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787)
전생검신 94권17화
나는 그 후 한참 동안 수인(手印)을 연습했다.
파파팟
하나의 결좌(結挫)를 왼손으로 맺은 채 오른손으로 보충한다. 빠르게 그 수인을 맺은 후 중얼거렸다.
모산파(茅山派) 십대수인(十大手印) 유지봉초(留咫封礎).
봉인술을 유지하는 기초적인 수인의 형태. 술법의 종파로 유명한 모산파의 문인들은 입문할 때부터 유지봉초를 비롯하여 십여 가지의 수인을 아침에 기상해서 밤에 잠들 때까지 외웠다고 한다.
나는 유지봉초에서 다음 수인인 서지봉금(徐咫封禁)의 수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네크로노미콘이 신경질을 냈다.
“새끼손가락이 틀렸잖아.”
아!
“형태를 다시 기억해서 처음부터.”
‘…….’
모험의 기억, 그리고 전뇌자에게 전승받았던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알고 있는 수인만 따로 추려 보니 약 500가지가 넘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수인을 알고 있었나?’
물론 이 숫자의 상당수는 지선 망량의 술법지식, 삼황내문의 술법, 전뇌자에게 전승받은 대웅제국의 자료다. 대웅제국의 동료들은 나중에 내가 술법이나 마법을 익히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무림 역사상의 술법 자료를 전뇌자에게 입력해 두었던 것이다. 대부분 기초단계이긴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 내가 수련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외우고 수련했던 수인은 채 열 개도 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너무 많은 수인이 있어서 나 자신이 당황할 정도였다.
파파팟
내가 십대수인을 차례로 펼쳐내는데 성공하자 네크로노미콘이 말했다.
“모산파의 수인을 모두 펼쳤군. 그럼 여기서 질문이다.”
‘뭔데?’
“모산파의 수인을 펼치면 모산파의 술법밖에 쓸 수 없는 거냐?”
‘……?’
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기에 당황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런 거 아니었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파파팟
네크로노미콘 또한 나처럼 수인을 맺었다. 고양이 손이라서 안 될 것 같았는데 모양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내가 펼치는 십대수인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잠시 후 네크로노미콘의 수인이 완결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치이잉!
갑자기 허공에 오망성(五望星)이 그려지더니 강력한 흑뢰(黑雷)가 터져 나와서 광선처럼 뻗어져 나갔다. 거기에 깃들어있는 마력이 굉장히 강했기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모산파의 수인을 써도 흑마술의 파괴마법이 발동될 수 있다.”
‘……!’
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어떻게 그게 되는 거지?’
“수인은 술수의 깨달음을 압축하여 필요할 때 효율적으로 힘을 방출할 수 있는 통로. 다만 술수 자체의 깨달음이 깊어서 수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경우 수인의 성향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술수를 발동시키는 게 가능하다.”
‘뭐라고! 난 왜 이제야 그걸 알았지?’
여태 술수에 이런 성격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내가 당황해하자 네크로노미콘이 말했다.
“그야 굳이 수인을 엉뚱하게 맺으면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것보다 그냥 수인을 생략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그 상급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굳이 이런 원리를 네게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과정을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하는 게 좋지 않으냐?”
‘아하…….’
나는 설명을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그럼 대체 수인을 왜 수련하는 거야? 어차피 상급경지에 오르게 되면 생략해 버릴 수 있는 건데 왜 굳이……?’
“흐음. 너는 무공을 할 줄 안다고 하니까 알기쉽게 비유해 주지.”
‘무공에?’
네크로노미콘은 내가 맺고 있는 수인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수인(手印)이란 무공의 형(形)과 같다.”
‘형?’
“그래.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비유하면 적당하겠지. 무공에서 최상의 단계는 자신의 배웠던 무예를 한 차례 잊어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던데 맞나?”
‘뭐 그런 셈이지.’
초절정의 단계에서 신검합일과 검강을 얻은 후 자기자신을 잊는 망아의 단계를 거치고 의념천주를 깨달아 절대지경에 오른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기에 네크로노미콘의 말은 별로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아의 경지에 이르려면 전제조건이 있지.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걸 잊을 수는 없다.”
