게 지는 게 아닌가.]“다르다고.”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질 때 지더라도 그건 이번 생뿐이야! [다음]까지 가는 것만큼은 포기 못해! 나한테 있어서 진다는 건 다른 의미야!”
[그렇군…. 그런 전략인가. 그게 도리어 더욱 확률이 없어보이지만.]망량선사가 무감정한 고양이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네가 모든 걸 선택하는 흐름이다. 내 제안을 포기하지.]“…고마워.”
[그럼 관전을 시작하겠다.]파앗
망량선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관전하겠다는 말은 이곳에서 형체를 숨기겠다는 말과 동일한 뜻으로 보였다. 내가 힐끔 니알라토텝을 보자, 니알라토텝은 훗하고 웃더니 말했다.
“그럼 나도.”
“잠깐!! 아직 물어볼 게 있어.”
“뭐지?”
“만일 내가 이긴다면 승천 대신 다른 걸 요구해도 되지?”
“크크크…. 방금 전 저 녀석에게 말했던 것과는 말의 결이 완전히 다른데.”
“…….”
“뭐 그렇지.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내가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 승천을 소원으로 비는 것도 그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원이기 때문이지 너 스스로 그것보다 대단한 소망이 있다면 그걸 빌어도 무관할 것이다.”
그렇군….
“그럼 건승을 기원하지…. 후후.”
파앗
니알라토텝의 모습 또한 사라졌고, 삽시간에 혼돈의 옥좌 앞에는 나와 황제가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옥좌 옆에 등 돌리고 있는 저 두 명은 애초에 지형지물 같은 거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나는 긴장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마음으로 차분해졌다.
황제가 곧이어 천마의 힘을 써서 나를 공격해 오면 과연 얼마나 막을 수 있을까? 방법이라 한다면 방금 전에 백련교주가 전해준 융합의 힘을 이용해서 최대한 버티면서 황제가 쟁여놓은 제물이 다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승산이 낮은 싸움이겠지만 나는 그래도 해야만 했다.
틀림없이 내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
그러나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무쌍패의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쌍패보다 더 견고한 방어자세는 존재치 않았으며, 설령 천마신공에 무쌍패가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융합의 힘을 섞으면 가장 방어율이 높은 무공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와라!”
내가 기세좋게 외쳤다.
이제 최악의 싸움이 시작되리라…!!
황제는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가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서 정신의 긴장도를 최고조로 놓고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집중했다. 언제 공격해 오더라도 무쌍패를 시전해 주마!
…….
음…. 안 오는군. 설마 지연계열의 천마신공을 쓸 수 있는 건가?
‘방심하지 말자.’
그렇게 계속 침묵과 정적이 흘렀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언제든지 와라!’
…….
숨을 백 번 정도 쉴 정도의 정적. 결투에선 흔한 일이지만 점차 정적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끝까지 무쌍패의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왠지 안 오는 거 같지만 내 기분 탓일 것이다.
날 방심시키려는 거군…!!
속지 않아!
‘사자는 토끼에게도 최선을 다한다는 거냐!’
공손헌원, 무서운 놈…!!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두 식경에 가까운 체감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외쳤다.
“아니 안 싸우냐!! 죽일 거면 빨리 죽이던가!”
고요 속에서 이미 습격해놓은 공격형태의 무공도 있었기에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지만 여태껏 황제는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어도 계속 인내심을 갖고 참았지만 마침내 알아차린 것이다.
황제는 지금 싸움에 임하고 있지 않아!
그러자 황제가 권태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눈치채다니. 애먹게 하는 성격이구나.]“결투잖아!! 안 싸우면 뭘 하겠다는 거야! 그럼 내가 이긴 거지?”
[아니. 한 쪽이 쓰러져야 결투는 끝난다. 나는 항복을 선언할 생각은 없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어쩌자고!!”
내가 황당해하자 황제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날 쓰러뜨리고 싶으면 공격해 봐라. 물론 받아줄 생각도 없으나 시도해봐도 나쁘진 않겠지.]“제기랄!! 사람을 얕보는 것도 정도껏 해!!”
키잉!
