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31)
0131 ———————————————-
암천향(暗天鄕)
나는 태산의 칠살마을이라는 곳에는 가본 적이 없었기에 우선 태산에 가 보기로 했다. 태산은 산동지방에 있는 도교의 영산(靈山)으로써, 중원인들 대부분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태산이 유명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중화역사가 시작되고 진시황(始皇帝)이 최초로 중화를 통일한 후, 봉선(封禪)의식을 치른 장소가 바로 태산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나라 때부터 봉선의식은 존재했지만 진시황이 멋대로 천하통일 후 하늘의 인정을 받으려고 재개했다는 쪽에 가깝긴 했다.
그리고 태산은 그런 역사적인 요인 때문에, 역대 통일군주는 물론 황제들이 심심하면 찾아서 봉선의식을 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근처에는 관문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관병의 숫자도 많았다. 만일 황제가 태산 근역에 행차할 경우 괜한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 때문인 것이다.
‘ 산적이 거의 없어서 편하군.’
태산으로 가는 도중에 산적을 딱 한 번 만났다.
“도… 돈 내놔.”
그나마도 며칠동안 쫄쫄 굶은 듯한 화전민 출신 도적 세 명이었다. 그들은 꾀죄죄하고 가슴뼈가 보이는 앙상마른 모습이었으며, 깎아만든 죽창을 내밀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돈 내놓으라고 할 때는 헛웃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자들은 덩치 큰 장정 하나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거 받으시오.”
“……?!”
너무 불쌍해서 죽일 마음도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가지고 있던 돈 중에서 은자 사십 냥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들이 뜻밖에 돈을 받고 놀라자, 나는 그들에게 덤으로 기공치료까지 해 주었다. 황달걸린 자의 몸이 낫게 되자 그들은 내게 절을 했다.
“아이고… 무림의 소영웅이십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이들에게 인정을 베푼 이유는, 나는 오랜 표사생활과 무림생활으로 살인도적과 생계형 도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먹고살 게 없어서 도적이 된 자들은 인생 자체가 지옥이었다. 때려죽이려니 마음이 불편할 정도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쩌다 산적질이나 하며 살게 되었소? 이 일대에서 먹고살기가 그리 팍팍한가.”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중년 화전민 도적이 울컥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쉴새없이 화족(華族)과 귀족들이 수탈하고, 땅 지주들이 수확한걸 다 빼앗아갑니다. 곱상한 여아가 있으면 억지로 데려가서 첩으로 삼습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산으로 나온 것입니다.”
“……”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늘 보아왔고, 본 것이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수탈하는 건 개개인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설령 이 근처의 탐관오리를 다 때려죽인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누군가 다른 악당이 차지해서 수탈할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건 어떤 걸까?’
아무리 평화로워도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존재한다. 약육강식은 세상의 법칙이며 진리이다. 내가 설령 복마전을 해치우고 이족을 쫓아내고 이계의 사신을 물리친다고 한들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참혹한 인신공양과 희생은 그만두게 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천지간에 가득한 불행의 총량은 별다를 게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눈 앞의 화전민 출신의 도적들에게는 와닿지도 않는 복마전이나 마물보다 탐관오리가 100배는 극악하게 느껴질 것이다. 인간은 딱히 마물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더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소. 그럼 나는 가겠소.”
나서지 않기로 했다. 쓸데없이 행적을 벌리면 나중에 귀찮아지는 탓도 있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 무공이면 탐관오리 서너 명의 목을 몰래 따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것이다. 결국 윗물을 바꾸지 않으면 아랫물은 평생 썩을 수밖에 없다.
나는 한참을 걷던 중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관문 병사는 깐깐한 눈으로 나를 살피더니 말했다.
“어린아이가 홀로 여행한다고?”
“네.”
“안될 건 없지만 이 근처에서 죽어 나자빠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쓸것이다.”
“네.”
“그래 지나가라.”
관문 병사는 그냥 오지랖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병사를 보다가 물었다.
“죄송하지만 칠살마을이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어? 너 거기를 찾아가냐? 왜?”
“거기에 지인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고 있습니다.”
관문 병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거긴 천민(賤民)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협곡의 마을이라 들었는데 일부러 그런 깡촌까지 찾아가다니… 킁.”
“천민이요?”
“그래. 가난하기 짝이 없는 궁벽한 벽촌이다. 거기에 가느니 큰 읍에서 거지노릇을 해야 굶어죽는 걸 피할 것이다.”