나는 그제서야 네크로노미콘의 비유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흠……! 그릇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으면 쏟을 수 없다는 거군. 우선 형(形)을 익혀야만 마도의 상위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 잘 이해했어.”
‘호오……!’
나는 네크로노미콘이 무공에 비유해주자 수인을 왜 수련하는지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지금까지 생판 알아먹을 수 없는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내 전공과 결부되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그렇다.
형태를 비롯하여 가장 구차하고 귀찮아 보이는 기초! 그 기초를 성실하게 닦지 않는다면 결코 상승경지는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리라.
‘마도 또한 무공과 꽤 비슷한 점이 있군…….’
“그런 셈이지. 최상승 경지로 갈수록 비슷해질 것이다.”
‘잠깐. 그러면 왜 내가 아는 마도사들은 성실하게 수인 같은 걸 수련하지 않은 거지? 대부분 주문이나 제물으로 다 때우던데…….’
“그것 또한 핵심적인 질문이군.”
네크로노미콘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무공이든 술법이든 꽤 정직하게 시간을 들인 만큼 강해지는 능력들이다. 재능 때문에 속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그런 편이지. 하지만 마도(魔道)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
“마도는 기본기를 하나도 몰라도 운 좋게 제물을 잘 바쳐서 상위 마신의 마음에만 들면 하루아침에 최고의 마력을 지닐 수도 있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날로 먹기’가 너무 쉬운 데다가 심지어 수련의 방향도 어떻게 하면 쉽게 날로 먹을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편이다. 노력보다 운이 훨씬 더 큰 작용을 하는 분야라는 거지.”
‘…….’
“계약 한 번만 잘하면 인생 역전이 가능하니까 사실 기본기에 목숨 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헤르메스나 시몬 마구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헤르메스? 시몬 마구스? 영지주의 일파의 마도사들 말이냐?’
내 반문에 네크로노미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시몬 마구스는 알다시피 외신과 계약 한 번 성공한 덕에 삼황오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시몬의 스승인 헤르메스 또한 사실은 모나드에서 흘러나온 석판을 운 좋게 얻은 덕에 마신이 되었으니 운빨 하나로 성공한 대표적인 놈들이지.”
‘……?’
나는 순간 놀랐다.
‘잠깐…… 시몬 마구스 얘기는 알고 있었는데 헤르메스는 뭐지? 모나드에서 흘러나온 석판이라고?’
네크로노미콘은 핑크빛 발바닥을 잠시 할짝이더니 말했다.
“모르고 있었나 보군. 헤르메스 또한 자력으로 마도를 터득하여 종사가 된 천재가 아니야. 놈은 인간과 천사의 혼혈이었는데 우연히 마도의식으로 소환한 게 모나드에 잠들어 있던 원시의 석판이었다.”
‘헉!’
“그 녀석은 석판의 마력 덕분에 마신이 된 거나 마찬가지지. 완전 운이 좋은 놈이야.”
설마 이런 데서 마법의 신 헤르메스의 비사를 듣게 되다니!
‘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냐? 설마 헤르메스의 동료냐?’
“멍청하기는. 나 네크로노미콘은 삼천세계 모든 마법사용자의 이력을 알고 있어. 나 자신이 근원의 마도서이기 때문이다.”
‘……!’
무슨 그런 게 다 있냐?!
이 자식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놈이네?!
나는 놀라고 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모나드에 잠들어 있던 원시의 석판? 그건 뭐지? 헤르메스 놈이 석판을 들고 다니지는 않던데…….’
“최강의 마도구 중 하나이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강력한 물건이지. 물론 그 석판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고 모나드의 마력이 응축되어 있기에 강력해진 경우이다.”
‘나도 그거 얻을 수 있냐?’
“헤르메스의 영혼과 동화되어 있으니까 놈의 영혼을 흡수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작 그 석판의 마력은 헤르메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니까 주의해야 할 거다.”
‘흠…….’
“별개의 해체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모나드의 석판…….
헤르메스의 영혼에 그런 특급 마도구가 잠들어있단 말이지…….
