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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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30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으음….”
나는 명치에서 느껴지는 잔통(殘痛)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인건 목이 날아가거나 운석이 떨어지거나 태양이 폭발해버리거나 할 때의 고통보다는 덜했고 통증도 금방 가라앉았다. 나는 아픔이 조금 수그러들자 외양간에 앉아서 차분히 생각했다.
‘29번째 삶은 뭔가 정신이 없었군….’
말 그대로 코 꿰인 것처럼 여기저기 끌려다녔던 기분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닌 곳은 많지만 정작 뭘 얻었느냐 하면 뭐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온갖 사건의 출현은 겪었지만 명확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젠장. 이럴 때도 있는 건가.”
전생하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찝찝함! 나는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어서 고개를 털었다.
“…좀 더 생각을 해 볼까.”
하지만 찝찝하다고 해도 최악(最惡)이 아니라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는 다시 전생해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잖은가? 나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며 일단 차분하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선 제갈사가 했던 말을 되새김질 해보기로 했다.
‘제갈사는 내게 3가지 과제를 주었다….’
첫째. 삼황오제를 규합해서 흉신에 대항한다.
둘째. 사대신기를 난사해서 내게 끓어넘치는 마력을 무(無)에 가깝게 돌리고, 덤으로 사대신기와의 친화도도 높인다.
셋째, 흉신이 세계수를 찾아서 빠른 부활을 시도하기 전에 제곡을 찾아가서 그가 흉신진영에 합류하는 걸 막는다.
나는 세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중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와 셋째 과제는 연결되어 있군.’
제곡이 흉신 진영에 합류하는 걸 막는다는 게 결국은 삼황오제 규합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저 두 가지 과제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삼황오제를 설득하여 합종연횡을 달성할 수 있을까?
비록 삼황은 대개 은거중이고 오제 또한 사분오열되어있다 해도 그들은 우주 내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지배자]들이다. 지금 내 힘으로는 삼황오제 개개인에게 접촉해서 이득을 얻는 건 쉽지만 그들의 연맹을 이끌어낼 수 있다곤 할 수 없었다. 벌레취급이야 받지 않겠지만 그들이 일개 필멸자의 말에 쉽게 귀기울여주지 않는다는 건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사는 지금까지 내가 모아왔던 정보와 지식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어.’
제갈사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곤란함을 느꼈다.
‘근데 너무 거국적인 목표야. 너무 목표가 큰 탓에 당장 뭘 해야 할지 보이질 않아.’
거국적인 목표의 문제점이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목표가 거대하다보니 당장 해야 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제갈사 또한 뭔가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서 이야기했다기 보다는 앞으로 내가 단서를 잡아나간다는 전제하에 방향만 잡아줬던 것이리라.
나는 좀 더 눈에 보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면 사대신기를 난사하는 게 두 번째 과제인가….’
우우웅
나는 곧장 눈을 감고 사대신기에 접속했다. 그리고 사대신기의 륜이 여전히 내게 호의적이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했다.
‘잘 보니 륜(輪) 주위가 모두 어둡군. 내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 거야.’
자칫 손을 뻗었다가는 지난생 초반에 바즈라를 잡았다가 죽을 뻔 했던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나는 이 문제의 해결법을 이미 29번째 삶에서 발견했었으므로 명상을 풀고 현실로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수신기 바루나에게 수기를 공양해야겠어.”
그렇다면 일단은 수기공양을 위해서 수요의 봉인부터 풀러가는 게 급선무가 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문득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힘들다….
정말 힘이 없지는 않지만 왠지 마음의 힘이 다 고갈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와 싸운다 하더라도 여태까지처럼 의욕을 다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런 경우를 거의 겪어보지 못했기에 잠시 당황했다.
‘젠장…. 누가 권능으로 압박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일어나기 싫어.’
체력이나 기력이 고갈된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보물을 모으고 빨리 진행해야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몸 상태도 쌩쌩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왜 이러는 거지…?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외양간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음머 –
황금이가 울면서 다가와서 내게 콧등을 비볐다. 나는 황금이를 어루만져주면서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상태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데서 시간낭비할 때가 아닌데.’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뭔가 해내야만 하는데 왜 이런 무의미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황당했지만 그래도 움직이기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머릿속에서 아수라의 말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간단한 문제군…. 그럼 쉬어라.] [너는 네 멋대로 해라.]지난 생이 끝나기 전 간단한 대화. 그저 스쳐지나가는 대화였을 뿐인데 왜 그 말이 내 마음속에 박히는 걸까?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축 쳐져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리며 웃고 말았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
그랬던 거군.