“……”
저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해 보였다. 관문 병사가 걱정할 정도라면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행인에게 길을 질문했고, 이윽고 약 일백 리를 걸어서 칠살마을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칠살마을은 태산에서 약간 떨어진 협곡에 있는 깡촌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을이라기보다는 누더기 판자촌에 가까워보였다. 마을 사람들도 제대로 된 모양새가 아니라 전부 꾀죄죄한 거지꼴이라서, 마치 개방의 본거지같을 정도였다.
‘ 뭐야…?’
천민이 사회계층의 가장 아래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거지같은 모양새일 줄은 몰랐다. 하나같이 앙상말라 있었고 굶어죽기 직전으로 보였다.
웃긴 건 그런 꼴인데도 칠살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정기(精氣)가 가득 차서 또렷하다는 점이었다. 곧 굶어죽기 전인데도 정신력이 날서 있는 깐깐한 유생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칠살마을을 한참 둘러보고 있자, 한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말했다.
“얘야… 이 곳에는 무슨 일이냐…?”
나는 힐끔 그를 보았다. 애꾸눈 노인은 속도로 볼 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싶었다. 나는 슬며시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검은색 목패를 보여 주었다.
“이걸 갖고 오면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오오… 오오오…!!”
지팡이 짚은 노인이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보게… 신객(神客)이 오셨네!! 모두 맞이하세.”
“오오…!!”
그러자 꾀죄죄한 꼴로 먹고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더니 남녀노소 할것없이 다같이 이상한 춤을 췄다. 율동을 맞춰서 손뼉을 치며 춤을 추는 모습이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허이~ 허이~ 허이~”
짝
“아~싸~ 아~싸~”
“……”
나는 그들의 원진에 갇혀서 가만히 한 식경동안 그 춤을 바라보아야 했다. 엉덩이를 들었다 뺐다하는 동작도 있었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기에, 대체 뭔 일인지 궁금해서 지켜보고싶어질 정도인 것이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큭큭거리고 있자, 한참 후에 춤이 끝나고는 지팡이 짚은 노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신객이시여. 어디서 어떻게 목패를 얻었는지, 누구한테 얻었는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목패를 가지고 오신 이상, 저희는 최선을 다해 신께로 인도해드릴 뿐입니다…”
존댓말로 변해 있다. 칠살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객’이라고 불리는 의뢰주는 그 자체로 존경할만한 존재인 듯 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뭘 하면 됩니까?”
“저 나무 밑으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그 말에 따라서 칠살마을의 중심에 있는 기묘한 나무 밑으로 갔다.
나무는 희한하게도 완전한 백색이었다. 백색 나무줄기에 백색 나뭇잎, 심지어 근처의 땅까지도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벌레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벌레조차도 백색 나무에는 달라붙지 않았다. 이렇게 기이한 백목(白木)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목 아래에 서 있자, 갑작스럽게 천지가 진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드드드드
드드드….
“……?!”
천지에 지진이 난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멀쩡히 있는 걸로 보아서, 내가 서 있는 곳만 흔들리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내가 있는 공간 그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눈 앞에 섬광이 퍼져 나왔다.
파앗 – !!
“우아아앗.”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왠 밀림(密林)으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밀림의 나무 위로 재빨리 균형을 잡아서 올라탔는데, 잎을 타고 다시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氣)를 발끝에 흘려내어서 점력을 강화시켰다.
가까스로 나무의 줄기에 올라탔지만 나는 기가 막혔다.
‘ 무슨 나무가 이렇게 커?!’
이 밀림의 나무는 정상이 아니었다. 너무나 키가 커서 밑바닥까지 십여 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더욱이 굵기도 상당해서, 내가 아는 숲 중에는 이런 숲이 없었다. 게다가 나무도 마디마디마다 괴상한 잎줄기가 뻗쳐있어서 기괴한 모습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어딘가 괴이한 공간에 와 버렸다는 사실을 직감하며 천천히 나무를 타고 땅으로 내려갔다. 땅으로 내려오자 질척질척한 대지가 숲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고, 곳곳에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다.
쿠르륵…
이상한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까부터 이 밀림에 들어온 후부터 기묘한 불쾌감과 이질감이 내 몸을 사로잡는 걸 느꼈다. 이 곳은 무언가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는 이런 광기를 어디에선가 느낀 적이 있었다.
‘ 여긴 대체 뭐지…?’