“아무튼 잡설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마도는 날로 먹는 게 가능한 분야이기에 귀찮게 기본기를 진지하게 연마해서 강해지려는 놈은 별로 없다. 마도의 기술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위단계의 마신을 소환해서 생존하기 위해 자체적인 생존율을 올리기 위한 것일 뿐…… 무공처럼 진지하게 발전시키지 않는 이유지. 마도로 문명을 세운 놈들도 마도 자체의 경지에는 한계를 느끼고 포기하곤 했다.”
‘……그렇게 날로 먹는 분야인 주제에 전 우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힘이라니 희한하군.’
“너희 인간만 날로 먹고 싶은 게 아니거든. 쉽고 편하게 힘을 얻을 수 있다는데 전 우주의 종족들 중에서 누가 마다하겠느냐?”
‘…….’
나는 네크로노미콘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아무튼 마도도 무공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거잖아. 수인은 형을 익히는 수련단계이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수련을 하면 되는 거냐?’
“별거 없다. 연무진!”
‘어?!’
우웅!
그러자 아까와 같은 연무진의 현상과 함께 나는 나 자신의 실존이 겹치는 경험을 또다시 하게 되었다. 또다시 필사적으로 나 자신의 심득을 정리하려고 하자 이윽고 짜내어지듯이 깨달음이 퍼부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모산파 십대수인의 의미를 전부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육체가 없는데도 머리가 어질 거리는 것을 느꼈다.
‘큭…… 어지러워…….’
“어지러울 수밖에. 모든 트리거를 강제발동시켜서 깨달음을 끌어내면 영체에 무리가 가니까.”
‘이, 이 자식…… 설마 이런 식으로 수인을 하나하나 쓸 때마다 연무진을 써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거냐?’
“그럴 생각인데.”
‘아니 젠장! 영체에 피해를 준다며! 이 수련 하다가 내가 소멸되면 어쩔 생각인데!’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네크로노미콘이 말했다.
“모산파 십대수인을 깨달은 지금은 그 수인을 펼치면서도 다른 술수를 전개할 수 있겠지? 아까 내가 했었던 것처럼.”
‘……그래.’
“무수한 수인의 형(形)에 스며들어 있는 깨달음. 그것들을 이용해서 하나하나 깨달음의 축(軸)을 쌓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거야. 마치 파장이 겹쳐서 더 큰 파장을 만드는 것처럼.”
‘알겠는데…… 연무진 때문에 내 영체에 피해를 입는 문제는?’
“네가 스스로 피해를 줄여야지.”
‘……?’
이게 뭔 소리냐……?
내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네크로노미콘을 쳐다보자 놈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미 너는 연무진의 도움으로 두 번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것만 하더라도 보통 인간이라면 최소 50년, 수재라면 20년은 용맹정진해야 하는 깨달음이지. 그럼 네가 스스로 수인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용해서 연무진의 피해를 감소시키는 수인을 새로 창작해야 하는 거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눈을 크게 떴다.
‘뭐, 뭣이? 수인을 창작하라고?’
“설마 다 날로 처먹으려 했느냐? 실시간으로 너한테 깨달음을 떠먹여 주면 그 정도는 혼자서 해낼 수 있어야지.”
‘……!’
“깨달음을 갈무리할 시간을 딱 24시간 주지. 그 후에 새로운 수인의 깨달음을 줄 거다. 이걸 반복하는 동안에 연무진 때문에 생겨나는 영체의 피해를 너 스스로 완전히 줄일 수 있다면 수인의 수련은 마치도록 하겠다.”
‘자, 잠깐! 네가 나한테 주는 깨달음의 기준은? 그냥 아무거나 깨달음을 주는 거냐?’
내가 기겁을 하며 대꾸하자 네크로노미콘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 있다면 종파만류(宗派萬流)도 있는 법이지. 나는 삼천세계 억겁의 마도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경지를 구축하는 데 효율적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알고 있는 수인을 꺼낸다면 거기에 맞춰서 깨달음을 주도록 하지.”
‘…….’
나는 네크로노미콘이 너무 여상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도리어 얼떨떨해졌다. 너무나 상식을 초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깨달음을 얻어서 상위로 가는 걸 넘어서서 최상의 경지에서 하위를 통찰하여 그 불확실성 속에서 최적화된 깨달음을 찾아낼 수 있다니! 그것은 실로 무한(無限)에 이르는 가짓수의 마도의 깨달음 하나하나를 모두 완벽하게 깨닫고 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냐?’
