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2)
00002 ——————————–
첫 번째 죽음
나는 오늘도 암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목이 칼칼하고, 죽 한그릇 먹고싶고, 막상 갈증을 축이고 나면 헤아릴 수 없는 공허감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밖으로 걸어나와서 버릇처럼 되어있는 육합검법(六合劍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육합검법.
강호에서 가장 흔한 검법이고, 강호에서 가장 기본적인 초식으로 취급받는 육합개산(六合開山)은 좌로 몸을 반쯤 비튼 후, 역반동으로 우상으로 그어올리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대각선베기에 불과하다. 삼척동자도 두세 번만 따라하면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육합개산이 포함된 하나의 절(節), 육합검(六合劍)의 식(式)은 어떻게 될까?
총합 32개의 동작, 8초식으로 이루어진 육합검을 익히는데는 통상 일반인에게 1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시장의 하급 호위무사들이나 익히는 육합검식에도 한 달이나 되는 수련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육합검식을 익혀서 실전에서 쓰는 도중에 그 동작을 온전히 군더더기 없이 사용하는데는 실전경험만 5년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섬세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공또한 받쳐줘야 하기에, 일류의 경지에 접어드는데는 40여년 이상이 걸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는 무공에 입문한지 올해로 45년째였다.
그러나 일류의 경지는 꿈도 꾸지 못한 상태로 허름한 초막에서 매일같이 육합검법을 반복해서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호에서 내 경지는 아무리 잘 쳐줘도 이류, 그것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부류일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
휘잉 휘잉!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거 같아서 일부러 입을 꾹 닫고 칼을 휘두른다.
아무리 욕을 해봤자 내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기에 그냥 닥치고 있는다.
오랫동안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최소한의 위안법이었다.
육합검법 외의 검법을 수련하지 않는 이유?
수련하지 않는 게 아니다. 수련하지 못하는 거다.
검법은 육합검법, 내공은 삼재심법(三才心法)밖에 모르니까!
나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거지같아서 결국 욕을 하고 말았다.
“씨발…”
나는 고수지망생(高手志望生)이었다.
처음부터 출신이 무림세가(武林世家)인 것도 아니고, 명망있는 고수의 밑에서 가르침 받은 것도 아니다. 무림인으로써 대성할만한 선천적인 조건이 없었는데도 억지로 표국에서 표사로 일하면서 무공을 배우고 무공에 매달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못생겼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어렸을 때부터 아낙들이 내 얼굴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갔고, 못된 여자애들은 내게 침을 뱉기도 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 혐오는 다르지 않아서 잘생긴놈 몇몇이 나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거나 바지를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평범함과 가난함 사이를 맴돌았다. 나이 열두 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근방의 촌장 집에 맡겨져서 자랐다. 촌장은 마치 하인처럼 나를 부려먹었고, 나는 촌장 아들놈의 하인처럼 계속 살아와야 했다. 표국의 표사로 독립하고나서는 좀 나아졌지만 그 때의 일은 지금도 심리적인 낙인이 되어 있다.
그래, 나는 검을 제대로 쥐어서 휘두를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표국의 표사가 되려 지원했고 수십 년 동안 표국에서 일했다. 표사에게는 기본적인 무공이 제공되므로 그걸 열심히 익히다보면 나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못생기고 가문도 없고 똥같은 내 인생에 ‘무공’이라는 힘이 있으면 어떻게든 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건 착각인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표국이 재작년에 멸망한 것은 고작 한 명의 일류고수(一流高手) 때문이었다. 중정 일대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혈린수(血燐手)가 다른 표국의 의뢰를 받고 표국에 쳐들어왔던 것이다. 표국의 무사들은 혈린수의 손에 속절없이 죽어나갔고 결국 표국주가 나서서 혈린수를 죽였지만 이미 피해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표국주는 표국 해산을 선언했고, 나는 그때까지 벌어뒀던 돈을 가지고 세상으로 내쫓겼다. 내쫓겼다고 표현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은 고작해야 오십 냥에 불과했고, 이걸로 노후까지 먹고사는 건 턱없이 부족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소작농이 되어서 천민이나 다름없이 사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인생 마지막 오기로 소작농의 삶을 거부했다.
여태껏 10대 후반부터 수십 년동안 계속해서 무공을 익혔다. 비록 육합검법과 삼재심법 뿐이었지만 이러다가 갑자기 대성(大成)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에 산속에 초막을 지어놓고 밑도 끝도 없이 검의 경지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 에취이익!!”
그리고 수련을 시작한지 2년째, 나는 체력이 딸려서 더 이상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초막 한켠에 움츠려서 떨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가… 감기인가…’
기가 막힌다.