그리고 내가 갑자기 백목 밑에 있다가 이런 괴기스러운 장소로 이동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무언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고,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언어와도 다른 것이었다. 해석은 할 수 없었지만 뜻만이 내게 전해졌다. 또한 사람을 몽롱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 담겨 있었고, 어디로 오라는지 본능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 으, 가 보자.’
나는 썩은 표정을 지으며 일단 걸어갔다. 이 밀림은 불쾌한 기분만 가라앉히면 사람이 이동할 수 없는 장소는 아니었다. 한참을 걷던 중, 왠 짐승의 시선이 느껴지고, 그 짐승이 푸드득거리며 내 앞에서 날갯짓을 했다.
쿠르륵…
칙칙한 피부에 마치 인간같은 얼굴형과 사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쥐의 날개가 돋아 있었고 두상에 뿔이 나 있었다. 또한 괴기스럽게도 얼굴은 있으나 이목구비가 없고 꼬리 전체에 가시가 나있었다. 나는 이런 괴이스러운 생명체를 본 일이 없었으므로 침음성을 내었다.
“으음…”
이런 게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생명체란 말인가? 이목구비가 없는 박쥐같은 생물체라니 말이 되는 건가? 다만 눈 앞의 얼굴없는 박쥐괴물은 내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듯, 이내 등을 돌리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부름]의 근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
거대한 무언가가 유폐되어 있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게, 몸뚱이의 크기가 수십 장을 훨씬 넘는, 검정색의 박쥐날개가 달린 촉수덩어리가 거대한 협곡의 한가운데에 몸을 누이고 있는 것이다.
그 촉수덩어리는 마치 여인의 유방과도 같은 것을 무수히 몸뚱이에 달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촉수덩어리의 유방에, 아까 보았던 얼굴없는 박쥐가 달라붙어서 마치 아기처럼 빨고 있는 중이었다.
촉수덩어리는 눈이 없었지만 마치 이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곳곳에 날아다니는 박쥐괴물들 중 몇몇이 내 근처로 날아오더니 다시 되돌아 갔다.
이 압도적으로 괴이쩍은 무시무시한 풍경!
나는 그제서야 이 곳이 이족(異族)의 영토라는 걸 깨닫고, 검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마치 일그러진 듯한 황색의 달이 떠 있었다.
‘ 이… 이 곳은…’
나는 내가 어디에 왔는지를 깨닫고 절망했다.
암천향(暗天鄕)!
나는 암천향의 어딘가에 와 버렸고, 눈 앞의 존재에게 [부름]을 받은 것이다.
검정색의 박쥐날개가 달린 촉수덩어리에게!
신선조차도 오기를 두려워한다는 악몽의 대지에 뜬금없이 와 버린 셈이었다.
또 죽는건가 싶어서 눈 앞이 깜깜해질 때, 박쥐날개의 촉수덩어리가 내게 의지로 말을 걸었다.
[ 환영한다… 환몽의 땅에 각별한 자가 찾아왔구나…]쿠궁
나는 그 순간 엄청난 압박감과 존재감이 내 머릿속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일개 마물을 대적할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엄청난 힘이었다. 호법사자 앞에 섰을 때도 느끼지 않았던 가공할 긴장감 때문에 신경줄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만 정신이 오염되거나 미칠 것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고, 단지 눈 앞에 있는 촉수덩어리가 [위대한 존재]라는 건 즉시 알 수가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마음 속으로 강하게 떠올려 보았다.
[ 당신은 옛 지배자이십니까?]그러자 눈 앞의 존재가 대답했다.
[ 그것은 인간이 우리를 부르는 칭호로군… 나는 &^%*@다.]괴이한 이름이었다. 중원 식으로는 어떻게 해도 읽히지 않는다. 이족의 정점에 있는 신이니,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튼 눈 앞의 존재가 [옛 지배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망량의 말대로라면, 보통 인간은 옛 지배자 앞에 서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마력 때문에 미쳐버리는 게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술법사나 마도사, 혹은 극도로 정신력을 단련한 선인이라고 해도 공포감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런데 나는 그저 짜증만 조금 날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눈 앞의 촉수덩어리 옛 지배자는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나는 왠지 그가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상하군…] “……?”[ 너는 인간으로 대할 수가 없다… 아주 친한 기분이 든다… 그런 것이다…]
나는 눈 앞의 존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옛 지배자]란 존재는 대라신선도 멸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마력을 지닌 사신(邪神)이며, 인간 따위는 벌레취급을 한다. 그러나 눈 앞의 존재는 나를 적어도 대화 상대로 여기고 있으며, 호감마저 지니고 있는 듯 했다.