동시에 실감할 수 있었다.
이놈은 괴물이다.
삼천세계의 지식이 모이는 허공록에서 주황색 띠지를 지니고 보관되어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허괴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마법이긴 하지.”
그렇게 말한 네크로노미콘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24시간 동안에 네가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마법 그 자체에 대해서 심도있게 고민을 해 봐라. 이미 독(毒)은 네 몸에 퍼지기 시작했으니까.”
독?
쩌엉!
네크로노미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갑작스럽게 둔중한 고통과 함께 내 팔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둔중한 고통의 중심에서부터 내 영체의 색채가 상당히 흐릿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독인가?’
“그래. 강제로 깨달음을 각성시키는 대신 네 영체는 실시간으로 구멍이 나고 있다.”
‘……!’
“진지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을걸? 만일 네가 제때 연무진의 독(毒)을 중화시킬 만한 수인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넌 여기서 영체가 산산이 분해되어서 사라질 것이다.”
‘젠장! 이렇게 빡세게 할 필요 있냐!’
갑자기 수련하다가 소멸 위험이라니!
난데없는 위기 때문에 내가 당황하자 네크로노미콘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묘안(猫眼)으로 나를 쳐다보며 쿡쿡 웃었다.
“수십 년치 깨달음을 날로 먹으면서 배가 불렀군. 원래 마도란 강대한 힘을 원하여 그만한 대가를 바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마도의 수련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으윽…….’
“우는 소리 그만하고 잠깐 휴식시간을 줄 테니 잘 고민을 해보아라. 내가 볼 때 사실 넌 우는 소리를 할 이유가 없는 수련이니까.”
‘…….’
“난 허공록에 갔다 온다.”
뿅!
네크로노미콘은 그렇게 말하고는 뿅 하고 사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뿅 하는 소리였기에 나는 살짝 헛웃음이 나왔는데 네크로노미콘의 소멸장면을 보고 있던 제강이 침음성을 흘렸다.
[상상도 가지 않는 존재로군…… 저런 게 우주에 풀려 있지 않은 것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제강. 무슨 소리냐?’
[백웅이여…… 차후 저 네크로노미콘의 봉인을 풀 생각인가?]아…… 그러고 보니 네크로노미콘의 봉인을 푸는 문제가 있었지?
나는 제강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이 허괴에서 나가려면 최소 2단계까지는 풀어야겠지…….’
[그런가…… 2단계는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이 허괴에서 나간 후에는 그 이상의 봉인을 푸는 것에 대해 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있던 제강이 갑자기 네크로노미콘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 저자가 더미데이터라고 표현한 이 허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나, 제강이다…… 그리고……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더미데이터에는 저 네크로노미콘의 행적과 관련된 자료가 있다…….]‘더미데이터에 네크로노미콘의 행적이 있다고?’
그건 무슨 의미지?
뜻밖의 얘기에 내가 흥미를 느끼자 제강이 말을 이었다.
[그 행적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끔찍하고…… 암울한 것이다…… 자세히는 그 행적을 알 수 없으나 그 광기(狂氣)는 나에게 생생하게 느껴지는구나…… 네크로노미콘은…… 한때 만마(萬魔)의 칭호를 달고 세계를 활보할 자격이 있었다는 유일무이한 마도서였다…….]‘만마의 칭호?’
[현행 세계에는 남아 있지 않은 개념이지만…… 그 칭호는…… 신조차 두렵게 하였노라. 저 존재는 봉인되기 전에는 실로…… 실로 두려운 존재였다.]‘…….’
[백웅이여…… 이것을 생각해두어라…… 허공록에 일부러 봉인하여 세계와 괴리될 만큼의 마도서가…… ‘어떤’ 이유로 봉인되었는가를…….]…….
확실히…… 네크로노미콘 저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게 없군…….
나는 고민하다가 제강에게 대답했다.
‘충고 고맙군. 나도 네크로노미콘의 봉인은 신중하게 접근할게.’
[조심해라…… 저것은…… 보통의 역량으로는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알고 있어.’
나는 씩 웃었다.
‘뭐 어찌 됐든 아직 기지도 못하는데 날아다니는 놈을 생각해봤자 별 수 없는 거 아니겠냐?’