체력도 기력도 완전히 채워져 있지만 – 심력(心力)이 고갈되어 있는 거야.
내 의지랑은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그 근원이 내 마음속에서 바닥을 드러낸 거라고….
갑자기 이렇게 된 건 아니다. 나는 이미 이렇게 되리란 것을, 28번째 삶의 막바지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제갈사나 천우진과 대화할 때도 나는 이미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들 또한 나를 이해해주었지만 그들의 입장 상 내게 함부로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쳐서 쓰러져 있기에는 너무 중대하고 위험한 상황이 연속으로 덮쳐왔으니 악을 쓰고 맞서다보니 그 허무감을 느낄 여력조차 없었을 뿐이리라. 뒤늦게야 그 진짜 후폭풍이 내게 닥쳐온 것이다.
생경하기만 하다.
심력이 고갈된다는 건 첫 번째 삶 이후로 거의 느껴보지 못한 일이다. 첫 번째 삶에서야 워낙 하급인생을 살아가며 이리저리 치여댈 때마다 괴로워서 쓰러지기 일쑤였지만 그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난 천암비서로 전생능력을 얻은 후 줄곧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무력하게 죽거나 허망하게 살해당할지언정 전생(轉生)이란 힘은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 걸 약속해 주었다.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원동력! 다음 기회가 있는 이상 당장 힘이 없다고 하더라도 분하기만 할 뿐 의욕 자체를 잃어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안 해봤는데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겠냐고 생각하고 있으면 언제나 행동력은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찌되었든 전생할 때마다 쌓여가는 힘과 지식이 가져다주는 뿌듯함 덕분에 행동을 할 의욕만큼은 언제나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무력함 그 자체라서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삶과는 명백히 달랐다.
그러나 – 황제 공손헌원이라는 적은 너무 강력했다. 온갖 우연과 기적 덕분에 그를 봉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모든 동료를 잃고 나조차도 적의 동정에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이었으며, 심지어 외신이라는 압도적인 격에 도전하는 적의 [크기] 그 자체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황제의 인과율 계산능력에 목줄을 매이듯 끌려 다녔던 경험 또한 악영향을 미쳤다.
“백웅!! 일어서!! 천암비서를 찾으러 가!! 보물을 찾고 책사들을 찾아가!!”
나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쳤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입 밖으로 나열하면 내가 그 소리에 자극받아서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음머 –
그러나 황금이만 울고 있을 뿐, 나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일어서지도 않았다. 머리로는 생각을 하지만 내 진짜 밑바닥의 진심은 이미 고갈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건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껏 지극한 슬픔을 느낀 적은 몇 번 있으나, 그때 느꼈던 슬픔과 지금의 고갈은 완전히 결이 다르다. 슬픔은 한바탕 거세게 쏟아낸다면 냉정함을 다시 찾을 수 있으나, 지금 나는 텅 비어있어서 내보낼 슬픔조차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숨겨진 감정조차 찾을 수가 없는 완전한 연소(燃燒)가 내 마음속을 휘몰아치고 있다.
허무란 유(有)인가 무(無)인가?
당연히 무(無)여야 할 테지만 허무만이 남는다면 그조차도 유(有)일 수밖에.
완전한 공(空)이 될 수 없는, 껍데기만 남은 무언가가 바로 지금의 내 상태인 것이다.
“…….”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내가 생각이 많아질 때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다. 생각의 굴레에 메여 답답했던 적은 많으나 지금은 그 답답함조차 허무해지고 있어서 나 스스로 마음의 문을 점차 닫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진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전생자로써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죽고 싶다.”
죽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죽고 싶은 적은 처음이다.
…….
나는 그렇게 몇 시진이나 되는 시간을 얌전히 외양간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시간을 줄여서 뛰쳐나가도 모자랄 판에 있을 수 없는 시간낭비 – 그러나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으니 의욕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앉아있다보니 누군가가 외양간에 찾아왔다.