나는 크게 분노하며 손에 있던 검을 크게 휘둘러 진공파 같은 검강을 멀리서 날렸다. 물론 이 정도 공격이 황제에게 통할 리는 없으나 큰 빈틈을 노출시켰다가는 황제가 반격해서 일격에 끝장날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간단한 견제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온 반응은 정말 내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후웅
‘피했다?!’
황제의 신형은 어느 새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가 있었다. 나는 그게 권능인가 싶었지만 그가 실체화시킨 다리를 이용해 움직이는 걸 보았기에 무공의 일종이란 걸 파악할 수가 있었다. 즉 신법(身法)을 이용해서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천마신공으로 반격하면 간단히 나를 패대기칠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간단한 강기 공격을 피해야만 했던 거지?
내가 내심 혼란에 휩싸여있자 황제가 그 혼란을 부추기는 듯한 말을 했다.
[아무리 결투라 해도 공격자와 방어자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 더 강하다 해서 빨리 공격해서 끝내야만 하는 법칙이 있지도 않다. 내가 더 강하다면 결판을 낼 때까지의 과정은 자기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 않은가?]“…….”
[어쩌겠나 백웅….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보아라.]부들부들
나는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황제가 나를 조롱하는 느낌이 진하게 들면서도, 그가 의심을 부추기자 지금 여기서 어떻게 싸워야할지 헷갈려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상대가 나보다 압도적 강자이기 때문에 수비를 위주로 전략을 짜 왔는데 상대가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다니?
어쩌면 저것 자체가 함정인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인내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제길… 대범하게 달려들 수가 없어….’
그냥 한 순간의 감각에 맡기기에는 지금 이 대결에 걸려있는 게 너무 크다! 그 무게감이 내 운신을 제약시키고 상대의 도발에 휘말리게끔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역량이 더 높다는 게 확실한 상황에서 선공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 또한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느정도의 수준차이라면 몰라도 압도적 수준차라면, 당연히 하수가 방어부터 해야하는 것! 공격은 빈틈을 노출시키므로 하수의 선공은 금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자칫했다가는 한 순간의 허점 때문에 무쌍패를 펼칠 틈도 나오지 않을 수 있어.’
머릿속이 꼬이면서 내가 내 자신의 팔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한 착각이 든다. 쇠사슬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의 쇠사슬에 붙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미 나는 황제의 심리전에 말려들어버린 것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덤빌 생각이 없다면 그 상태로 내 말을 들어라. 그 동안 너와 나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으니.]“또 무슨 개소리를 할 셈이지?”
나는 황제에게 도발적으로 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너와 내가 승리를 나눠 가지자.]“……?!”
저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황제가 천천히 자기의 손을 펼치며 내게 내미는 자세를 취했다.
[이 결투에서 네가 승리를 취해라. 나는 네게 이 결투의 승리를 양도하는 대신에 네게 몇 가지를 약속받으면 된다. 이건 어떻겠느냐?]“…….”
[내 쪽이 다소 아쉽지만 니알라토텝이 끼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승리를 양도한다니.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냥 천마신공으로 나를 패면 될 텐데 어째서 굳이 승리를 양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토록 압도적이었던 황제가 승리를 양도한다는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는 솔깃함을 느꼈다.
“…좀 더 자세한 조건을 말해 봐.”
[들을 자세가 되었군.]황제가 다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내게 천암비서의 소유권을 줄 것. 그 대신에 나는 모든 신성을 포기하지.]“……?!”
[그리고 둘째, [계시]를 첫 번째로 듣는 권한을 내게 줄 것. 이건 네가 가진 권한은 아니지만 니알라토텝에게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다. 그 자에겐 그럴 능력이 생길 테니까.]“뭐, 뭐라고….”
[어찌할 테냐? 네가 이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때부턴 제대로 하겠다. 니알라토텝의 뜻대로 끌려가는 것 같아서 나로서는 하고싶지 않은 선택이지만….]황제의 눈에서 황금광이 치솟았다.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천마의 힘을 써서 너를 벌해주지! 나도 피를 볼 준비를 하겠노라!]“……!!”
내가 주춤거리자 황제가 자신의 기세를 다시금 낮추며 잔잔하게 말했다.