무협소설의 고수들은 산에 은둔해서 살면서 정정한 체력으로 열심히 수련을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이내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아챘다. 돈이 없어서 근처의 들짐승을 잡아먹고 풀뿌리와 버섯을 캐서 먹고살기를 2년, 50대 중후반의 늙은 체력으로는 몸을 함부로 움직이다가 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감기는 위험하다. 단순한 병이 아니라 지금 나는 체력을 회복해서 감기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 이대로라면 흔한 산중의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둘러서 초막의 짐을 정리해서 하산할 준비를 했다.
가재도구를 챙겨서 보자기에 넣던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에취이익! 쿨럭… 쿨럭.. 으흐흑….”
감기 때문에 열이 나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서러움이 마구 복받쳐온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가?
하산할 때는 검술을 대성해서 세상을 오시하려고 한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영양실조와 체력부족으로 감기에 걸려서 살아남으려고 하산한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살긴 살아야겠기에 눈물을 억지로 닦고 보자기를 등짐으로 지고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까지 가려면 산길을 두 시진은 타야하기에 조심스럽게 험난한 풀숲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중이었다.
“으, 으어어억!!”
덜컥
갑자기 발 밑이 허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내 몸이 땅 밑으로 끌려들어가는 듯 했다. 떨어져내려가기 전에 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버텼는데, 대롱대롱 매달려서 보니 밑은 삼 장도 넘는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공포가 몰려왔다. 무림의 고수들이라면 삼 장 정도의 높이는 경신법으로 가볍게 착지할 수 있을테지만 나는 그런 고수가 아니다. 내 내공은 감기도 몰아내기 힘든 수준이니 떨어지면 백발백중 죽거나 병신이 되리라. 나는 나뭇가지가 끊어질 것 같자 급히 등의 봇짐을 땅 밑으로 던졌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가재도구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래도 당장 떨어져 죽는 건 면할 수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절벽의 옆으로 손과 발을 옮기며 발디딜 곳을 찾았다. 몇 번을 더듬거린 끝에, 나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서 절벽에서 발디딜 틈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제 밑으로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야 한다. 뭐가 더 쉬울지를 상상해 보았지만, 나는 밑으로 가는 편이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절벽은 조금이지만 발디딜 틈새나 윤곽이 많은 편이었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뒷감당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감기에 걸린 것도 잊고 전력을 다해서 움직였다.
부들부들
마침내 전신의 땀을 비오듯 흘린 끝에, 나는 제대로 두 발을 디딜만한 공간에 붙어서는 데 성공했다.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절벽 옆에 왠 동굴이 있는 게 보였다. 절벽 한가운데 동굴이라니 명백히 인공적인 것이라서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동굴쪽으로 몸을 옮겼다. 어차피 절벽에 평생 매달려있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절벽 안으로 들어오자 살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고 싶었지만 이 동굴이 어떤 곳인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동굴 안쪽으로 걸어들어가기로 했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동굴은 제법 깊어서 벽을 더듬거리며 꽤 걸어야했다.
쿵
종유석에 부딪혀서 머리에 혹이 생겼다. 나는 아픔 때문에 비명을 눌러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자 조심스레 기어서 빛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빛이 새어나오는 것은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구슬이 박혀있는 방이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생성한 게 분명한 장소! 나는 그 광경을 발견하는 순간 기쁨 때문에 미칠것만 같았다.
“만세!”
이것이 바로 기연(奇然)인가!
소설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가!
너무 기뻐서 나는 목에서 뜨거운 게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구슬에 가까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쓔욱 – 퍼벅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며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순간적인 기억상실을 딛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갑작스레 정면에서 쇠말뚝이 날아오더니 내 배를 정확하게 관통해버린 것이다. 내장이 꿰뚫렸으니 무시무시한 고통이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선혈이 쏟아진다. 입에서 마구 피가 터져나왔다.
“으, 으억…. 으에에엑…”
나는 꿇어앉아서 곧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 동굴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기연을 지키는 기관장치가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인생은 어찌 이리도 멍청하고 재수가 없단 말인가!
… 죽는다?
이대로 죽어?
“크으… 으으윽…”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 상자 안에 있는 게 대체 뭔지는 알고 죽어야겠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상자로 기어갔다. 구리로 된 그 상자는 다 죽어가는 내 힘으로도 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손만 대면 열리게 되어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이… 이건…”
그리고 죽기 직전에 상자 안으로 오른손을 들이밀자 왠 책(冊)이 한 권 잡혔다.
동시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의식이 혼미해졌다.
이제 죽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