선악이나 호오를 떠나서 마도라는 세계에서 나와 네크로노미콘의 수준 차이는 너무나 막대했다. 하늘과 땅 차이라는 표현조차도 네크로노미콘을 모욕하는 언행이 될 것이리라.
이 말도 안 되는 수준차이를 어느 정도 메꾸지 않으면 네크로노미콘을 다루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의심이 아니라 새로운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마도를 최선을 다해 수련하는 것이었다.
우웅!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영체의 상태를 관조했다. 기를 다룰 때와는 달리 내 영체를 마력(魔力)으로서 파악하자 예전과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깊게 몰입하여 생각을 했다.
‘기경팔맥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마력이 흐른다. 세피로트의 파쓰(path)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 불규칙한 마력의 흐름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했겠군…….’
마력의 운행을 파악한 이유.
그것은 네크로노미콘이 내놓은 과제가 무슨 의미인지를 대충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과도한 깨달음 때문에 내 영체가 파괴되는 현상. 이 현상을 해결하려면 마도의 능력을 이용해서 해독(解毒)의 수인(手印)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내 몸의 마력이 어떻게 흐르는지부터 알아야 하겠지.’
해독이라 하더라도 이 영체 자체를 분석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나는 마력의 세계에서 내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이렇게 바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네크로노미콘이 깨달음을 강제로 짜 주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사 분백의 수인에서 얻은 깨달음. 그리고 모산파 십대수인에서 얻은 깨달음. 이것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형(形)에 의(意)가 압축되어 있다.
나는 그 말을 나 스스로 되뇌었다. 그것은 실로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백의 수인에는 백을 쉽게 떼어낼 수 있게 하는 제갈사의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백을 떼어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 이혼대법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스며들어 있다……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果)에서 인(因)을 역으로 깨닫게 된다.’
모산파 십대수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산파에 입문한 지 삼 년 내외의 문도조차 십대수인을 다 외워서 눈감고 펼칠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십대수인의 의미를 다 깨닫고 원활히 응용할 수 있는 건 최소 장로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는 역으로 십대수인을 통해서 ‘장로급’의 술법 이해도를 얻어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만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에 네크로노미콘의 진짜 의도를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역천(逆天)의 수련법이다! 무공처럼 형(形)을 수련하다 보면 의(意)를 깨닫는 게 아니라 도리어 형태에 잠재된 깨달음부터 얻어서 그 인과(因果)의 범주에 있는 모든 이해도를 한순간에 습득하다니……!’
무공을 익혀서 신역에 도달한 나이지만 여태 만나보았던 그 어떤 고수도 무공을 이런 방식으로 깨닫게 하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이게 가능하려면 삼천세계(三千世界)의 만무만식(萬武萬式)을 모조리 통찰하여 모든 무공이 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미리 다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걸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네크로노미콘의 마도경지가 대종사(大宗師)라는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느껴진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개의 깨달음이 겹쳐지면서 제 3의 영역이 감지되는게.
‘이게 네크로노미콘이 말한, 깨달음의 축(軸)이 겹쳐지는 느낌인가…….’
츠즈즈즈!
나는 세피로트 파쓰를 이용해서 영체에 흐르는 마력을 안정화시켰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인에서 얻은 깨달음을 응용해서 내 몸의 마력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형태’가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해 볼까?’
파바밧
나는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수인을 만들어 보았다. 분백의 수인에서 얻은 이혼대법의 미세한 활용법, 그리고 십대수인에 담겨 있는 술력(術力)의 ‘방향’을 다루는 요령이 합쳐진 수인이었다.
우드득
그러자 수인에 맞춰서 몸의 마력이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과정 속에서 아까 네크로노미콘이 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좀 더 이해할 수가 있었다.
‘흠. 수인이란 깨달음을 압축해서 효율적으로 힘을 방출할 수 있는 통로라는 것이군…….’
즉 수인의 형태를 이용해서 몸에 존재하는 마력, 기, 초능력과 같은 초월적 능력의 자원을 빼내기 좋은 통로, 관(管)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해독의 수인 또한 만들 수 있다.
내 몸에 존재하는 ‘영독(靈毒)’을 따로 몸 밖으로 방출하기 좋은 구조의 ‘통로’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리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