[생각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다.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현명한 선택이라니….”
[이 싸움은 니알라토텝의 재미로만 이뤄진 것이다. 놈의 뜻대로 할 바에야 우리 둘이서 승리를 나눠가지자는 뜻을 이해하거라.]그 말을 끝으로 황제 공손헌원은 팔짱을 낀 채 잠잠해졌다. 그러나 나는 황제가 대뜸 내게 던진 떡밥 때문에 머릿속에 어지러워서 정리가 안 될 지경이었다.
‘천암비서의 소유권과 [계시]의 권한.’
황제가 이 자리에서 승리를 양보하는 대신에 내가 가진 천암비서를 가져가고 [계시]를 처음으로 들을 권리를 가져간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내가 얻게 되는 건…. 아마도 승천의 권한. 하지만 황제는 승천의 권한을 얻지 못하는 대신에 천암비서를 가져가게 되는데 그게 뜻하는 건….’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너는… 전생자(轉生者)가 되고싶다는 거냐?”
천암비서를 가져가겠다는 건 그런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내 질문에 황제가 눈에 이채를 띄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네가 정녕 무공으로 천마를 이길 자신이 있다면 굳이 내 제안에 응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지만, 이건 너를 위한 제안이다.]나를 위한 제안….
나는 천마에게 잔뜩 겁을 먹고 있다가 이런 제안을 받자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승산이 일할은커녕 일푼도 없는 개싸움 끝에 살해당할 각오를 하고 왔는데 같이 이길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나는 황제의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 승천이란 걸 해서 이번 생에 엄청난 힘을 손에 넣어버리면 그것도 괜찮은 거 아닐까? 황제놈도 신성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더 이상 내 적은 아니게 되겠지. 그러면 어쩌면….’
이번 생에 다 끝낼 수 있을지도?
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니 계속해서 좋은 점만 느껴졌다. 달콤하게만 느껴지는 이 제안을 천년이고 만년이고 곱씹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 이걸로 된 거 아닐까?
황제는 나와는 수준이 다른 존재다. 지금까지 이런 장벽은 없었어.
여기서 일단 황제와 타협해서 승리를 나눠가지게 되면 어떨까….
나눠가진 다음에 황제를 쓰러뜨리면 결론적으로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주는 것도 가능하잖아.
…해도 되지 않을까.
내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스멀거리며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황제는 그저 팔짱만 낀 채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든 나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오만함이 느껴져서 위축되었다.
이길 수 없어….
봐줄 때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창조신 반고까지 패대기친 괴물을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
마음속에서 찬성하는 뜻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황제! 나는….”
다음 한 마디를 꺼내려는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음?’
그것은 의혹이었다.
아주 잠깐동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의심’.
그러나 그 의심은 황제에게 굴복하려는 내 의지 전체를 뒤집어엎었고 마지막 한 마디를 하려는 걸 멈칫거리게 했다.
황제가 내 변화를 눈치 챘는지 입을 열었다.
[싸우겠다고? 그것도 좋지.]“아, 아니 잠깐만….”
저렇게 자신만만한데.
천마신공으로 덤비면 삼 초도 버티기 힘들게 뻔한데.
‘어째서.’
나는 지금 떠오른 의혹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테지만 [매듭]에서 겪었던 일과 늘 제갈사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던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의심.
“…….”
어쩌면 좋을까.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선택 – 말 그대로 광기에 모든 걸 맡기는 선택.
아무리 도박이란 게 쫄리면 죽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 한 놈이 정작 나 같은 상황에서 나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다 잃는데 정말로 이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윽고 티끌만한 의심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검의 손잡이를 꾹 쥐면서 뇌신류의 기수식을 취했다. 내 자세를 본 황제가 비웃듯이 말했다.
[후후후… 정말 간이 배밖에 나왔군. 그렇게 죽고싶으냐.]“…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 어리석은 놈.]“어리석은 놈 맞아.”
나는 내가 이미 미쳤다는 걸 알고 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런 선택은 절대 하지 않는다.
너무 많이 전생하다보니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전투의지를 다잡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넌 천마신공을 못 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