“소똥이, 이놈!! 소똥 치우고 밭에 김매고, 물통 채워놓지 않고 뭘 하느냐!!”
아주 익숙하지만 마치 십수 년 이상 들어보지 않은 듯한 그 목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정겨워서 피식 웃고 말았다.
촌장의 목소리였다.
“이익…. 이 놈아. 귀가 처 막혔느냐?”
이윽고 촌장이 외양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자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씨익대며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 경험으로 미뤄볼 때, 화가 많이 난 촌장이라면 논두렁에 쌓아두는 단단한 짚단덩어리로 내 얼굴을 후려칠 테지. 그냥 화가 나면 발길질을 하는데 그걸로 때리면 골병이 들 정도로 아프니까.’
눈감고도 피할 수 있다. 아니, 피할 필요도 없다. 호신강기를 쓰면 촌장을 나동그라지게 할 수 있다.
‘때리던가….’
하지만 왠지 그런 대응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때릴 테면 때리라고 뺨이라도 내주고 싶을 정도다.
왜냐하면 촌장에게 어떤 대응을 하는 순간, 실낱같은 의욕을 붙잡고 움직여버릴 것만 같았기에.
그러나 팔을 걷어붙이고 짚단덩어리를 찾던 촌장은 잠시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됐다. 너까지 심란케 만들지 말아라. 젊은 것들이 하나같이 게을러빠져갖곤.”
“…….”
“빠릿하게 안 움직였으니 밥은 없다. 빨리 나와서 일해라.”
촌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비웃음조차 지을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저 굳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도…. 이리도 하찮은 게 내 일상이었던 건가….’
그래. 이렇게 하찮은 삶의 굴레를 빠져나와서 표사가 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뻤지만 결국 표사의 삶도 하급이란 걸 깨닫고 절망했었다. 그 후 전생능력을 얻고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의욕 그 자체였는데 – 설마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그 순간, 나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괴상망측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냥…. 내 맘대로 할까?”
기왕이면 평소에 생각만 하고 있었던 재밌는 일을 해 볼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효율따윈 없다.
왜 하냐고 누가 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의미는 없지만 – 그냥 해 보고 싶다.
지금껏 모험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하찮아져버린 이 마을을 줄곧 무시해 왔었지만, 한 번 정도는….
‘바보같은 짓이야. 왜 그 짓을 해?’
그러나 이런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씨익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히히히.”
그리고 그 웃음을 인식한 순간, 나는 내가 망량 같은 순수한 협사(俠士)가 아니라는 걸 진정으로 알 수가 있었다.
마치 어릴 때 장난을 치던 것과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나 또한 내가 갖고 놀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기왕이면 – 과거부터 나와 연이 있었던 무언가를.
“가 볼까.”
의욕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늘 효율대로만 움직인다는 원칙을 벗어난 해방감이 깃들었다.
타다닷
나는 외양간에서 벌떡 일어나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달려가는 방향은 여태까지와 달리 천암비서가 있는 동굴이 아니었고, 나는 빠르게 내 목표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촌장의 집인가!
“잉?”
촌장이 일하러 나가기 전에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있다가 당황한 듯 말했다.
“소똥이 이 녀석 여긴 갑자기 왜….”
“으아아아!! 밥처먹지 마 개새끼야!”
“뭣….”
“이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너넨 왜 이렇게 태평해! 나만 일하냐고!!”
나는 달려들어서 촌장네 밥상을 엎었다.
“이런 망할 밥상!”
와장창
밥상이 엎어지며 하늘을 날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달려들어서 촌장과 가족, 그리고 근처에 있던 하인들의 혈도를 모조리 일거에 짚어버리고 말았다.
부들부들
촌장이 혈도를 제압당한 채 찍소리도 못하고 멈춰있자, 나는 촌장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이봐! 잘 들어!!”
덥썩
나는 촌장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오늘부터 내가….”
나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생각했다.
이런 촌구석 마을을 지배해서 뭘 하게? 지금 삼황오제와 드잡이질 하게 생겼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려는 마왕들이 곳곳에서 암약하는데다가 가만 놔두면 흉신이 부활하게 생겼는데 왜?
“내가….”
하지만 알 게 뭐냐.
내가 하고 싶다는데 이유가 어딨어.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첫 번째 삶에서부터 한 번 정도는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고.
“이 마을의 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