‘ 흑색 나무패를 가지고 와서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가만히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자 옛 지배자가 자신의 박쥐날개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반전의 권능?
나는 그 말 뜻이 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는 힘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일살(一殺)이라는 말에는 그런 뜻이 숨어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잠시 후 마음을 먹고 말했다.
“황제를 죽여 주십시오.”
[ 과연… 그 인간을 죽이기를 원하는 것인가… 좋다…]
옛 지배자의 몸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며 뻗어나오더니, 허공 한 부분을 짚었다. 그러자 무언가 연기같은 것이 허공에서 흘러나왔다. 그 연기를 촉수에 휘감은 옛 지배자가 이윽고 그것을 꿀꺽꿀꺽 삼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 죽였다…] “……”끝인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이윽고 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파앗!
다시 섬광이 일어났고, 내가 정신을 차려 보자 나는 아까 그 백목 아래에 서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 모여 있던 칠살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살아있어…!!”
그들은 정말로 놀란 듯 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자 불쾌해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 죽는 게 당연한 거였군.’
암천향에 있는 옛 지배자 앞에 찾아가서 광기에 휩싸인 후, 자신이 진정으로 해치우고 싶은 한 명의 대상을 지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아마 옛 지배자의 촉수에 붙잡히거나 해서 죽었을 것이다. 운이 아무리 좋아도 암천향의 이계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흑색 나무패의 일살(一殺)이란 바로 그런 의뢰였던 것이다.
의뢰 성공율이 10할일 수밖에 없다. 옛 지배자가 직접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는데 안 될 게 뭐란 말인가.
확
나는 곧장 달려들어서 촌장으로 보이는 지팡이 짚은 노인네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옛 지배자의 하수인이었군. 인간을 끌어들여서 암천향에 보내버리는 게 당신들 역할이었던 건가.”
“아으, 으, 으으…”
“생명을 구해줬는데 고작 이딴 식으로 갚는다는 말인가? 네놈들은 인간도 아니다.”
쿵
내가 노인을 땅바닥에 내팽개치자, 옆에 있던 칠살마을 사람 하나가 말했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우리는 그 분께 종속되어서 평생 이 곳에 살던가, 바깥세상으로 가서 신객을 구해와야 한다. 신객을 구해서 바친 자만 탈출할 수 있다.”
“하아?”
“그 외의 방법으로 마을에서 탈출한 자는 다 신의 저주때문에 죽었다. 우리가 천민으로 사는 게 우리 뜻인 줄 아는가?!”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암천향에서 돌아온 자를 어떻게 ‘처리’했지?”
“……”
“아무런 대가도 없을 리가 없지. 안 그런가.”
내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거지꼴이지만, 몸에는 생명력이 충만하다. 배고프거나 힘든 기색도 없어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옛 지배자가 하수인으로 부리는 댓가로 받은 생명력이 분명했다.
내가 칼을 뽑아들고 그들에게 겨눴다.
“나는 30초 내에 너희를 모두 죽일 수 있다. 내가 나서기 전에 당장 어떻게 했는지 말해라.”
칠살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만 하게. 내가 촌장이니 내가 대답하겠네.”
땅에 쓰러져 있던 지팡이 짚은 촌장이 힘없이 말을 이었다.
“먹었네.”
“먹었다고?”
“우리의 몸은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지.”
슈르르륵
“……!!”
잠시 후 촌장의 머리과 몸뚱이가 이질적인 존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개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개인간의 모습이었다. 단지 몸뚱이가 매우 탄탄했고 강인해 보였다. 내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마을사람들도 하나 둘 개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할 말을 잃자 촌장이 말했다.
[ 우리는 어렸을 적에는 인간이지만 자라날수록 견인(犬人)이 되지. 우리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고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먹는 게 부족해도 쉽사리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그 분을 모시기 위한 봉사자들이다.] “미친…”나는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걸 느꼈다. 옛 지배자에게 가는 길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그 자에게 봉사하는 종족도 따로 있을 줄이야.
[ 그 분께 소원을 빈 자는 어차피 미쳐버리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 우리는 고통없이 신객의 목숨을 끊어주고 육체를 뒤처리할 뿐이다.] “네놈들은 미쳤어.”그러자 촌장이었던 견인이 서글픈 듯 말했다.
[ 당연히 미쳤지. 우리는 원래 이 땅에 살 수 없는 이족(異族)이다. 인간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어설프게 갖고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슬프다.] “슬프다고? 그게 너희같은 괴물이 할 수 있는 말이냐?”[ 괴물이라… 우리가 괴물이라면 그대는 대체 무엇인가?]
이어진 촌장의 말에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 신선조차도 우리의 신을 대면하면 미쳐버린다. 우리의 신은 [오래된 자들] 중에서도 격이 높으신 존재이다. 그 분의 마력을 쏘이고도 멀쩡히 살아돌아온 그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 죽일테면 죽여라. 차라리 그게 우리도 편하다.]
그들은 강한 육체와 힘을 가진것 답게, 내가 품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체감한 모양이었다. 나를 둘러싼 견인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검을 들고 부들부들거리다가 쌍소리를 내뱉었다.
“씨발!”
슈칵
나는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칠살마을 사람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해적을 토벌할 때처럼 잔인하게 하지 않고 그냥 일격에 빠르게 목을 날려버렸다. 그들은 삶을 체념했는지 순한 양처럼 죽어 나갔다. 아마도 그들도 인간같지 않은 자신들의 삶에 질려 있었으리라.
나는 일대 도살극을 끝낸 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제길…”
칠살마을 사람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 이들은 여태껏 무고한 희생자를 계속 만들어냈을 것이며, 앞으로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악당으로 간주하고 죽이기에는, 놈들도 악신에게 예속된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다 죽이고도 마음이 껄끄러워서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털고는 움직였다.
‘ 앞으로는 여기를 절대 이용하지 않을 거다.’
하나의 존재를 죽일 수 있으면 뭐 하는가.
옛 지배자를 대면한다는 자체로 짜증이 미친듯이 밀려온다. 왠지 나는 미치지 않고 멀쩡했지만 여하튼 가기 싫다.
나는 [황제]가 죽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파앗
내가 비등을 써서 망량에게로 갔을 때였다.
망량은 진랑곡에 앉아서 뭔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초가집 앞에 나타나자 앗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왔구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오?”
“아니… 천기(天機)가 뒤틀어져서…”
천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망량이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떨어질 리가 없는 거성(巨星)이 떨어졌소. 누군가의 힘으로 [죽어서는 안 될 존재]를 죽인 것이오. 이런 일은 거의 없는 일이기에 나는 고민하는 중이었소. 아마 대륙의 모든 술법사나 천문관들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오.”
그것은 아마 백발백중 황제의 죽음일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있었소.”
나는 망량에게 내가 칠살마을에서 겪었던 일과, 황제의 죽음을 의뢰한 일을 말했다.
그러자 망량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암천향에 거하는 옛 지배자에게 소원을 빌고 살아돌아왔다고?! 당신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거요?”
“농담이 아니오.”
“……!!”
망량은 갑자기 나무 밑으로 달려가서 구토를 했다. 한참동안 토를 하던 망량은 한결 나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기절할 뻔 했소.”
“그렇게 놀랄 일이오?”
“당신처럼 악신의 덫에 걸린 자는 역사상 꽤 있었겠지만, 멀쩡하게 되돌아온 자는… 게다가 옛 지배자에게 호의를 얻은 자는 인간역사에 전무(全無)할 것이오. 대라신선조차도 그렇게는 못 하오.”
그러고보니 나는 옛 지배자 앞에 있을 때 여동빈이 나타나지 않은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질문하자 망량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암천향은 완전히 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계. 여동빈의 힘으로는 그 차원의 벽을 뚫을 수 없으니 소환에 응할 수가 없는 거요. 뿐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그 차원의 벽을 지키는 것 또한 [옛 지배자]라고 하오.”
“……”
나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칠요 중 하나가 암천향에 있는 게 확실했기에, 언젠가 힘을 키워서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암천향에서 여동빈을 소환할 수 없다면 내 위험확률은 엄청나게 높아지는 것이다.
여러모로 난이도가 높아지는 느낌이었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황제가 죽었으면 다행 아니오?”
“… 일이 그렇게 쉽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거요.”
망량은 허무한 듯 중얼거렸다.
“당신 말대로라면, 황제는 결코 이 일의 주역이 아닐테니까…”
망량의 말이 입증된 것은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